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7대 길드의 유망주 (3)제목
‘하급 관리자라…….’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가네.
진혁이 힐끗 한쪽을 곁눈질했다.
소인족 관리자가 중화, 사무라이 길드와 함께 모여 있는 걸 보니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예상을 증명하듯.
저벅.
카만이 천천히 진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하하. 어떻게, 저희가 주최한 무도회는 충분히 즐기고 계십니까?”
카만이 생긋 웃었다.
이렇게만 보면 딱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꼬맹이 같다.
일각수(一角獸) 족답게, 반곱슬 머리카락 사이에 뾰족 튀어나온 뿔마저 앙증맞았으니까.
하지만, 잔인함이 서린 샛노란 눈동자는 순수함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었다.
“예. 덕분에 잘 놀고 있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로군요. 정말로 다행이에요.”
카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진혁은 알고 있었다.
저 말이 결코 본심이 아님을.
“헌데, 저희는 당신 덕분에 영 심기가 편치 않습니다. 듣자하니 제 손님 중 한 분의 일행을 걷지도 못할 만큼 반병신을 만들어 뒀다고 하더군요.”
“저런. 그 친구가 그렇게 심하게 다쳤나요? 나중에 꽃이라도 좀 보내야겠네요. 요즘 멕시코산 선인장이 그렇게 유행이라던데…….”
진혁이 호들갑을 떨며, 두 손을 모았다.
그 모습에, 카만의 눈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왜 두 사람이 당신을 그토록 목구멍에 박힌 가시처럼 여기는지 알겠습니다. 직접 마주해 보니 저 또한 이죽이는 그 면상에다 뿔을 처박아 버리고 싶군요.”
고작 인간 따위가 말장난이나 하는 걸 듣고 있으려니 부아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만약 장소가 이곳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 버렸을 것이다.
저릿! 저릿! 저릿!
따끔따끔한 마력이 진혁의 피부를 찔렀다.
과연…….
하급이라도 해도 관리자는 관리자라는 건가.
“발끈한 심정은 이해하는데, 명색이 관리자가 손님에게 협박이나 하는 건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내가 관리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거냐?”
“뭐, 그렇죠?”
“그런데도 이렇게 건방지게 행동한 거였고?”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하하하! 하아…… 진짜 어이가 없네. 대체 네놈이 누구에게 지껄이는 건지 알고나 있는 거냐?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너 따위쯤은……!”
카만의 말이 길어지려 하자, 진혁이 단칼에 상대의 말을 끊었다.
“하급 관리자 카만. 소소하게 공을 세워 기가 산 건 알겠는데, 고작 그런 걸로 기고만장해 하면 큰코다칠 거다.”
“너……! 내…… 내 이름은 어떻게?”
카만이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중화나 사무라이 쪽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는 진명을.
대체. 처음 만난 인간이 무슨 수로 알고 있단 말인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에 카만은 잠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겨우 이름을 아는 걸로 놀라면 어떡해?”
정말로 놀라려면.
정말로 당황하려면 적어도…….
“일각수 족의 성유물. ‘잃어버린 뿔’이 탑의 몇 층에 있는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정도는 돼야지.”
그래.
이 정도는 돼야 관리자가 오두방정을 떨게 만들 수 있으리라.
“이 빌어먹을 원숭이 놈이. 당장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실토해라!”
쿠쿠쿠쿠쿠쿠!
카만이 마력을 해방했다.
실내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쳤다.
주위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모조리 쳐다볼 만큼 분위기가 급속도로 흉흉해졌다.
“말해라! 우리 일족의 성물이 어디 있는지!”
잃어버린 뿔은, 일족의 힘을 상징하는 성물.
동시에 탑을 등반하다 실패한 패배의 상처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일족 전체가 등반을 포기한 채 하급 관리자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뿔을 찾는 걸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 정도로 ‘잃어버린 뿔’은 카만과 일각수 족에게 있어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군.’
진혁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제아무리 날고기는 관리자라고 해도 저마다의 약점 하나쯤은 갖고 있는 법.
이미 모든 걸 알고 경험한 진혁에게 있어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날 죽이려 하면 그쪽도 곤란해질 텐데?”
“변변찮은 세력 하나 없는 놈 하나 없어진다고 해서 큰일은 없을 터이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 생각이랑은 좀 다르네. 아무리 봐도 넌 감당하지 못할 상대를 적으로 돌리고 있는 중이거든.”
“푸하하! 내 뒤에 대체 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것 따윈 없다!”
카만의 자신감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림.
탑의 20층대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거대 세력.
설령, 이곳에서 플레이어 하나를 반쯤 죽여 놓는다고 한들. 자신과 무림의 비호가 있다면 얼마든지 상황을 무마시킬 수 있었다.
애초에 이번 가면무도회는 오롯이 탑의 중층부의 세력들이 개입하는 무대였으니까.
쿠쿠쿠쿠쿠!
마력 폭풍이 한층 더 거세졌다.
주위에서 지켜보는 플레이어들도.
그리고 연회장이 아닌, 2층에서 이 상황을 흥미롭게 관망하던 ‘거대 세력’들도.
모두가 이번 일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기대했다.
“상황이 골치 아프게 됐네. 넌 진짜 앞뒤 재는 게 없는 거야?”
엘리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툴툴대긴 하지만, 손바닥에선 붉은 빛이 도는 혈액이 소용돌이 쳤다.
만약 싸움이 일어날 경우 함께 싸워 주겠다는 뜻이겠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유를 묻지 않고 한 편이 되어주는 존재.
확실히 같은 편이 있다는 건 마음이 든든해지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니다.
이번엔 싸울 필요는 없다.
처음부터.
관리자의 개입을 포함해 상대 쪽에서 시비를 걸어올 거라고 예측했기에 그걸 대비한 카드를 준비해 뒀다.
바로 그때.
“이게 무슨 난장판이죠?”
2층 계단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이곳에 오기 전.
진혁은 옷가게에 한 가지 컴플레인을 걸었다.
완성된 제품에 하자가 있다는.
[수트 상의에 있는 단추 하나가 떨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빠른 수선 부탁드려요. 무시할 경우 시련의 탑 커뮤니티에 장문의 리뷰를 올리겠습니다. 물론, 별점 1점은 서비스로 드릴 예정이고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품의 하자는 없었다.
그저 일부러 하자를 만들었던 것뿐이지.
그러나 귀여운 협박으로 인해 제품을 만든 당사자는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다.
뭐, 정확히 말하면 이런 일을 계획한 진혁이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에 대해 호기심을 느낀 거에 가깝겠지만.
“묻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다 무슨 난장판인 거죠?”
계단을 따라 고블린 하나가 내려왔다.
한 걸음씩 천천히.
하지만, 단순히 걸어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실내에 있는 공기가 급변했다.
카만이 해방했던 마력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대신 이질적인 마력이 실내를 장악했다.
지켜보던 모두가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곳에 온 건 관리자란 계급의 최상위에 위치한 존재.
바로 상급 관리자 하스팅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옆에는 보좌관을 자청하듯 중급 관리자인 릭이 함께하고 있었다.
[상급 관리자가 현현했습니다!]
[시스템에 일정 부분 제약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들은 물론, 탑에 있는 거물급 앞에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내부든 또다시 소란스러워졌다.
특히 2층에 있는 거주자들 사이의 동요가 거셌다.
무림 쪽에서 여러 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 상급 관리자가 오다니.”
“세상에나……. 나도 처음 봤어.”
“의외로 평범하군. 나는 당연히 몇 십 미터가 넘는 괴물들일 줄 알았는데.”
“멍청하긴. 단순히 외모로만 판단하지 마. 차라리 저렇게 평범한 게 더 두려우니까.”
실제로 대부분은 시스템의 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하스팅이 상급 관리자 중 하나라는 걸 깨달았다.
“허…… 헉?”
카만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덜덜덜덜!
자신도 모르게 팔과 다리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중급 관리자만 해도, 이런 밑바닥에서 보기 힘든 존재일진데.
상대는 그런 중급 관리자들을 말 한 마디로 없애 버릴 수도 있는 상급 관리자다.
고고한 탑의 규칙을 세우는 절대자들.
감히, 말단에 불과한 자신이 쳐다도 보기 힘든 위치에 있는…… ‘하늘’이다.
“카만 씨.”
“예? 예! 상급 관리자님.”
카만이 하도 놀라 혓바닥을 깨물 뻔했다.
아니, 사실 혓바닥을 조금 깨물어 버리고 말았다.
입술을 따라 피가 배어나왔으나, 그딴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지금 당장 세계가 멸망한다고 하더라도. 상대의 질문에 대답하는 게 더욱 중요했으니까.
“어째서 제가 초대한 손님에게 함부로 대하고 있었는지. 그에 대한 해명을 좀 해 주시죠.”
“사, 상급 관리자님이 초대하신 손님……이라면? 설마?”
카만이 옆을 바라봤다.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진혁이 보였다.
“저 인간이 관리자님의…… 초, 초대를……?”
“제대로 들었네. 강진혁 플레이어는 이번 무도회에 상급 관리자님께서 직접 초대장을 줬지.”
릭이 한 마디 거들었다.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됐다.
어째서 저 인간이 이토록 당당하게 나올 수 있었는지를.
‘대, 대체…… 이게 현실이란 말인가.’
아래 계급의 관리자들은 정보의 접근이 철저하게 제한된 덕에 진혁과 하스팅의 만남을 알 수 없었고.
카만 역시 중화 길드의 포섭에 주력해 온 탓에 진혁이 어느 선까지 닿아 있을 수 있는지를 간과했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들이 모여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후회해 봐야 이미 늦었다.
이제는 상대의 선처를 구하는 것만이 영멸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제, 제가 그런…… 걸 미처 모르고…….”
“모른다고 하면 모든 게 해결되나?”
“아닙……니다.”
카만이 어금니를 부러져라 깨물었다.
“우리는 언제나 공정함을 유지해야 하는 관리자들이네. 하지만 몇몇 이들은 뒤에서 세력들로부터 뇌물과 각종 혜택을 받고 그들의 편의를 봐주고 있지.”
하스팅이 혀를 찼다.
“물론, 자네만 책망하려는 건 아닐세. 그런 자들이 한둘도 아니고. 자네한테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건 어폐가 있겠지. 게다가 일정 선을 넘지 않는다면 나도 어느 정도는 묵과해 줄 순 있고 말이야.”
하스팅이 말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허나 이번 경우는 예외야. 관리자의 초대를 받아 온 손님들에게 관리자가 해를 끼친다면. 그 누가 앞으로 우리의 초대에 응하겠나?”
“모두 맞는 말씀입니다.”
“반성했다니 다행이로군. 그러면 이제 사과를 하게.”
“예?”
“잘못을 했으면 당연히 당사자에게 사과를 해야 하지 않겠나? 아니면, 설마 내 말을 겉으로만 공감한 척하는 건 아니겠지?”
“무, 물론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고개를 조아린 카만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앞엔 팔짱을 낀 채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진혁이 있었다.
“옳지. 옳지. 자 어디 사과 한번 맛깔나게 해 보세요.”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에게 용서를 구하는 관리자라니.
이 치욕은 앞으로 탑의 존재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거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에서 멈춰 줄 진혁이 아니었다.
암. 어림도 없지.
[지금부터 영상 녹화가 진행됩니다.]
일명 박제.
이곳뿐 아니라 탑 내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친절하게 도와줄 생각이다.
녹화 기능이 실현된 건 관리자도 알 수 있었기에, 카만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욱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여기서 싫다고 했다간 그대로 상급 관리자의 분노를 사게 될 텐데.
“안 들려요.”
“죄송합니다.”
“밥을 굶으셨나? 좀 더 크게!”
“죄송합니다!”
“옳지! 조금만 더 크게! 배에 힘 딱 주고!”
“죄송합니다아아!”
거의 통곡에 가까운 절규가 울려 퍼지고 나서야…….
카만은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관리자를 완전히 가지고 놀 줄이야.”
“저 남자도 제법이군. 과연, 모두가 주목할 만해.”
“하지만, 무림 쪽이랑 관계가 좋지 못하다고 하니까.”
“함부로 접근했다간 무림하고도 척을 질 각오를 해야겠군.”
여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반응은 대부분 공통적이었다.
진혁을 포섭하려면, 20층의 거대 세력 중 하나인 무림과의 사이가 틀어질 수밖에 없다고.
그렇기에.
‘역시…… 저 남자는 반드시 우리가 잡아야 한다.’
무림과 양대 산맥을 이루는 중층의 또 다른 세력.
‘제국’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