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고대종(古代種) (1)
완벽하게 봉쇄된 퇴로.
“끝이야…….”
“제, 젠장.”
“다 틀렸어. 이젠 다 틀렸다고!”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신들린 듯한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해 왔지만, 그것도 여기서 끝이다.
앞과 뒤에서 동시에 노린다면 제 아무리 날고기는 랭커라 할지라도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그 말을 증명하듯.
검은색 구체와 식인식물이 동시에 진혁을 노렸다.
인지를 초월한 가시가 진혁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고.
수십 개의 넝쿨들 또한 진혁의 전신을 통째로 으깨 버리기 위해 낙하했다.
바로 그때.
진혁이 요리조리 도망 다니며 준비해 둔 히든카드가 발동되었다.
[Lv9 ‘불의 원소’가 발동됩니다!]
[고유 능력 ‘별의 가호’가 발동됩니다!]
가로등 위에 남겨 둔 불꽃들에 별의 기운이 스며들자 거대한 화염이 일어났다.
콰콰콰콰콰!
콰아아앙!
수십 톤의 화약이 폭발한 것처럼 주위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뿌연 연기가 시야를 가리게 된 건 필연적인 결과였다.
거기에 별의 가호로 인해 ‘진동 감지’에도 혼란을 줄 수 있게 됐으니, 서프라이즈로선 완벽하게 조건을 갖춘 셈이 되었다.
‘지금……!’
바로 그 틈을 노려, 진혁이 움직였다.
‘절망들끼리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 건, 특유의 생체 신호를 인식하기 때문이지.’
압도적인 힘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생체 신호를 보내는 곳만 알아낼 경우 놈들의 체계를 역이용할 수 있다.’
진혁이 연기 속에서도 정확하게 식물을 향해 몸을 날렸다.
‘별의 가호’로 인해 진동 감지에 혼선을 준 덕에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안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키에에에?”
갈팡질팡하는 넝쿨들 사이로 연약한 내피가 보였다.
얼핏 보기엔 다 똑같아 보이는 초록빛 내피다.
그러나 진혁의 입꼬리는 위로 올라가 있었다.
‘역시, 이번에도 7번째 봉우리 속에 숨겨 뒀군.’
단순히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 마력의 흐름이 미묘하게 다른 곳을 찾아내는 게 포인트다.
그리고 2번째 절망의 습성 상 그 위치는 언제나 가장 안쪽에 있었다.
아마 본능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을 숨기고 싶다. 뭐 이런 뜻이겠지.
진혁이 재빨리 표피 한 곳을 뜯어냈다.
그러자.
“케에에엑!”
갑자기 식물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생체 신호를 관장하는 부분이 파괴당했기에, 갑자기 패닉에 빠져 버린 탓이다.
수십 개의 넝쿨들이 앞에 있는 게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콰아아앙!
직격을 맞은 빌딩이 일격에 반파되었다.
다시 봐도 무식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위력이다.
하지만, 정작 노린 건…….
놈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반응하는 구체다.
마구잡이로 휘둘러진 넝쿨 하나가 구체의 표면을 강타한 순간.
꿈틀하고.
구체의 표면이 일그러졌다.
[세 번째 절망 ‘심연의 구체’가 고유 능력 ‘침식의 가시’를 사용합니다!]
구체로부터 형언할 수 없는 마력이 일어났다.
푸욱―!
깔끔한 관통음이 먼저 고막을 두드렸다.
곧이어 전신에 바람구멍이 난 식물의 몸에서 녹색 체액이 뿜어져 나왔다.
찰나에, 구체에서 뻗어 나온 수십 가시들이 식물의 전신을 난도질해 버린 것이다.
“키……이……이이.”
덩치가 크다는 점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단점으로 변질되었다.
과녁은 크면 클수록 노리기도 쉬웠으니까.
쿠웅!
거대한 식물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번째 절망이 소멸되었습니다.]
***
‘이걸로 두 마리…….’
진혁의 만족스러운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절망은 같은 절망으로 제압하는 게 제일이다.
물론, 식물 쪽에서 구체를 처리해 주는 게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었지만, 둘 사이의 수준 차이를 고려한다면 그건 욕심이다.
‘그나저나 역시 레벨은 오르지 않는군.’
간접적인 개입도 경험치로 인정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나, 절망급 몬스터들에게만큼은 예외였다.
직접 관여가 아닌 한 경험치나 아이템을 얻을 순 없다고 봐야 하리라.
‘전부 다 먹을 순 없는 건 확실히 아쉽긴 하네.’
허나, 마지막 구체 녀석만 처리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얻는 보상들 중에 가장 좋은 걸 얻게 될 수 있을 거다.
[3대 재앙을 모두 처리할 경우 그 대상의 고유 능력과 관련된 최상위 랭크의 보상을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관련된’이라는 형용사의 범주가 워낙 애매한 탓에 정확히 어느 보상인지에 대해선 짐작하기 힘들었으나.
확실한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낸 것에 걸맞은 보상을 준다는 거다.
예전에는 오버랭크급의 융합 재료를 줬었는데, 이번에는 과연 어떤 걸 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헉!?”
진혁이 반사적으로 송곳니를 휘둘렀다.
콰아앙!
검은색 가시가 칼날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간신히 궤도를 트는 덴 성공했으나, 뼈끝까지 전해지는 묵직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저 녀석은 이 정도 연기 속에서도 정확히 이쪽이 있는 곳을 아는 건가.
우연이라고 보기엔, 완벽하게 급소를 노렸다.
진동 감지보다 윗줄의 감지 능력을 지닌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 별의 가호로도 속일 수 없다니.
대체 어떻게 돼 먹은 감각 기관을 가지고 있는 거란 말이냐. 저놈은.
진혁이 재빨리 자세를 다시 잡았다.
또다시 온다.
그것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확하게 이쪽을 노리면서.
콰앙!
콰아앙!
굉음과 함께 연기 속에서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인지를 넘어선 신속의 창과.
경험과 반사 신경만으로 대응하는 단검.
눈으로는 따라갈 엄두조차 내기 힘든 공방전이 펼쳐졌다.
하나하나가 살벌하기 짝이 없는 절초였으나, 승부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러자.
공격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동시에 구체로부터 딱딱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짜증나는 인간이로군.]
이제는 완전히 걷힌 연기 너머로 구체의 표면이 일그러진 게 보였다.
드디어 저 목석같은 살육병기가 입을 여는 구나.
하긴. 이쯤 되면 짜증이 날 만도 하겠지.
보통의 플레이어라면 녀석의 첫 번째 공격을 받아내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니까.
“내가 어디 가서 예쁨 받는 성격은 아닌 것 같더라고.”
보통은 화병이 나서 앓아눕거나.
제 분에 못 이겨 대화하길 포기하곤 했다.
[말로 도발하면서 이쪽이 흥분하길 바라는 건가.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주도권을 잡는 쪽이 상황을 유리하게 설계할 수 있을 테니까.]
기계적인 음성이 이어졌다.
하여간…….
이렇게 무뚝뚝한 놈은 도발하는 재미가 없다.
발끈하는 맛이라도 있어야 몇 번 더 찔러보든가 하지.
“그래서. 꽉 다물고 있던 입을 연 건, 이런 식으로 계속해 봤자 평행선만 달리게 될 테니. 네 쪽에서 포기하고 이만 쾨쾨한 무덤 속으로 돌아가겠다…… 이런 뜻인가?”
[그럴 리가. 네놈처럼 성가신 날파리를 상대로 설렁설렁하다가는 끝도 한도 없을 것 같으니, 이제부터는 제대로 상대해 주겠다는 이야기다.]
그때였다. 구체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한 건.
매끄러운 표면에 잔물결이 일어났다.
꿀렁이며 모양이 가다듬어졌다.
잠시 뒤, 요동치는 물결이 멈췄을 땐. 둥근 구체가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 있었다.
[세 번째 절망 ‘네임리스’가 현현합니다.]
전신이 단색으로 물든 흑체(黑體).
눈코입은 없었지만, 형태만은 틀림없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흐음. 이 모습을 한 건 꽤나 오랜만이다.”
네임리스가 가볍게 몸을 풀며 손을 뻗자.
우두둑!
손바닥에서 약 1.5m에 이르는 검은색 가시가 튀어나왔다.
“어디…… 가볍게 창 하나로 시작해 볼까?”
네임리스가 투창을 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일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
굳이 연발의 장점을 포기한 채 인간의 모습을 취한 건 놈의 말대로 몸 풀기를 위해서가 아니다.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자잘한 공격으론 소용없다는 걸 알았기에. 더 큰 한 방을…….
정확히는 궤도를 빗겨낼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한 방을 준비하기 위해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혁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푹!
송곳니가 지면에 박혔다.
[‘만다라(曼茶羅)’ 부분 개변.]
파츠츠츠……!
황금색으로 물든 장벽이 나타났다.
[제1절(節) ‘사상단절(四象斷絶)’이 발동됩니다!]
‘달의 각인’을 통해 3겹의 결계까지 추가되자, 장벽에 하얀 빛을 띤 룬어들이 떠올랐다.
견고해 보이는 방패가 진혁과 네임리스 사이를 가로막았다.
“호오. 일부러 마력은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위기를 감지한 건가. 이건 그냥 감이 뛰어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겠군.”
네임리스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라도 해도 좋을 찰나.
꽈배기처럼 꼬아진 검은색 가시가 투창됐다.
파아앙!
음속을 돌파했기에 생겨난 소닉붐.
이어진 것은 최강의 창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일격이었다.
진혁이 전력을 다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룬어에 실린 빛이 한 층 더 짙어졌다.
그 순간.
콰아아아앙!
가시가 만다라로 구현한 방패와 격돌했다.
“크읍!”
진혁이 어금니를 부러져라 깨물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에 정신을 잃을 뻔했지만, 어떻게든 의식의 끈을 놓진 않았다.
쿠쿠쿠쿠쿠!
반파되다시피 한 방패.
첫 번째 결계는 충돌했을 때 박살났고 두 번째 결계 역시 관통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회전력이 가미된 가시는 여전히 그 위력을 잃지 않았다.
결계가 겹겹이 벗겨지며, 가시가 진혁의 안면까지 다가왔다.
이제 10cm.
가시가 두개골을 박살내기 전까지 남은 거리가 정확히 그만큼 남았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허나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완전히 결계를 파훼한 가시가 진혁의 안면을 강타해 버린 것이다.
퍼억!
진혁의 고개가 크게 뒤로 젖혀졌다.
“커……억….”
바람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몸이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
“진혁 씨……?”
테레사가 말을 더듬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입술이 덜덜 떨렸다.
“노, 농담이죠? 어서 일어나 봐요……. 어서. 어서어어!”
혹시라도 잘못 본 건 아닌지 확인했지만, 가시는 정확하게 진혁의 머리를 꿰뚫은 상태였다.
저 상처라면 그 누구라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제 곧 너희들 역시 놈의 곁으로 보내 줄 테니.”
네임리스가 또 다른 가시를 꺼냈다.
“우리도 죽인다고요…?”
“그래. 너희 역시 무덤의 안식을 방해했으니까. 너와 네가 속한 모든 곳의 인간들을 전부 다 죽일 것이다.”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 잠을 방해한 것 가지고 이렇게까지 한다는 건가요?”
“죄의 경중을 너의 알량한 잣대로 판단하지 말거라. 우리 입장에선 그것은 피로써도 씻을 수 없는 대죄이니.”
“하하하…….”
슬픔과 허무함.
그리고 그 모든 걸 넘어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분노가 꿈틀거렸다.
감정이 북받쳤는지, 테레사의 가슴이 격하게 들썩였다.
동시에.
주륵.
테레사의 눈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특이하게도 그 눈물은 희미하게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네임리스의 표면에 잔잔한 물결이 일어났다.
“……신성력이 변질되는 건가. 재밌는 능력이구나.”
이변이라고 할 수 있는 희귀한 현상.
하지만.
“그 힘이 완전히 개화하기 전에 없애 버리면 그 뿐이다.”
네임리스는 여전히 변화 없는 목소리로 창을 쥐었다.
이대로 테레사를 죽이고 표식이 새겨진 중화 길드의 놈들과 그 외의 인간들을 쓸어 버리면 될 터.
그런데.
이변은 그 한 가지만이 아니었다.
오싹!
네임리스의 몸이 제자리에서 멈췄다.
시선이 향한 곳은 진혁이 쓰러진 자리였다.
저곳에 뭔가 있다.
중층의 질서와 균형을 유지하는 자신마저 두려움에 떨게 하는 무언가가.
바로 그때.
[아공간 인벤토리가 강제로 오픈됩니다.]
주인의 죽음을 감지한 무언가가 반응했다.
쿠쿠쿠쿠쿠쿠!
약 20m 가까이 벌어진 아공간 인벤토리는 비현실적, 그 자체였다.
“이건…….”
네임리스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변화가 나타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저 너머에서 나오고 있는 것은…….
감히 탑의 층계(層階) 따위로는 구속할 수 없는 존재였기에.
쿠웅!
태산을 담은 것만 같은 무게가 느껴지는 발걸음.
마력의 끝이 있다면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크오오오오!”
날카로운 포효 소리에 구름이 갈라지고 대기가 격동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절망이자 재앙(災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