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가면무도회 (3)
“저는 릭의 동료나 부하가 아닙니다.”
건조함이 묻어나오는 말투로.
“오히려 그가 저를 위해 일하고 있죠.”
고블린이 터무니없는 사실을 내뱉었다.
설마…….
중간 관리자인 릭보다 위였다는 말인가.
두근! 두근! 두근!
빠르게 고동치는 심장.
전신에 솜털이 쭈뼛쭈뼛 일어났다.
‘이거, 거물이 나타났군.’
그렇다는 건 이 고블린이 바로 시련의 탑에서 일곱 밖에 없는 ‘상급 관리자’ 중 하나라는 뜻이 된다.
탑의 신격들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규격 외의 존재들.
심지어 진혁조차도 탑의 정상에 오를 때까지 상급 관리자 일곱을 전부 다 만나보지 못했다.
그만큼 베일에 가려져 있었기에, 이 만남이 주는 의미는 특별했다.
[Lv8 ‘탐식의 눈’이 발동됩니다!]
[대상과의 레벨 차이가 극심합니다.]
[‘행운’ 스탯과 ‘적응형’ 능력치가 추가로 발동됩니다!]
[‘탐식의 눈’이 대상의 상태창을 꿰뚫어보는 데 실패했습니다.]
혹시나 해서 사용해 봤지만, 돌아오는 건 실패를 알리는 붉은색 상태창이었다.
심지어 ‘행운’과 ‘적응형’을 써도 넘볼 수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상급 관리자의 수준은 신격들과 비교해야 할 수준일 거다. 아니면, 그보다 더 위이거나.
그래도.
‘나쁘지 않아.’
어지간한 랭커들도 상급 관리자와의 만남에서 몸을 가누는 것조차 쉽지 않았으리라.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마력만으로도 가게 내부가 타들어갈 것만 같았으니까.
과거였다면 자신 또한 이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하거나 쓰러졌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상대와의 격차가 아예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벌어져 있지는 않았다는 게 느껴졌다.
‘멀지 않았어.’
그래, 멀지 않았다.
과거보다 훨씬 더 빨리 따라잡을 수 있다.
어쩌면 따라잡는 게 아니라 넘어서는 것조차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에 차가운 얼음물을 부은 것처럼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흐음. 별로 놀라진 않은 모양이네요. 게다가 이 기운에도 여유롭게 버티시다니. 솔직히 말해 제 쪽에서 당황스럽군요.”
“이런 곳에서 상급 관리자분을 만나게 될 줄은 몰라서 사실 좀 놀라긴 했는데, 제가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을 몇 번 겪어 봤거든요. 덕분에 어지간해선 그러려니 하는 성격이 됐습니다.”
“호오. 저희에 대해 알고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얼핏 들어봤습니다. 일곱 명의 ‘무관(無冠)의 왕’들에 대한 소문 정도는요.”
진혁의 말에.
“……!”
이번엔 고블린의 표정이 급변했다.
이전과는 달리 얼굴에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까도 까도 놀랍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보군요. 하하. 과연……. 어떻게 그런 정보까지 알게 되었는지는 몹시 궁금하긴 합니다만…….”
“그건 탑의 규율에 어긋나는 거겠죠.”
“탑의 규율까지…… 하하! 맞습니다. 당신 말이 맞아요. 그건 제가 넘봐선 안 되는 영역입니다. 아무튼 재밌네요. 릭이 강진혁 플레이어님에 관해 들었던 게 과장이 아니라 과소평가였다는 생각이 들 정돕니다.”
“저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점이 드실 테지만, 지금 중요한 건 제가 도시에 숨어 있는 관리자 중 하나를 찾았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진혁이 능글맞게 웃었다.
일종의 이스터 에그라고 할까?
이 가면무도회에는 숨겨진 몇 가지 히든 퀘스트들이 있다.
지금처럼 도시 곳곳에 몬스터로 위장해 있는 중간 관리자들을 찾아낸다든지 하는.
그리고 그걸 발견한 플레이어들에겐 꽤나 쏠쏠한 보상이 뒤따라오게 되어 있었다.
고블린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정보의 뒷배경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하스팅. 탑의 1층을 관리하는 관리자입니다. 보통은 이곳에서 가게를 운영하며, 시시콜콜한 일들에 대한 결정을 하고 있죠.”
시시콜콜한 일들이라…….
탑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상급 관리자가 저런 식으로 말을 하다니.
만약 저 입에서 중요한 일이라는 말이 나왔을 땐, 얼마나 무지막지한 파급력을 지닌 사건이 터질지 궁금하다.
“강진혁입니다.”
진혁 또한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께서는 관리자 중 하나를 찾으셨으니 당연히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 드려야 할 터. 허면, 어떤 걸 원하십니까? 원하신다면 무료로 최고급 양복을 맞춰 드릴 수도 있습니다.”
농담이겠지?
겨우 그런 걸 받으려고 여기까지 와서 입을 털어댄 게 아니다.
“장인이 만든 옷도 나쁘진 않지만. 이번엔 사양하죠. 대신, 초대장을 하나 더 받고 싶습니다.”
“초대장이라면…….”
“누군 파티에 가고 누군 남겨두면 안 되니까요.”
“이것 참. 꽤 무리한 걸 요구하시는군요.”
“무리한 걸 해냈으니 무리한 걸 요구드리는 겁니다. 아마, 관리자를 찾아낸 플레이어는 저 외에는 없을 텐데요?”
한 번을 지지 않았지만, 하스팅은 오히려 그런 맹랑함이 더욱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푸하하!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합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거야말로 당연한 권리니까요.”
호쾌한 광소가 터져 나왔다.
“아! 그리고 두 분의 옷은 굳이 치수를 재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알고 있거든요. 개인적인 서비스 차원에서 제가 어울리는 걸 준비해 드리죠.”
“감사합니다.”
“당신이 대단한 사람이란 건 확실히 알겠습니다. 허나, 조심하십시오.”
하스팅이 장난스럽게 한 마디 덧붙였다.
“지금 무도회장에 오는 플레이어 중에는 꽤나 흥미로운 분들이 몇몇 섞여 있습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과 동류의 느낌이 나는 그런 분들이 말이죠.”
***
하스팅과 헤어진 진혁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공터에서 시간을 보냈다.
자정이 되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약 2시간.
그때까지는 잠깐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거다.
“자. 여기! 옳지 잘한다. 다음은 이쪽이야.”
진혁이 고구마에게 마정석을 한 개씩 던져 줬다.
“모기!”
고구마가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진혁이 던져 준 마정석을 받아 먹었다.
오독. 오도독!
마치, 강아지가 뼈 간식을 먹는 것처럼.
고구마는 연신 입을 오물거렸다.
“그래. 많이 먹으렴. 우리 귀염둥이.”
진혁이 엄마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펫이 쑥쑥 성장하는 것만큼 보람된 일은 없다.
카라칼에게 받은 마정석을 모조리 먹인다고 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말이지.
아!
그러고 보니…….
한참이나 먹이를 먹이던 진혁이 무언가 생각났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7층에서 카라칼과 술자리를 갖고 복사한 고유 능력.
그걸 시험해 볼 기회가 바로 지금이었다.
‘공터가 워낙 넓은 데다 으슥하기까지 한 게 최고의 조건이긴 하네.’
다른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면 함부로 스킬을 사용할 수 없지만, 이렇게 인적이 드물다면 마음껏 연습할 수 있을 거다.
[고유 능력 ‘하얀 맹수’가 발동됩니다.]
[5분간 공격력과 공격 속도가 15%만큼 상승합니다.]
[보유하고 있는 무기에 ‘투명화’ 효과가 부여됩니다.]
[능력치의 숙련도에 따라 투명화의 정도가 달라집니다.]
황금색 양피지가 펼쳐지자, 카라칼이 사용했던 고유 능력이 발동되었다.
하얀 맹수.
말 그대로 공격력을 극대화하면서도 무기의 간격까지 감출 수 있는 능력이다.
진혁이 힐끗 손에 쥐고 있는 송곳니를 바라봤다.
‘아직 숙련도가 낮아 완전히 감추는 건 불가능하군.’
반투명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거다.
시야에 혼란을 줄 수 있을 정도였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어느 정도 싸움에 익숙한 놈들에 있어 이 정도는 크게 위협이 되질 못했으니까.
‘그래도 계속해서 숙련도를 올린다면, 나중엔 꽤나 쓸 만해지겠어.’
반투명한 것과 투명한 것은 아예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완벽하게 간격을 속일 수 있다면, 그것만큼 성가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처음 보는 상대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할 경우엔 더욱더 말이다.
좋아.
그럼 다음은…….
[Lv10 ‘빙하조형(氷河造形)’이 발동됩니다.]
하얀 눈송이들이 흩날리자, 검신이 조금 더 흐릿해졌다.
거기에 ‘불의 원소’를 통해 시야를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화르륵!
해가 떨어진 늦은 저녁.
텅 빈 공터에서. 눈꽃과 불꽃이 한 자리에 어우러졌다.
“후우우…….”
호흡을 가다듬은 진혁이 연속으로 고유 능력과 스킬들을 사용했다.
검을 쥔 손이 앞으로 뻗었다.
발이 부드럽게 무게 중심을 나눠 가졌다.
그렇게.
검의 무덤을 통해 스며든 재능과.
무혼검의 초식이.
예리한 단검을 통해 재현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무아지경 속에서 단검을 휘두르던 진혁이 마침내 움직임을 멈췄다.
“허억.허억.허억.”
말라붙은 폐가 격하게 산소를 갈구했다.
온몸에 있는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느낌이다.
1시간가량을 정신없이 움직였더니, 모든 체력이 바닥나 버렸다.
그러나, 힘들다는 것보다는…….
‘재밌다’는 흥분감에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새로운 스킬을 얻고 그 스킬 간의 연계를 연습하는 것이 미칠 듯이 즐겁게 다가왔다.
온몸을 흠뻑 적신 땀마저도 기껍게 다가올 정도였으니까.
‘이 맛에 훈련을 포기하지 못하겠단 말이지.’
그렇게 진혁이 호흡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의자에 앉아 있던 엘리스가 말문을 열었다.
계속해서 뚱한 표정으로 있어서 당이 떨어졌나 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뭐든 물어봐.”
“상급 관리자는 나도 한 명밖에 만나보지 못했어. 그것도 탑의 40층에서. 정말 우연찮게 만난 게 전부였다고.”
“상급 관리자가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놈들이 아니긴 하지.”
“뭐, 뭐야 그 반응은! 상급 관리자라니까!? 이집트 신격이랑 만나고 그래서 감이 잘 안 오는 모양인가 본데, 저 녀석이 바로 이 탑을 규칙을 만드는 놈들이란 말이야!”
엘리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꽤나 답답하고 황당했는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알고 있어.”
“뭐?”
“놈들이 얼마나 위험한 놈들이지, 우습게 봤다간 어떤 꼴을 당할 수 있는지. 전부 알고 있다고.”
진혁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결코 가볍게 대답한 건 아니었다.
마치, 모든 걸 경험해 본, 수없이 닳고 닳은 회귀자의 독백처럼.
그 말엔, 알 수 없는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넌 대체 어떻게 그렇게 많은 걸 알고 있는 거야? 심지어 놈들이 무관의 왕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잖아. 왕관의 존재는 가주들 중에서도 나와 엑센시온 그 망할 놈만 알고 있던 건데…….”
왕관은 탑의 정상을 보기 위한 히든 피스이며, 탑의 권력을 상징하는 최상위 등급의 성유물이다.
각각의 세력들이 모두 영토를 넓히기 위해 혈안이 된 것도. 최종적으로 저 왕관을 손에 넣어 군주의 자리에 오르기 위함이었고.
하지만 엘리스는 모를 것이다.
탑에 절대자를 상징하는 왕관들을 모두 모아.
50층에 오르고.
그 층의 마지막을 정복한 플레이어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나야.”
그걸로 충분하다.
더 이상의 설명 따윈 필요 없다.
진혁이 큼지막한 마정석을 하나 더 꺼내서 고구마에게 건네줬다.
와구와구!
“모기!”
게 눈 감추듯 마정석을 삼킨 고구마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핑크빛이 감도는 혀가 진혁의 손바닥을 부드럽게 핥았다.
“……하아. 하긴, 뭔 대답을 기대하고 물어본 건 아니었어. 그래. 네가 내 계약자고. 지금 함께하고 있으니 그거면 됐지.”
엘리스가 단념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더 이상 물어봐야 소용없을 테고, 진혁의 압도적인 강함과 터무니없는 정보들이 든든하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같은 편인 한, 이보다 강력한 계약자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
진혁과 엘리스의 앞에 각각 상태창이 하나씩 나타났다.
[하스팅으로부터 ‘주문된 완성된 정장’이 도착했습니다.]
기다리던 옷이 준비되었음을 알리는 문구.
“이제 슬슬 갈 시간인가.”
드디어 대망의 무도회에 갈 시간이 다가왔다.
어떤 놈들이 도착해 있을지.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기연들을 얼마나 뽑아낼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