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밤의 피로연 (2)
시련의 탑 외부.
수많은 사람들은 날이 밝도록 잠도 자지 못한 채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전 세계의 쟁쟁한 랭커들이 1층으로 향했지만, 내부의 상황은 완전히 베일에 싸인 상태였고.
거기에 중국에서는 중화 길드가 정체불명의 괴물에 의해 사라진 상태였으니까.
모두의 호기심이 폭발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명예의 전당에 새로운 동영상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영상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 영상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영상이 재생됩니다.]
도심을 지옥으로 만든 건 검은색 외피로 전신을 감싼 거대 전갈이었다.
압도적인 위용.
중국 최강이라던 중화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물론, 중화 길드 역시 수의 이점을 살려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보려고 했으나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다.
한 방에 한 명씩.
수십 명의 플레이어들이 시체로 변하기까진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누군가 나타났다.
……공기가 바뀌었다.
그토록 강했던 블랙 스콜피온이 단 일 격에 쓰러졌다.
심지어 어떤 식으로 공격을 하는지 눈으로 식별조차 하지 못했다.
-샹크스 왼팔이!: 강진혁이다! 저 사람, 강진혁이라고!
-붉은토끼: 어쩐지.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나서나 했더니.
-내게 치킨은 살인이다: 강진혁이라면 가능하지. 진짜 미쳤다. 어떻게 저렇게 싸울 수가 있는 거냐? 그보다 지금. 저 거대한 전갈을 한 방에 잡은 거 실화임? 이거 편집빨 같은 거 아니지?
-zlrot7885: 편집 아님. 나도 이름은 밝히지 못하지만, 유명 길드 영상 편집해 주는 일로 밥 먹고 살고 있는데 영상에 손댄 흔적 없음. 100% ㄹㅇ 찐이다.
-마감인생: 그동안 대체 얼마나 더 강해진 거냐 ㅋㅋㅋ. 이쯤 되면 호주산 왈라비들 사이에 그뉵 캥거루 한 마리가 섞여 있는 수준 아님?
-기러기는 기럭기럭: ㅇㅈ. 3대 5톤 쌉가능 캥거루지.
중국.
아니, 세계 최강이라 자부하던 중화 길드조차 속수무책으로 방치해 버린 몬스터를 플레이어 하나가 처리했으니 당연히 반응이 뜨거울 수밖에.
마지막 ‘별의 가호’를 사용하는 장면과 고구마에 관한 부분은 편집해 뒀지만, 이것만으로도 모두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했다.
화룡점정은 명예의 게시판에 진혁의 영상이 업로드된 지 1시간이 되지 않아 뒤따라온 샤오팅의 인터뷰였다.
세계 유명 랭커들의 일상을 다루는 걸 주력 콘텐츠로 삼고 있는 뷰튜버가 직접 중국을 방문해 따낸 인터뷰였다.
“형님들. 안녕하십니까. 제가 또 이번에 새벽 비행기 타고 바로 중국으로 가서 화제의 중심이 되는 분을 진짜…… 진짜로! 어렵사리 섭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긴 말 할 필요 없이 바로 보시죠.”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인기 뷰튜버 ‘레몬트리’가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구독자 300만을 보유한 뷰튜버답게 진행 또한 깔끔했다.
카메라가 돌아가자, 긴 생머리에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는 여성이 잡혔다.
“중화 길드 본부의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샤오팅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샤오팅 플레이어님. 시간이 없으니 시청자 형님들이 가장 궁금해 하실 질문만 몇 가지 해 보겠습니다. 먼저. 영상 속에선 중화 길드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메인 공격대와 남궁천 플레이어 등은 보이지 않았는데요. 대체 다들 어디로 간 겁니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상부와는 아무리 연락을 하려 해도 되질 않은 상태였어요.”
“전부 도망쳤다는 말씀이군요.”
레몬트리가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으나, 샤오팅은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모든 싸움이 끝날 때까지 중화의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께 있던 동료들은 민간인들을 대피하기 위해 목숨을 던졌지만, 저희로서는 역부족이었어요.”
아무리 발악을 해 봤자 절망에게 티끌만 한 상처조차 입힐 수 없었다.
하지만.
“강진혁 플레이어님 덕분에 시민들을 무사히 대피시킬 수 있었죠.”
“혹시 그에 따른 대가 같은 걸 요구했나요?”
“아니요.”
샤오팅이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분은 순수하게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인간이 인간을 구하는 데 이유 따윈 필요 없다.
진혁은 그렇게 한 마디 덧붙인 채 중국을 떠났었다.
-노량진 터줏대감: 자취방 냉장고에 넣어 뒀던 신김치가 웅장해지려고 하네.
-샹크스 왼팔이!: 와. 역시 이게 진짜 랭커지. 내가 구독하고 있는 플레이어답다. 진짜로.
-붉은토끼: 국가 차원에서 밀어줘야 됨. 강 형은. 한국을 알리는 데 이만한 홍보 효과가 없는 듯.
-새영귀환: 사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이미 넘사벽 존재긴 함. 기껏해야 언노운이나 이번에 인도에서 뜨고 있는 그 여자 정도는 되어야 비벼 볼 만할 듯.
-밥만잘먹더라: 미궁에서 플레이어들 죽지 말라고 조건 추가한 것도 진혁이형 덕분이라고 하더라.
-꿀벌공듀: 진ㅉㅏ 오빠 팬 될 것 같아S2ㅠㅠ.
-소방차는 멈추지 않아 NAVER: 솔직히 나도 같은 남자지만, 반할 것 같음.
-올 때 메로나: 검색해보니 공듀가 남자고 소방차가 여자인 게 소름이네.
진혁을 찬양하는 댓글들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뷰튜브 서버가 마비될 정도로 트래픽이 폭주했으니 더 이상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
그리고.
“내가 좀 착하긴 하지.”
댓글들을 꼼꼼하게 읽던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에 있는 녀석들은 악마니 사탄이니 하면서 불평불만이 많은데.
‘역시, 내 진정한 가치를 알아 주는 사람들은 구독자들뿐이라니까.’
이래서 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는 옛 말이 틀린 게 하나 없다.
옆에 있던 엘리스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진혁을 쳐다봤다.
“네가 착하다고?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악덕업체 사장 주제에.”
마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한 눈빛이다.
“우리 회사만큼 직원들 복지에 관심이 있는 곳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말을…….”
“무일푼으로 부려먹기만 하면서 무슨 놈의 복지? 막말로 아타락시아 가문에 종속된 고블린 노예들도 그것보단 많이 받겠다.”
“…….”
젠장.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섰다간 천하에 길이 남을 악덕 사정이 될 터.
진혁이 재빨리 반박할 말을 쥐어 짜냈다.
“직원들의 성장을 위해 매일 같이 고군분투하는 거 안 보이냐? 다 같이 잘 살아 보겠다고 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그건 네가 성장하는 데 곁다리로 데리고 다니면서 이용해 먹는 거잖아.”
“…….”
이번에도 막혔다.
이 망할 놈의 모기는 하도 같이 붙어 다니다 보니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이래서 내부 고발이 제일 무섭다는 거구나.
그렇다면…….
“실제로 내가 그랬다는 증거는 있어? 말로 엄한 사람 잡지 말고 객관적인 증거를 대 봐.”
무죄 추정의 원칙. 증거주의.
세상엔 훌륭한 법리(法理)들이 존재한다.
“증거 같은 소리하네. 너한테 노예 계약을 체결당한 애들 증언만 모아가도 판사가 피눈물을 흘리겠다. 몰랐는데, 심지어 고구마도 속여서 이용했다며?”
“모기!”
고구마도 볼을 부풀린 채 꼬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마도 이건 화가 났다는 뜻이겠지.
증인까지 나왔으니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엘리스조차 간과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세상엔 증인을 매수해 버리는 방법이 있다는 걸.
“우리 고구마.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그래그래. 다 알고 있어.”
진혁이 고구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줬다.
어느새 오른손에 큼지막한 마정석 한 덩이가 쥐어져 있었다.
코인 거래소에서 무려 10만 코인을 주고 산 ‘녹색 마정석’.
거기에 ‘이세계 식당’으로 고대종의 입맛에 맞는 양념을 뿌리자 그야말로 완벽한 간식거리가 탄상했다.
영롱하게 빛나는 초록색 물결이 고구마의 동공에 맺혔다.
이건 참기 힘들 거다.
“모기!”
고구마의 입에서 군침이 흘러 내렸다.
“야! 치사하게 먹을 걸로 회유하는 건 아니지!”
엘리스가 고함을 질렀다.
물론, 소용없는 일이다.
오독! 오도독!
이미 마정석에 빠져버린 고구마가 두 손으로 마정석을 꼭 잡은 채 연신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으니까.
“구마야. 내가 널 이용했니?”
“모기?”
“아니지?”
“모기!”
이걸로 됐다.
***
진혁이 엘리스와 함께 무도회장에 입장했을 땐 이미 내부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호오.
‘이거 귀하신 분들이 전부 다 오셨네.’
진혁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플레이어들로만 구성된 처음 무도회와는 달리 이번엔 중층부의 굵직한 거물들이 잔뜩 내려온 상태였다.
특히나 라이벌을 제치고 당당히 1인자의 자리에 오른 ‘제국’의 거주자들은 그 면면부터가 달랐다.
소드마스터인 펜하이머부터.
제국에서도 셋밖에 없는 8서클 대마도사와 여신 페리스를 섬기는 하이 프리스트. 그리고 철의 재상이라 불리는 알프레드까지.
제국의 실세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전부 한 자리에 모였다.
‘자기소개 한 번씩만 해 줘도 플레이어들이 자지러지겠구만 아주.’
황실의 결혼식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 이 정도 멤버를 1층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무림 측도 상당히 막강한 멤버들을 모아 왔다.
5대 세가의 일원인 모용수야 자리를 비웠지만, 남궁세가를 비롯해 무당과 화산의 인물로 보이는 젊은 고수들이 눈에 띄었다.
하긴,
아무리 열이 받아도, 플레이어들의 포섭할 기회를 이대로 날려먹을 순 없었겠지.
특히나 중화라는 카드의 활용도가 대폭 하락한 지금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그 외에도 정령 쪽과 중소 세력들도 보였다.
‘제3 세력이라…….’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거주자도 플레이어도 아닌, 지능형 몬스터로 구성된 특이 세력이다.
담수호에서 만났던 서리칼날 부족의 카라칼이나 정신병동의 주인인 안드리아 같이, 인외종이었으나 탑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세력을 합친 경우라고 할까?
‘확실히 매력이 있는 세력이지.’
주류는 아니었지만, 그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는 곳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천유성과 테레사가 무도회장으로 입장하는 게 보였다.
하얀색 정장을 입은 천유성과 대조적으로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테레사.
‘아직까지 여파가 남아 있는 건가.’
다소 지친 얼굴의 테레사는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아마도…….
“너라면 알고 있을 텐데? 성녀를 타락시킨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엘리스가 진혁의 생각을 대신 내뱉었다.
“……그래. 양날의 검이 될 수 있겠지.”
알고 있다.
쉽지 않다는 것쯤은.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야.”
20층을 넘어선 순간부터는 플레이어들은 완전히 미지의 영역을 맛보게 된다.
평범한 방식과 성장으로는 결코 위로 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 뭐, 너야 다 생각이 있겠지.”
“웬일이야? 나를 다 믿어주고?”
“음흉하긴 해도 언제나 옳은 결정을 하니까. 그리고 적어도 한 명쯤은 널 믿어주는 존재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흐음.
이건 살짝 감동인데?
하긴, 엘리스가 언제나 투덜거리긴 했어도 항상 내가 내린 결정을 지지해 줬었지.
고독하게 탑을 올라가야만 하는 와중에도…….
……속을 터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료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부탁을 좀 할게.”
진혁이 테이블 위로 무언가를 올려뒀다.
그리고.
“이건…… 설마?”
그걸 본 엘리스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