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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혼자 만렙 뉴비-140화 (141/653)

140화. 고인물이 전황을 흔드는 법 (3)

언덕 너머에서 나타난 건 마인 협회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천유성.

검성…… 혹은 검귀라 불리는 바로 그놈이었다.

‘빌……어먹을.’

호센벨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만약 지원이 저 녀석 하나뿐이었다면, 이토록 당황하진 않았을 것이다.

천유성이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건 인정하는 바이나 그래 봤자 한 명뿐이었으니까.

문제는 녀석 뒤로 엄청난 수의 인파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는 내공을 갖고 있는 이들.

문양을 보건대 ‘중화’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틀림없었다.

‘강진혁이나 천유성이 중화 길드와 친분이 있을 리가 없다.’

특히 진혁은 [랭커 섭외, 시련의 탑을 오르다]란 프로그램에서 중화와 흑운 길드 모두에게 물을 먹이지 않았던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저 조합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온갖 가능성을 떠올려 보고 해결책을 고심해도, 지금 상황에서 호센벨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중화 길드의 기둥이자 중국 모든 플레이어들의 정점인 남궁천.

그는 얼마 전 중국을 방문한 플레이어 하나 때문에 심기가 꽤나 불편했다.

웬 건방진 놈 하나가 중화 길드에서 관리하는 지부 하나에 쳐들어와서 승부를 가리자며, 난리를 피운 것이다.

그것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놈과 똑같은 가면을 쓴 채 말이다.

지금이 몇 십 년 전처럼 도장 깨기나 하고 다닐 때도 아니고. 중화 길드의 지부장들은 그 요청을 가볍게 무시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어필해 길드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하루에 수백 명씩 찾아왔던 탓에, 축객령은 더욱 매몰찼다.

하지만, 상대는 막무가내로 검을 뽑았다.

좋아. 그렇게 팔다리 중 하나가 부러지고 싶다면 소원대로 해 주지.

지부장들은 그런 생각을 한 채, 관절을 꺾었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박살을 내 주겠다고 나섰던 중화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모조리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팔과 다리. 어디 하나 멀쩡한 곳 없이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당해 버렸다.

심지어 그중에는 공대장급에 해당하는 랭커까지 섞여 있었으니, 더 이상 상황을 우습게 볼 수만도 없게 됐다.

게다가 한술 더 떠 남자는 역겨운 도발까지 날렸다.

“이거야 원. 차라리 우리 동네 노인정에 있는 박 영감님 효자손이 더 매섭겠네. 겨우 이딴 걸로 중화니 뭐니 할 바엔 차라리 중국집이나 차려서 꿔바로우나 팔아라. 특히 남궁천인지 뭐시기인지 하는 놈, 걔한테 전해. 정 억울하면 7층으로 오라고. 거기에 이 몸뿐 아니라 우주최강 절대존엄이신 강진혁 님까지 있으니, 만약 쫄지 않고 온다면 격의 차이라는 게 뭔지 제대로 보여 주지.”

국어책을 읽는 듯 목소리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누가 미리 적어 준 걸 그대로 따라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남궁천에게 있어 중요한 건 놈의 목소리 따위가 아니었다.

‘강진혁. 그 쓰레기를 죽이고 저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마저 죽일 수 있다.’

그 사실에, 남궁천이 몸소 공대원들을 이끌고 7층으로 나섰다.

추격은 수월했다.

애초에 천라지망을 펼친 중화 길드의 정예들을 상대로 도망갈 수 있는 플레이어 따윈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마침내 가증스러운 놈을 바로 등 뒤까지 쫓았을 땐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마나 잔인하게 죽여야 속이 풀릴지.

그리고 울부짖는 상대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시는 차 한 잔은 또 얼마나 달콤할지.

그 순간이 기대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

잠시 뒤, 평야에서 강진혁까지 발견했을 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모든 게 완벽했다.

거기까지는 모두 좋았다.

딱 하나.

놈들의 뒤로 다이어 울프를 위시한 엄청난 수의 병력이 숲속에서 나타나기 전까진.

“나, 남궁천 님!”

“적입니다. 숫자는 약 700! 모두 B급 이상으로 구성된 정예들입니다!”

“다이어 울프들에…… 특히 강한 마력을 지닌 랭커급 플레이어도 섞여 있습니다!”

다급히 쏟아지는 보고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저놈들이 언제 저런 세력을……!”

남궁천이 기함했다.

분명, 진혁은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채 주로 혼자 다니는 걸로 알고 있었다.

유천영이나 몇몇 인맥들의 존재는 남궁천 또한 알고 있었지만, 그들 중에서 대규모 인원을 보낸 쪽은 없었다.

그 정도는 이미 중화 길드의 정보부를 통해 확인이 끝난 사항이었다.

허면, 저들은 누구란 말인가?

“강……진혁!”

남궁천이 어금니를 부러져라 깨물었다.

***

‘크으. 이것도 진짜 장관이긴 하네.’

두 세력 사이에 낀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군 길드와 준비해 둔 함정들이 발각된 건 계획 밖의 일이었으나 어차피 진짜 노림수는 바로 이거였다.

몰래 탑 밖으로 빼돌린 천유성이 중화 길드의 랭커들을 모조리 끌고 오도록 한 것.

일이 계획대로 잘 풀리기만 한다면, 제아무리 마인 협회와 혈족들의 연합이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비벼 볼 만한 상황이 연출될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너 때문에 하루 종일 고생한 걸 생각하면…….”

천유성이 쇳물을 삼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내가… 그 대사를 읽을 때 얼마나…… 대체! 얼마나! 으아아악!”

어지간히 수치스러운 모양이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 역시 우리 검성 잘했어. 오구오구.”

개껌이나 츄르라도 있었으면 하나 줬을 텐데. 아쉽게도 근처에 편의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코인 상점에서 사 주자니 너무 아깝기도 했고.

“그, 그나저나 형. 정말로 이 작전 괜찮은 거 맞는 거예요?”

이태민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 이 작전을 들었을 때만 해도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었으나.

막상 그 상황이 닥치자 정신 줄을 놓아 버릴 것만 같았다.

“괜찮아. 나만 믿어.”

이건 반드시 먹힌다.

왜냐하면…….

과거 시련의 탑을 오를 당시에도 신격들을 상대로 써먹어 봤던 방법이었으니까.

큼―! 크흠!

진혁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왜 오다가 말아? 설마 겁이라도 먹은 거냐? 하긴, 우리 쪽이 좀 세 보이긴 하지. 너희한테 한 방 먹이려고 준비를 좀 많이 했거든.”

진혁이 큰 소리로 고함쳤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신감이다.

남궁천이나 호센벨트나 주어진 정보가 제한되어 있을 터.

‘다시 말해 이 전황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건 오직 나 하나뿐이다.’

진혁이 아예 단검까지 눈 위에 꽂아 둔 채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동시에 여유 있게.

양측의 진영을 훑으며, 어서 들어와 보란 제스처를 취했다.

들어와, 들어와.

한 걸음만 내디디면 그토록 바라던 먹잇감이 있잖아?

‘자신 있으면 어디 한번 와 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

‘빌어먹을. 말려들면 안 된다. 저 녀석 페이스에 말려들어갔다가 대체 몇 번이나 당했잖아.’

‘절대 상대 쪽이 만만한 게 아니야. 저 병력의 수와 질을 봤을 때…… 함부로 먼저 움직였다간 오히려 우리가 당할 수도 있다.’

진혁이 여유를 부릴수록.

두 세력의 몸은 더욱더 움츠러드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가장 약한 쪽이 가장 크게 판을 쥐고 흔드는 셈이다.

“쯧. 재미없네. 이렇게 신중해서야 기껏 세력을 모은 의미가 없겠어.”

진혁이 시시해서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단검을 다시 회수한 뒤, 일행들의 어깨를 툭하고 쳤다.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싸우려면 좀 더 예열이 필요할 것 같은데, 우리는 먼저 빠질게. 나머진 전부 맡겨도 되겠지? 저 정도는 너희끼리도 충분히 제압 가능하잖아?”

진혁이 어중간하게 턱짓했다.

어찌 보면 남궁천을 향한 것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호센벨트를 향한 것 같기도 했다.

이 정도면 됐다.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천유성과 이태민, 유연화가 따랐다.

“큭!”

“저, 저 녀석…….”

쫓아야 한다. 지금 당장 쫓지 않으면, 놈들은 곧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등을 보였다간 상대에게 그대로 뒤를 내줘야 한다.

전투가 아닌 전쟁에 있어 뒤를 잡힌다는 건 곧 전멸을 뜻하는 일.

그런 멍청한 수를 두기엔 남궁천과 호센벨트의 머리가 너무나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저 녀석들을 최대한 빨리 정리한다.”

“모조리 죽인 후에 강진혁을 처리하겠다.”

두 사람이 결정을 내렸다.

병력이 재빨리 자리를 잡았다.

시간이 없었기에, 두 진형 다 공격을 극대화할 수 있는 포지션을 구축했다.

속전속결. 항복 따위는 없다. 그저 상대를 전멸시키고 말겠다는 일념만이 전장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형이 완벽하게 갖춰진 순간.

“돌격!”

“쓸어 버려라!”

양측에 있던 대장들이 각자의 애병기를 꺼냈다.

남궁천의 ‘검강’과 호센벨트의 ‘기사의 맹세’가 각기 다른 빛을 뿜어냈다.

그렇게.

눈 덮인 평야가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

전장에서 이탈한 진혁은 곧바로 숲의 외곽에 위치한 ‘녹지 않는 계곡’으로 향했다.

이곳은 계곡 전체가 얼어붙어 있는 데다, 폭포 아래 있는 거대한 동굴은 그 넓이가 엄청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진혁은 이곳을 서리 칼날 부족의 임시 거처로 삼았다.

“다 온 건가?”

“응.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봐.”

폭포 인근에 도착한 진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티모…… 어흠. 좀 작게 말했나? 티모!”

바로 암구어다.

“오, 오빠…….”

“형. 그건 좀.”

“젠장. 너는 하필 골라도 그딴 걸 고르는 거냐? 언제는 그걸로 불리는 게 그렇게 싫다고 하더니.”

일순간, 주위에 있던 일행들의 얼굴이 썩었다.

농담이 아니라 말 그대로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심지어 천유성은 벌레를 보는 듯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젠장. 이게 얼마나 효과적인 피아식별 수단인데.

다들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 거냐.

티모가 싫긴 했어도 이것만큼 확실하게 기억되는 단어도 없다.

전장에서 중요한 건 자존심보다 효율성이지. 암. 그렇고말고.

바로 그때.

얼음 폭포 너머에서 익숙한 트롤의 모습이 나타났다.

“대령.”

역시. 상남자답게 카라칼은 그 말을 받아 줬다.

“그래도 헤매지 않고 잘 찾아왔네. 혹시나 길을 잃어서 부족 전체와 헤매고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살짝 복잡하긴 했지만, 인간이 말해 준 대로 따라가니 어찌어찌 찾을 순 있었다.”

“그건 다행이군.”

“그나저나 어떻게 이곳을 알게 된 건가? 우리 역시 이 층계에 오랫동안 있어 왔지만,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

그렇겠지.

이 얼음 폭포는 워낙 교묘하게 감춰져 있는 곳이기도 했으니까.

‘나도 한때 빙상어 낚시에 미치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거다.’

영하 60도의 날씨에 팬티 한 장만 입고 물속에서 헤엄을 쳤다니.

아무리 젊은 혈기였다곤 하지만, 미친 짓이었다.

그래도 그때의 경험 덕분에 이렇게 쓸 만한 은신처를 찾을 수 있었으니 꼭 나쁘기만 했던 건 아닌 것 같다.

‘빙상어가 워낙 맛있기도 했고.’

그래, 뭐. 고생한 것도 다 추억이다.

“시답잖은 소리는 그쯤하고. 이제부터는 어쩔 거냐? 아직 제일 중요한 놈이 남아 있을 텐데?”

잠자코 있던 천유성이 갑자기 본론을 꺼내 들었다.

데카서스가에서 온 상위 혈족.

아직까지 그 녀석은 몸을 숨긴 채 어디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게다가 문제는 한 가지 더 있었다.

베르티온과 마인들로 구성된 별동대가 단군 길드를 처리했다고 했으니 언제라도 이쪽의 뒤통수를 노릴 수 있다는 점이다.

“자잘한 놈들은 너희가 맡아 줘.”

“너는 어쩔 생각이지?”

“나는 대어를 낚으러 가야지.”

미안한 이야기지만, 다른 사람들은 가 봤자 방해만 될 거다.

천유성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 굳이 따라가겠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놈이 어디로 향할지는 알고 있나 보군.”

“그래. 대충 짐작은 하고 있어.”

이 정도로 판을 만들고, 이 정도로 부하들을 희생시키면서.

녀석이 갈 곳은 단 하나뿐이다.

그리고 진혁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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