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그림자 속 암기, 월영(月影) (1)
[충성심이 +20만큼 상승합니다.]
[무림의 거주자 ‘월영(月影)’이 당신에게 미미한 신뢰를 보입니다.]
역시.
과거의 상처가 깊은 녀석일수록, 아픔을 치유하는 법은 단순해야 한다.
‘절대 쓰다가 버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주는 게 가장 중요하지.’
지금 한 말로는 그 단단한 벽의 일부를 허물었을 뿐이지만,
앞으로도 신뢰를 보여 준다면 녀석 또한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 것이다.
‘그렇게 되면 흑풍회가 아닌, 오직 나만을 위한 암기로서 새롭게 쓸 수 있을 테고.’
거기에 이런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얻는 이득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뜻밖의 모습에 멜레나와 정령수들까지 덩달아 감동받았는지 꽤나 볼 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인이 사실 착한가?”
“속마음은 따뜻한 걸 수도……?”
“요즘에 인간들 사이에 차도남이 유행이라던데 그건가 봐.”
“그게 무슨 뜻인데?”
“차가운 도살자라고 자기 편한텐 잘해 주는 랭커를 뜻하는 말이래.”
정령수들이 재잘재잘 떠들었다.
“이야. 당신, 좋은 말도 할 줄 아네.”
멜레나도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사소한 행동 하나, 말 한 마디가 중요하긴 한 모양이다.
안 좋았던 이미지도 한순간에 180도 달라질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칭찬의 갈채를 즐길 시간은 없었다.
“드디어 왔구나. 이 빌어먹을 인간 놈아.”
낮게 깔린 음성이 울려 퍼졌다.
몬스터들로 둘러싸인 벽 너머에서, 인골(人骨)로 만든 왕좌가 보였다.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뇌조, 아타샤였다.
여성의 상반신과 새의 하반신을 가진 반인반조가 새하얀 날개를 펼쳤다.
콰콰콰콰콰콰!
몰아치는 돌풍에 실린 마력이 심상치 않다.
과연, 보스는 보스라 이건가.
‘무적’ 스킬을 지닌 10계층의 바위 거인만큼은 아니었어도, 나름대로 보스 몬스터로서의 위용은 갖추고 있었다.
‘나머지 두 마리는 보이질 않는군.’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력을 통해 구석구석 훑고 있는 중이었으나, 또 다른 보스들의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곳에 있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함정인가.’
아마 후자일 확률이 높을 거다.
홈그라운드인 이곳까지 끌어들였다는 건 준비해 둔 한 수가 있다는 뜻일 테니까.
하지만 준비해 둔 한 수가 있는 건 놈들만이 아니다.
아까 전 ‘코인 거래소’에서 문양을 파훼할 때 쓸 재료들을 구입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한 히든카드가 있었다.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반면, 그걸 보던 아타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지로 걸어 들어온 놈이 뭐가 좋아서 낄낄대는 거냐? 공포에 질려서 머리가 돌아 버리기라도 한 건가?”
진혁이 강하다는 것쯤은 이미 오우거와의 전투를 통해서 충분히 봐 뒀다.
그러나 그 강함이 통용된 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오우거 몇 마리였을 때의 이야기.
이곳에 도열하고 있는 수많은 몬스터들은 고작 몇 마리 수준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일당백을 자랑하는 9계층의 정예들이란 말이다.
“미안, 진지한 표정을 지어 주는 게 예의인 것 같긴 한데, 어째 쉽지가 않네. 긴장이 안 돼서 그런가 봐.”
“크윽! 저 건방진 인간의 목을 가져올 동족은 없단 말이냐!”
아타샤의 외침에, 몬스터 무리 한가운데서 괴성이 울려 퍼졌다.
“검은 바위 부족의 칸고라가 가겠다!”
맹수의 털가죽을 어깨에 걸친 오크 한 마리가 몬스터들을 거칠게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예리하게 다듬어진 글레이브를 손에 쥔 오크는 평범한 오크들에 비해 족히 2배는 커 보였다.
“밑에 놈들 말고 네가 직접 오지?”
“네까짓 놈을 상대로 내가 나설 필요는 없다. 게다가 칸고라를 우습게보지 마라. 검은 바위 부족은 9계층에 있는 오크들 중에서도 최강으로 꼽히는 부족이니까.”
오크들 중 최강이라…….
쿵! 쿵! 쿵!
지면에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거칠게 질주하는 오크 투사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글레이브가 정확하게 진혁의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빠르고 정확하다.
거기다 그 와중에 검의 궤도를 두 차례 바꾸는 페인트까지 구사했다.
오크의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정교한 검술이었다.
하지만.
콰악!
거침없이 질주할 것만 같던 글레이브가 허공에 우뚝 멈췄다.
검은 손톱이 글레이브의 표면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아랫놈들은 아무리 많이 와 봐야 소용없으니. 직접 내려오라고.”
콰드드득!
글레이브가 우그러지며, 그걸 쥐고 있던 오크의 손까지 함께 박살내버렸다.
“크아아아아!”
오크가 고통에 차 울부짖었다.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찰나.
진혁의 반대 손이 오크의 머리통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
푸슉! 푸슈슉!
핏줄기가 먼저 땅을 적셨고.
뒤이어 머리를 잃어버린 오크의 몸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카, 칸고라가 일격에……?”
“검은 바위 부족 최고의 전사가 한 합을 주고받지도 못하고 죽다니.”
“인간 주제에…….”
비교적 지능이 높은 몬스터들 사이에서 거대한 동요가 일어났다.
지능이 낮은 놈들은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어금니를 드러냈다.
으득!
아타샤 또한 이를 갈았다.
하얀색 날개가 파르르 떨리는 건 분노했다는 방증이리라.
“또 없는 거냐!”
이대로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또 다른 도전자를 요구했다.
그러자 이번엔 하나가 아닌 다섯 마리의 몬스터들이 나섰다.
창과 방패로 무장한 리자드맨들이었다.
움찔하고.
흑풍회 쪽에서 검을 뽑으려 했다.
상대가 다수로 나선다면 이쪽에서도 1:1을 고집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러운 놈들이……!”
“수로 밀어붙이겠다는 건가.”
“모두 검을 뽑아라!”
그런데.
나서려는 흑풍회 대원들을 월영이 막아섰다.
“어째서 말리시는 겁니까?”
“주군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더냐.”
믿고 따르라고.
“아직 우리보고 나서라고 하지 않으셨다.”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자신들은 기다리면 된다.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
다섯 마리의 리자드맨들이 진혁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구축했다.
‘이런 식으로 가면 끝도 없어.’
일일이 상대해 주다간 하루 종일 싸워도 부족할 거다.
역시 어영부영 상대해서는 소용없다는 걸 직접 느끼게 해 주는 수밖에 없다.
진혁이 천천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흑천마황공’이 개화하며 전신에 검은색 운무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천마신교에 소속된 놈들이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압도적인 무.
모든 것을 짓밟아 버리는 힘만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규칙이라는 믿음 말이다.
파츠츠츠!
유형화된 기가 손과 발을 완벽하게 감쌌다.
본래라면 이 정도로 강한 마공을 사용했다간 정신이 오염될 수 있었지만.
유천영으로부터 복사해 둔 ‘진태청화랑심법’과 테레사로부터 복사한 ‘별의 가호’로 인해 심마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바로 그때. 포위망을 완벽하게 갖춘 리자드맨들이 공격에 들어갔다.
“인간. 죽인다!”
“꼬치구이로 만들어 주마!”
화르르륵!
창끝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주술에 능통한 ‘긴 꼬리’ 부족다운 능력이다.
거기에 룬어가 새겨진 방패로 앞을 가로막자,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 합격진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그 위태로운 포위망 속에서도 진혁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망치려 하지도 않고 약한 부분을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상대의 준비가 끝나길 느긋하게 기다렸다.
‘어설프게 부수면 방심하거나 최선을 다하지 못해서 졌다고 착각한다.’
그러니.
전력을 다했을 때. 모든 조건이 완벽해졌다고 느낄 때 박살내 줘야 한다.
진혁이 무게중심을 낮췄다.
‘때마침 그걸 사용해 보기 적당하겠군.’
과거 암황과 싸웠을 때…… 꽤나 마음에 드는 무공이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삼보신권(三步神拳)이라 부르는 권법이었다.
한 걸음 걸었을 때 대지가 부서지고.
두 걸음 걸었을 때 하늘이 침묵하며.
세 걸음 걸었을 때 그 앞에 서 있는 자는 없다.
그런 취지에서 만들어진 암황의 비기가 이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삼보신권은 그 이름대로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쿠쿠쿠쿠쿠!
유형화된 기가 마침내 그 기세를 멈췄다.
동시에.
쿠웅!
제일보(第一步).
진혁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단지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그런데.
콰콰콰콰콰콰콰!
엄청난 마력의 폭풍이 리자드맨들을 휩쓸었다.
일순간 몰아친 열풍(熱風)은 감히 한 생명체가 견딜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키에에에!”
“케에에엑!”
흑염에 휩싸인 리자드맨들의 몸이 산 채로 타들어 갔다.
신체를 강화시켜 주는 붉은 맹세의 문양도.
든든하게 몸을 보호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방패도 소용없다.
지켜보던 월영의 얼굴이 형언할 수 없는 빛으로 물들었다.
‘역시, 주군의 실력은 진짜였어.’
암황의 무공을 견식하게 된 것만으로도 감정이 북받쳐 오를 지경인데, 그 전설을 재현하는 인물이 자신이 모시게 될 주군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믿기지가 않았다.
그때였다.
쿠웅!
땅이 깊게 파이는 소리와 함께.
제이보(第二步)가 시전되었다.
열풍이 미풍(微風)으로 바뀌었다.
쏴아아아아…….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뭐, 뭐야? 이건?”
더 큰 게 올 거라 생각했던 아타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잔뜩 움츠린 듯 날개로 전신을 감싼 꼴이 우습게 되었다.
멀찍이서 방패를 들어 올리던 몬스터들도 별 것 아닌 공격에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월영만큼은 알고 있었다.
태풍 전의 고요함이 그 무엇보다 두렵다는 사실을.
극한까지 응축된 바람이 한 곳으로 모였다.
……이제 시작이다.
이 무공의 끝이 될 마지막 걸음이.
쿠웅!
제삼보(第三步) ‘종언(終焉)’.
세 번째 걸음을 내딛는 순간. 진혁의 주먹이 번개처럼 사라졌다.
바람이 멈췄고 뒤이어 그 소리마저 사라졌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아타샤가 입술을 떼려고 했다.
도망쳐야 한다고. 이 자리에서 피해야 한다고 외치려 했다.
허나 너무 늦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지면이 모조리 박살나기 시작했으니까.
쿠쿠쿠쿠쿠쿠쿠!
미풍은 광풍이 되어 몬스터들의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돌개바람 앞에 숫자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
“이, 이게…… 현실이라고?”
포로로 잡힌 프리드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삶을 포기했던 자신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동료가 몬스터들의 놀잇감으로 죽고. 또 다른 동료는 살기 위해 애원하다가 죽었다.
죽고 죽고 또 죽었다.
피비린내가 너무도 익숙해질 때까지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살아나갈 거라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못했다.
바라는 게 있다면 그저…… 조금이라도 고통 없이 숨이 끊어지길 원하는 것 정도랄까?
그런데.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게이트 너머로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은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어찌 몰라볼 수 있을까?
이미 한 번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 줬던 흑의인과…… 그들을 이끄는 최상위 랭커, ‘언노운’을.
“사, 살았어…….”
“우리 이제 살았다고!”
여기저기서 안도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몇몇인가는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기도 했다.
절망 속에 찾아온 한 줄기 빛.
그 희망을. 모두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알려야 해.’
프리드먼이 가까스로 스킬 하나를 발동시켰다.
붉은 결계로 인해 ‘개인 방송’을 활성화할 수 없었기에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상황이었지만, 아직까지 딱 한 가지 길이 남아 있었다.
시야에 담는 것을 외부에 송출할 수 있는 능력.
외부에 있는 동료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단칼에 묵살되었던 그 능력이.
다시 한번 발현되었다.
[시전자: 프리드먼]
[이 영상을 공유하시겠습니까?]
이번엔.
다르기를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