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혼자 만렙 뉴비-162화 (163/653)

162화. 귀혈대주, ‘염호(炎虎)’ (1)

고인물 코퍼레이션에 인턴 제안을 한 후.

두 사람에게 ‘염혼의 낙인’까지 새기자, 모든 과정이 끝났다.

당연한 말이지만, 케이시와 주드로 두 녀석 모두 낙인이 찍히는 걸 꽤나 즐겼다.

지켜보는 입장에선 소름이 돋는다고 해야 하나?

금발에 푸른 눈동자 그리고 새하얀 피부…….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쌍둥이 남매가 이러니까 더 무서운 것 같다.

‘그래도 적당히 써먹을 수 있는 카드가 들어왔으니 나쁘진 않아.’

당장 이번 미궁에서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필요할 때마다 불러올 수 있는 조력자로. 두 사람은 꽤나 쓸모가 있었다.

무엇보다 복사 조건을 충족시킨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고유능력 ‘만상공유(萬祥共有)’를 복사하셨습니다.]

[만상공유]

입수 난이도: A

내용: 공유하려는 상대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서로의 고유 능력과 스킬은 물론, 기억과 감정까지 공유할 수 있게 됩니다.

이해도에 따라 공유할 수 있는 영역이 달라지는 고유 능력.

‘조건이 추상적이긴 하지만, 그거야 시련의 탑이 워낙에 망겜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게다가 이미 온갖 능력과 상성을 경험해 본 진혁으로선 이 정도 난관은 별 다른 문제가 되질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카―앙! 캉!

“끄아아악!”

“아아악!”

저 멀리서 쇳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투가 시작된 듯 온갖 종류의 마력이 길길이 날뛰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중에선…….

‘호오.’

꽤나 익숙한 종류의 마력 또한 섞여 있었다.

“가자.”

진혁이 ‘송곳니’를 꺼내들었다.

“오오! 싸우는 거야?”

“재밌겠다!”

케이시와 주드로도 두 눈을 반짝이며, 아공간 인벤토리를 개방했다.

우우웅!

거기서 나타난 건 두 남매의 키를 훌쩍 넘는 헬버드였다.

최소한 50kg은 족히 나가 보이는 육중함.

과연, 한 눈에 봐도 살벌해 보이는 무기다.

품위나 멋 같은 건 배제하고 오롯이 실용성만 추구하겠다는 건가.

작은 체구로부터 나오는 날렵함과 대조적으로 파괴력을 추구하는 무기의 조합은 의외로 잘 맞아떨어질지도 모르겠다.

‘적으로 만나면 성가시겠지만, 아군일 땐 든든하네.’

적어도 저 날붙이가 이쪽으로 향할 일은 없을 테니까.

“아. 오빠.”

“응?”

“지금 싸우려는 애들이 나쁜 애들이야 아니면 착한 애들이야?”

케이시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긴, 나쁜 놈들이면 죽여도 된다고 했었지. 반면, 착한 사람일 경우 함부로 손을 대선 안 된다는 제약을 걸어 뒀다.

제멋대로 날뛰는 녀석들을 제동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로.

진혁이 저 먼 곳을 바라봤다.

이건 틀림없이…….

“나쁜 놈들이야.”

무림 특유의 내공이 느껴진다.

***

모두 검은색으로 통일된 상하의와 그 위로 그려진 붉은색 귀(鬼)라는 문자.

약 마흔 명의 남자들이 검을 뽑은 채 완벽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 안에 갇혀 있는 건 세 명의 남녀.

엘리스와 천유성 그리고 테레사였다.

“헉…… 헉. 후우우…….”

“하아. 하아. 하아.”

천유성과 테레사는 최전선에서 거친 숨을 고르는 중이었고.

“…….”

엘리스는 가장 뒤에 홀로 서서 상황을 관망하는 중이었다.

제대로 된 상황에서 싸웠다면, 이런 놈들 쯤이야 일수에 먼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진혁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탓에 간신히 몸을 유지할 수 있는 마력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푸하하! 이건 진짜 가관이로구나.”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혈귀대주 염호가 광소를 터뜨렸다.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으랴?

마교의 정예 중 일축을 담당하는 혈귀대가.

그것도 무려 마흔에 가까운 수를 대동하고 왔는데도 쉽사리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귀혈대 중 세 명이 천유성의 검에 목숨을 잃었으나, 염호는 오히려 벅차오르는 감정에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과연, 검성이라 불릴 만한 인재로군. 그리고 색목인 여자도 만만치 않아.”

천유성과 테레사가 보여 주는 무용은 플레이어라 보기 힘들 정도로 굉장했다.

추혼검의 4식이 시연됐을 땐, 심지어 자신조차 놀랄 정도였으니까.

‘점점 더 탐이 난다.’

모용수에겐 죽이겠다고 했으나, 천유성을 보면 볼수록 다른 생각이 솟구쳤다.

이대로 죽이기엔 너무나 아깝다.

그래.

만약, 저런 패도적인 사내가 마교의 마공까지 익힌다면…….

그 효과가 얼마나 굉장할지 벌써부터 눈에 훤히 보였으니까.

“슬슬 끝내라. 아. 저 녀석은 죽이지 말고.”

“존명!”

염호의 명령에 귀혈대가 움직였다.

스스슥!

지면을 스치는 가벼운 발놀림.

자로 잰 듯 움직이는 합격진은 이들이 얼마나 지독한 훈련을 받아 왔는지를 보여 줬다.

“후우…….”

천유성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계속된 전투로 인해 체력과 마력이 모두 바닥이 드러난 상황.

전투는커녕 당장 서 있는 것조차 기적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칼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검은 여전히 앞으로 뻗어 있었다.

“여전히 싸울 생각인 건가? 집념만큼은 인정하는 바이나 이미 너희들에게 승산은 없다.”

귀혈대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천유성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허나, 여기서 꺾일 순 없다.

이렇게 허무하게 쓰러질 거면 이곳까지 아득바득 기어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놈이라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다.’

언제나 태산처럼 가로막은 목표.

손에 잡힐 듯 다가가면 훌쩍 떠나가 버리는 최강의 라이벌.

그놈이라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라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거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게 그 썩어 버린 고인물의 특기였으니까.

파츠츠츠……!

검신을 타고 타오르는 푸른 불길이 솟구쳤다.

‘그 괴물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서…….’

유형화된 기가 상처투성이의 몸을 지탱했다.

‘그리고 언젠간 그 괴물을 뛰어 넘기 위해서……!’

[고유 능력 ‘검의 노래’가 발동됩니다!]

[‘추혼검’이 주인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검을 쥐었는지 모른다.

그저 셀 수 없이 반복했던, 자신이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검의 귀결을 반복할 뿐.

[‘검신일체(劍身一體)’ 발동됩니다!]

바로 그 순간.

공기가 급변했다. 기를 버티지 못한 땅에 잔금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

눈이 시릴 정도의 푸른빛이 검과 몸에 깃들었다.

이것이 검신일체.

검과 하나가 된 자만이 이끌어 낼 수 있는 경지다.

“큭!”

“이건……!?”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귀혈대도 이번만큼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런 기운을 지닌 자가 탑 밖에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쾅!

지면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천유성의 신형이 사라졌다.

“왼쪽이다!”

다급히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콰콰콰콰콰!

“끄아아악!”

“제기랄!”

한 차례 검풍이 휩쓸고 지나가자, 피분수가 뿜어졌다.

눈으로 식별하기도 힘든 속도와 그 속도를 최고의 장점으로 바꾸는 검격.

그렇기에, 천유성 앞에 서는 것은 그야말로 태풍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하는 각오가 필요했다.

“당황하지 말고 진을 유지해라!”

카카캉!

카아앙!

검과 검이 격돌하며,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강하다.

그저 압도적으로.

거기에 테레사까지 가세하자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었다.

“지원하겠습니다!”

우우우웅!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빛 ‘별의 가호’와 ‘전투의 노래’가 천유성의 몸을 보호했다.

테레사 역시 한계에 이른 터라 많은 걸 해 줄 순 없지만, 귀혈대 입장에선 이런 작은 도움마저도 너무나 버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종횡무진 움직이던 천유성의 검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멈췄다.

2m에 이르는 창이 가로막은 것이다.

“정말로 괴물이군.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엄청난 물건일세. 그 몸을 해갖고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

카가가각!

기와 기가 서로를 갉아먹었다.

물론, 어느 쪽이 우위인지는 누가 봐도 뻔했다.

“귀혈대주 염호라고 한다. 무림의 선배로서 세 수를 양보해 주지.”

“난 무림인이 아니다. 그런 시답잖은 법도는 너희끼리나 찾아라.”

“흐음. 까칠하구만. 하지만 너도 곧 무림에 발을 담그게 될 거야. 내가 널 찍었거든.”

염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웃기는군.”

“왜? 아니라고 생각하나?”

“죽으면 죽었지. 네놈들 따위랑은 함께할 생각은 없다.”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열망. 그것이야말로 가장 마교다운 본능이거늘……. 아직까지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넌 우리와 뿌리가 같아.”

낮게 가라앉은, 하지만,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염호가 예언했다.

“언젠가 반드시 너는 우리에게 올 거다.”

미래는 정해져 있다고.

“…….”

천유성이 신경질적으로 창을 튕겨냈다.

그리고 순식간에 새로운 공간을 장악하며 틈을 만들었다.

“호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건가.”

염호 역시 부드럽게 창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휘둘렀다.

카아앙!

이번에도 공격이 막혔다.

여유가 느껴지는 염호와는 달리 천유성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두세 합.

그게 한계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천유성은 무리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방어를 모두 포기한 채 휘두른 일격. 아니, 이건 공격이라기 보단 차라리 동귀어진에 가까웠다.

전신을 고스란히 드러낸 데다 동작 또한 지나치게 컸으니까.

물론. 그런 공격에 당해 줄 염호가 아니었다.

피식!

“역시 그렇게 나오는군.”

도박 수에 가까운 일격에 맞설 필요는 없다.

염호는 공격을 받기보단 거리를 크게 벌리는 것으로 방어를 대신했다.

체력이 떨어진 천유성으로서는 최악의 대응이었다.

부우웅!

부웅!

허공을 가르는 검의 속도가 급속도로 떨어졌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이젠…… 더 이상 손끝 하나 움직일 힘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챙그랑.

손끝에서 떨어진 검이 바닥에 뒹굴었다.

“빌어……먹을.”

“그래도 나름대로 애쓴 거다. 날 상대로 합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무림에서도 그리 많지 않으니까.”

염호가 창을 회수했다.

천유성도 테레사도 전투가 불가능하게 됐으니, 이제 남은 건 은발의 소녀 차례.

‘동료가 당하는 동안 가만히 있다는 건 전투에는 그다지 자신이 없다는 뜻이겠지.’

닭 모가지 비트는 수고만 더한다면 모든 일이 마무리될 것이다.

“얌전히 있는다면 고통 없이 보내 줄 것을 약속하마.”

창끝이 엘리스의 목으로 향했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엘리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보다는 오히려 너희가 큰일 났지.”

“우리가 큰일 났다고?”

“응. 이제 잠시 뒤에 모조리 죽어 나갈 거거든. 충고하건대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도망쳐. 아직까지 몇 초 정도는 남아 있으니까.”

“크하하하! 네가 나를 말이냐?”

염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뒤틀렸다. 재밌어서 도저히 못 참겠다는 것처럼.

“아니, 나는 피를 좀 빨아야 힘이 날 것 같고. 대신 다른 애가 와 줄 거야.”

“설마, 그 강진혁인지 뭔지 하는 놈을 기다리고 있는 거냐? 그렇다면 헛된 희망을 품고 있는 거다. 그 녀석에 관해서라면 나도 들었지만, 여기 있는 놈과 마찬가지로 내 옷깃 하나 스치지 못할 테니까.”

“글쎄. 내가 봤을 땐…….”

엘리스가 염호와 귀혈대의 면면을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마치, 잠재력의 밑바닥까지 모조리 꿰뚫어 보는 눈빛이다.

“너희 수준으론 어림도 없어.”

그 말을 끝으로.

휘이이잉!

한 줄기 바람이 일어났다.

“뭐, 뭐냐 이건?”

염호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분명, 전신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건만.

누군가 접근하는 걸 인지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치이이익!

지면 위로 연기가 솟구쳤다.

‘검마제왕보’를 극한까지 사용했을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직까지도 지면에 남은 불꽃은 대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속도로 질주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네놈은…….”

염호가 두 눈을 부릅떴다.

모용수가 그토록 조심하라고 일렀던 최우선 타겟.

눈앞에 나타난 건 바로 진혁이었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너희 다 죽었다고.”

엘리스의 입술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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