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3대 절망 (1)
“고맙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모용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하긴, 이해하기 힘들 거다.
지금까지의 절망을 모두 뒤엎을 정도로 막대한 행운을 거머쥐게 된 것도 녀석이었고.
게이트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 것도 녀석이었으니까.
모든 상황이 계획한 대로 흘러갔음에도 이쪽이 여유를 잃지 않고 있으니 당연히 찜찜할 수밖에.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미궁에서의 일도 거의 다 마무리됐으니, 마지막만큼은 친절하게 설명해 줄 생각이다.
물론, 긴 버전으로 말고 짧은 버전으로.
“힌트를 하나 주자면, 이 미궁의 테마에 대해 떠올려 봐.”
“미궁의… 테마라고……?”
모용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진혁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선왕들의 계곡을 지키는 수호자들.
도굴꾼을 벌하는 각종 함정들…….
그렇다.
이 미궁은 그 모든 것들로부터 고고한 왕들의 안식을 지키는 것.
“설마!”
“뿔나팔의 4번째는 행운을 가지고 오는 게 아니야.”
오히려 3번의 절망으로부터 살아남은 질긴 침입자들을 철저하게 응징하기 위한 것에 가깝지.
어디에 처박혀 있던 고문에서 이곳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건진 모르겠는데.
그건 전부 잘못된 정보다.
“이곳엔 도굴꾼을 위한 황금 따윈 없어.”
그 말을 끝으로…….
……공기가 급변했다.
[4번째 행운(절망), 인과응보(因果應報)]
이곳의 안식을 방해한자.
그 대가는 그들이 속한 곳의 피로 씻어내게 되리라.
4번째는 바로 뿔나팔을 부는 자의 고향으로 지금까지의 절망이 모두 강제 이동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무덤을 침입한 이에게 내리는 마지막 형벌이다.
“문헌으로만 봤으니까 잘 모르겠지. 시련의 탑의 문헌은 은근히 조작된 것도 많거든. 특히나 이런 식으로 보호를 목적으로 한 미궁이라면 더욱더 말이야.”
“네놈……은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는 것이냐?”
어떻게 알고 있긴.
그 모든 걸 직접 경험해 봤기 때문에 알고 있지.
과거에는 플레이어들이 전부 접은 상태라 크게 상관은 없었다.
게다가 3대 절망은 일주일 뒤엔 원래 있던 곳으로 역소환되기 때문에, 그 이후에 플레이하는 데 있어서도 큰 문제는 없었고.
물론.
그 모든 건 과거 게임에서의 이야기다.
[게이트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중국 베이징에 아웃브레이크가 일어났습니다.]
[3대 재앙이 현현합니다!]
[중화 길드에 구성된 플레이어들에게 ‘표식’이 새겨집니다.]
[‘표식’이 남겨진 대상은 3대 재앙의 목표물이 되며, 중화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 중 50% 이상이 사망할 경우 중국 전체가 목표물이 됩니다.]
붉은색 상태창이 연거푸 나타났다.
“이, 이건…….”
랴오위가 두 눈을 부릅떴다.
싸우겠다는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괴물들이 중화 길드에 나타난다니.
그야 말로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당황스러운 건 모용수도 마찬가지였다.
절망을 부르는 뿔나팔에 관해선 문헌을 통해 전부 알아 뒀다고 생각했거늘.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기존에 알고 있던 정보와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머릿속이 터질 듯 복잡해졌다.
“보아하니 대충 어디에 적혀 있는 걸 주워 봤나 본데, 시련의 탑에 있는 정보들은 잘못 적혀 있는 게 꽤나 많거든.”
망겜 중의 망겜.
그렇기에, 시련의 탑에 있는 정보들 중 뒤통수를 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무, 무림맹의 서고에 있던 문헌이 거짓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감히, 그 혓바닥으로 무슨 망언을 내뱉은 건지 알기는 하는 거냔 말이다!”
모용수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이야. 발끈하는 게 거의 갓 잡은 활어 수준이네.
여기서 모용세가가 오대세가 중에 가장 약하다고 말했다간 고혈압으로 쓰러지겠지?
“무림맹의 정보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왈가왈부하는 건 내 알 바 아니고. 그보다 지금 급한 건 3대 절망을 어떻게 막느냐는 것일 텐데?”
당장이야 표식이 찍힌 중화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타겟이겠지만.
전체 길드의 50% 이상이 사망할 경우 목표물은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확대되게 되어 있었다.
이제는 단순히 길드의 이미지니 뭐니를 따질 게 아니라. 중국 전체의 운명을 두고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저런 놈들을 상대로 대체 무슨 수로 중국을 보호한단 거냐?”
모용수는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선을 그었다.
역시.
예상은 했지만, 이런 식의 대답인 건가.
도마뱀이 필요 없는 꼬리를 잘라 버리듯, 일고의 고민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도 같은 생각이냐?”
진혁의 시선이 랴오위에게 향했다.
모용수야 무림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니 나 몰라라 해도 상관없을 테지만. 랴오위는 자신의 안방이 쑥대밭으로 변하게 생긴 상황.
길드를 지키려면 저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잠시 고민하던 랴오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표식이 찍혔다는 건…… 나 또한 게이트를 통해 넘어갈 경우 목표가 된다는 뜻이겠지?”
“그래. 너도 놈들에겐 맛있는 먹잇감으로 보일 거다.”
“그렇다면, 나 역시 가지 않겠다.”
“동료들을 버리겠다는 거냐? 이렇게 쉽게?”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아니, 너라면 이해할 텐데. 강하고 쓸모 있는 자만이 탑을 오를 수 있다는 걸. 나 역시 남궁천 님으로부터 같은 걸 배웠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손절해 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
하긴, 놈들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평화롭게 살고 있는 엘프들의 마을을 습격하는 것마저 당연하게 생각했으니까.
실제로도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게 현실적인 건지도 모른다.
이미 남궁천을 비롯한 중화 길드의 수뇌부들은 중국이 아닌 무림의 일부로 흡수되는 과정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더 넓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세계가 있는데, 시궁창 같은 현실을 지키려다 모든 걸 잃어버릴 수 있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싶진 않은 거겠지.
아는데.
이해는 하는데.
그걸 태연하게 내뱉는 모습이…….
……너무나도 역겹게 느껴졌다.
“역시, 너희랑은 영원히 친해지기 힘들 것 같아.”
쓰레기들도 급이 있다곤 하지만, 이 정도면 음식물 쓰레기 수준이다.
아니, 이쯤 되면 음식물 쓰레기의 입장도 들어봐야 할 것 같다.
“위선자처럼 굴지 마라. 어차피 방관하는 건 너나 우리나 마찬가지 아닌가?”
랴오위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난 너희와는 달라. 적어도 내 사람을 버리진 않거든.”
진혁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담담한 모습에, 이번엔 모용수가 되물었다.
“설마, 게이트로 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꼬리를 만 강아지들이 그런 것까지 알 필요는 없잖아? 너희들이야 이제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중층부의 패권 다툼에만 집중할 테니.”
그러니 부탁인데 이만 꺼져라.
그렇지 않아도 경종이 만든 게이트는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니까.
가뜩이나 촉박한 데다 바퀴벌레처럼 도망 다닐 수 있는 놈들을 상대로 뒤통수를 치거나 하진 않을 테니 안심하고.
“헛된 영웅심이라는 건가. 재밌군.”
모용수가 마지막으로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우리는 이대로 무림으로 돌아간다. 중화 길드를 벌써 버리게 되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없지. 길드의 주력들은 이미 다 빼 놨겠지?”
“예. 말씀하셨던 대로 이곳에 오기 전에 전부 ‘연무장’으로 보내 뒀습니다. 헌데, 저들을 저대로 냅두실 겁니까?”
“어차피 저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뿔나팔의 효과에 대해 잘못 알았다는 건 인정하는 바다.
허나, 그 3대 절망의 강함까지 잘못된 건 아니었다.
직접 맞서 싸워 봤기에, 모용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낭중지추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결코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무슨 꿍꿍이로 중국을 돕겠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덕분에 큰 골칫거리 하나를 손 안 대고 없앨 수 있게 되었구나.’
그거면 충분하다.
더 이상 길게 대화를 나눌 필요도, 서로의 의중을 떠볼 이유도 없었다.
잠시 뒤에 게이트 너머로 가는 놈들은 전부 싸늘한 시체가 돼 버릴 테니까.
그렇게 모용수와 랴오위가 무덤에서 사라졌다.
***
[게이트의 지속 시간: 0h:1m:13s]
상태창이 더욱 빠르게 점멸했다.
게이트가 흔들리는 걸 보니 이제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말로 그놈들하고 싸울 거야? 득보다 실이 많을 텐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엘리스가 한 마디 거들었다.
그 누가 봐도 무모해 보이는 싸움이었으니 당연히 이해가 안 될 수밖에.
물론.
불쌍한 민간인들을 도와주겠다는 거창한 이유는 아니다.
중화 길드를 구해야 한다는 이유는 더더욱 아니고.
‘잘 녹화됐겠지.’
진혁이 힐끗 ‘방송 시스템’의 녹화 기능을 살폈다.
본래, 가면무도회 중엔 방송을 켜거나 녹화를 할 수 없었지만, 무림에서 시스템에 무리하게 개입해 준 덕분에 틈이 생겼다.
일종의 버그라고 해야 할까?
때문에 멍청한 놈들이 마음껏 날뛰면서 자기 무덤을 열심히 판 꼴이 되었다.
지금 이 대화들이 공개된다면,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이들이 중화 길드를 어떻게 바라볼지…….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게다가 이렇게 함으로써 생기는 이점은 단순히 중화와 무림을 엿 먹일 수 있다는 것뿐이 아니다.
3대 절망을 사냥할 수 있다면, 놈들이 주는 막대한 경험치와 아이템까지 모조리 독식할 수 있었다.
‘인지도와 레벨업이라는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길이지. 아,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력들도 아주 환장을 할 테니, 공적치도 전부 나한테만 쏠리겠어.’
무대가 이 정도로 갖춰졌으면 안 가려야 안 갈 수가 없다.
진혁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지금부터 게이트로 들어갈 인원을 뽑을 시간이다.
“중국 쪽에서 한 자리를 가져갔으니, 남은 건 두 자리야. 당연히 그중에서 하나는 내 거고.”
남은 건 한 자리뿐.
진혁이 두 눈을 반짝였다.
열화와 같은 지원자를 기대하면서.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쯧쯧.”
천유성이 바랄 걸 바라라는 듯 혀를 찼고.
“흐응 흥.”
엘리스는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
심지어 테레사조차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니, 다른 놈들은 몰라도 인간적으로 성녀는 자발적으로 좀 나서 줘야 되는 것 아니냐?
그래도 명색이 암스테르담의 아웃브레이크를 막은 유럽의 영웅인데?
잠깐, 그러고 보니…….
설마.
짙은 위화감을 느낀 진혁이 멈칫했다.
‘이상하다.’
본래 테레사라면 이타주의의 끝을 보인 인물.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고 한들.
그리고 그 대상이 방금 전까지 싸웠던 적이었다고 한들.
그녀가 보이는 동정심은 한결 같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럴 때 침묵한다고?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 갔지만, 정확한 증거를 잡으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Lv9 ‘탐식의 눈’이 대상을 간파합니다!]
진혁이 재빨리 두 눈에 마력을 끌어 모았다.
그러자 그 순간.
모든 의문이 한 방에 해소되었다.
‘호오.’
진혁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간다.
예상치 못한, 꽤나 재밌는 변수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