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그림자 속 암기, 월영(月影) (2)
미국 각성자 협회.
대리석으로 만든 테이블과 고풍스러운 의자가 있는 이곳엔 한 쌍의 남녀가 마주본 채 앉아 있었다.
긴급지원팀장을 맡고 있는 180cm의 근사한 금발머리를 한 남성, 헤지스.
마찬가지로 금발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성은 에슐리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팀장님!”
에슐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테이블이 흔들렸지만, 헤지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지원은 없습니다.”
“대체 왜죠? 지금 미로 안에는 록히드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갇혀 있어요. 팀장님도 아시잖아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허나, 에슐리 씨도 알고 계시겠죠. 지금 가용 가능한 길드로는 그 정도 난이도의 몬스터들을 처리할 수 없습니다. 정보가 너무 부족해요. 당연히 그만큼 리스크도 올라갈 테고요.”
“그렇다면 차라리 프리드먼의 능력을 통해 증거를 확보하고 그걸 토대로 타국에 지원을 요청하면……!”
“바로 그것 때문에, 지원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헤지스가 탁자 위에 있던 양주병을 기울였다.
얼음 위로 노란색 액체가 쏟아졌다.
“그것…… 때문이라고요?”
“이 정보가 알려진다면, 분명. 타국에서도 경계를 하겠죠. 실제로 유럽과 인도에서도 중형급 길드들이 공략을 준비하고 있는데, 자칫하면 그들이 미로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설마…….”
거기까지만 말해도 에슐리는 헤지스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라이벌 관계에 있어 전력의 균형은 필수적.
한 쪽이 무너지면 그건 더 이상 라이벌이라 부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게 된다.
“일부러 다른 나라의 공격대가 들어가게 한다는 건가요? 그래서…… 전부 죽게 하려고?”
“그래야만 저희가 받은 피해를 상쇄할 수 있습니다.”
“그건 범죄예요. 아니, 법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인간이 어떻게…….”
“합리적이라고 해 두죠. 저희가 강국으로 남아 있기 위해선 반드시 이런 희생이 필요합니다.”
헤지스가 양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에슐리의 얼굴에 경멸과 분노가 서렸다.
“협회장님께 직접 보고할 겁니다. 그분이라면…….”
“정의감 넘치는 협회장님이라면 당연히 지원을 하겠다고 하시겠죠. 하지만, 그분은 현재 이곳에 없습니다. 게다가 증거는 프리드먼과 함께 사라질 터. 에슐리 씨가 괜히 함부로 입을 놀리다가 그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협박하는 건가요?”
“경고하는 겁니다.”
“…….”
에슐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상대에 대한 역겨움에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러세요. 제가 했던 말 잊지 마시고요.”
에슐리가 문을 박차고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헤지스가 했던 말처럼 프리드먼이 저 안에서 살아 오지 못한다면 자신의 노력은 헛수고가 될 것이다.
증거는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역시 명령을 어기고 나서라도 시야를 공유받아 세상에 알렸어야 했어.’
물론, 지금에 와서는 아무 의미 없는 가정이다. 이미 죽었거나 마력이 고갈되었을 터인 프리드먼이 다시 시야 공유 스킬을 사용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우우웅!
[프리드먼으로부터 ‘시야 공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프리드먼으로부터 재차 연락이 왔다.
‘말도 안 돼. 그 상황에서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거야?’
압도적으로 불리했던 전력 차.
당연히 가망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건만…… 대체 어떻게?
영상 속에서 무언가를 본 순간, 에슐리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틀림없다.
저 잊기 힘든 가면과…… 압도적인 능력.
이런 게 가능한 사람은 단 하나뿐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생방송이 시작됩니다.]
영상이 전 세계로 송출되었다.
***
언제나처럼 새로운 자극과 떡밥을 찾아 커뮤니티를 배회하던 시청자들.
굶주린 하이에나와 같은 그들에게 있어 신선하고 새로운 영상은 언제나 최고의 먹잇감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영상이 나타났다.
생방송 하나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확히는 플레이어의 스킬로 인해 송출되는 미로의 영상이었다.
-위대한 삼겹살: 8층 생방송이라는데? 이거 실화냐?
-one할머니 보쌈: 거기 생방송 안 되는 거 아니었음? 무슨 결계인지 뭔지 때문에 안 되는 구역이 많다고 들었는데?
-모찌떡이된 햄토리: ㅇㅇ. 그래서 입구에서만 영상 켜고 안에선 끊기는 경우가 많았잖아.
새영언환: 이건 플레이어 스킬임. 뭔가 독특한 효과 갖고 있어서 뚫었나 봄.
캣타워 위에 유미: 프리드먼? 첨 들어보는 플레이언데?
스피드웨건: 미국 록히드라는 중, 대형급 길드의 랭커로 근접계열 능력자다. 공대장으로 던전 3회, 미궁 1회 공략 경험이 있지. 이상 스피드 웨건이었음.
하울의 무빙 오지는 성: 어? 잠깐. 저거 언노운 아니냐?
누군가의 말에, 시청자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언노운.
알려진 정보가 많이 없었지만, 세계 정상급 랭커 중 하나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다.
보기 힘든 유망주의 등장으로 인해 게시판이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순식간에 생방송에 접속한 시청자의 수가 세 자리 수가 넘는가 싶더니 이내 네 자리 수가 되었고 10분도 지나지 않아 다섯 자리 수를 돌파했다.
몇 분 뒤에 여섯 자리 수마저 가볍게 뛰어넘었을 땐. 매스컴과 각종 매체마저 주목하기 시작했다.
LovePack: 와 진짜다. 찐 언노운이야!
하울의 무빙 오지는 성: 그럴 것 같더라니. 움직임 보이냐? 무슨 걸어갈 때마다 몬스터들이 터져 나가는데?
one할머니 보쌈: 미쳤다. 저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수준임? 완전 괴물인데?
돌아온 김갓갓: 차라리 CG라고 하는 게 더 믿을 만하겠는데ㅋㅋㅋㅋ? 감탄 밖에 안 나온다 ㄹㅇ
새영언환: 강진혁하고 비빌 수 있는 유일한 플레이어지.
삼보신권이 발현되고 땅이 갈라지자 모두의 입에서 경외심 섞인 감탄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보여 준 무공은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을 아득히 무너뜨리는 수준이었으니까.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걸 알았기에, 이 싸움의 결말이 어디로 이어질지에 대한 기대감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매우 빠른 속도로 고조되고 있었다.
***
완전히 걸레짝으로 변해 버린 지면.
토사와 시체로 겹겹이 쌓인 기괴한 조형물만이 방금 전 공격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말해주는 듯싶었다.
“감히……!”
아타샤가 분노에 찬 음성을 토했다.
날개로 몸을 보호한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화려했던 날개는 먼지와 피로 인해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
고고하기 짝이 없던 아타샤로선 당연히 자존심이 구겨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선 이제껏 찾아보기 힘든 분노가 느껴졌다.
“그래서 말했잖아. 아랫것들 내보내지 말고 직접 나서라고.”
진즉에 나섰으면 피해도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이러니까 괜히 피만 많이 보게 된 거 아니야?
‘뭐, 덕분에 이쪽은 경험치는 톡톡히 뽑아 먹을 수 있었지만.’
방금 전 몬스터들을 쓸어버린 덕분에 레벨이 1개 올랐다.
수에 비해서 오른 레벨이 1개뿐인 건 그만큼 요구하는 경험치가 많아졌다는 뜻이겠지.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진혁을 보자, 아타샤의 이성이 끊어졌다.
“빌어먹을. 이제 장난은 끝이다!”
아타샤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
동시에 날개의 끝에서 노란색 섬광이 점멸했다.
[아타샤가 Lv13 ‘뇌전격(雷電擊)’을 발동합니다!]
미로의 천장 위에 구름이 드리웠다.
그것도 불길할 정도로 검게 물든 먹구름이.
‘뇌조(雷鳥)는 뇌조라 이건가.’
진혁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무리 고인물이라도 저걸 맨몸으로 맞았다간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될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번개를 피한다는 건 상식 밖의 영역.
“모조리 숯덩이로 만들어 주마!”
아타샤가 치켜들었던 손가락을 아래로 향했다.
동시에, 수십 줄기의 낙뢰가 낙하했다.
콰콰콰콰쾅!
콰아아앙!
번개 줄기는 정확하게 진혁과 흑풍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니, 향했다고 생각했다.
물과 흙으로 된 벽에 가로막히기 전까지는.
[운디네&노움이 ‘속성 실드’를 발동합니다!]
운디네와 노움의 고유 능력으로 만든 방패가 진혁의 주위를 완벽하게 감쌌다.
흐음.
‘나름대로 쓸 만하네.’
역시 중급 정령들답게 원소를 다루는 능력이 탁월하다.
지금껏 쓸데없는 데다 부려먹기만 해서 깜빡 잊었었는데,
그래도 이 녀석들. 나름 25층 미궁의 문지기를 했던 놈들이다.
다섯이 모이면 능히 한 층계의 보스인 뇌조와도 싸워 볼 만한 실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대체 왜 정령수들이 인간 따위의 편을 드는 거야! 진짜 답답해 미치겠네!”
“우리도 답답하긴 한데, 어쩔 수 없어.”
“응. 코를 단단히 꿰었거든.”
운디네와 노움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편을 잘못 선택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후회하게 될 거라니. 우린 이미 후회하고 있어.”
“살짝은…… 그렇지. 응. 사실 많이 그렇긴 해.”
본인들도 후회하고 있다는데, 더 이상 대화는 무의미하다.
남은 건 전력을 다해 쳐부수는 것뿐.
“모두 쓸어 버려라.”
아타샤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쿵! 쿵! 쿵! 쿵!
“크오오오!”
“오오오!”
수백 마리의 오크들과 그 틈틈이 배치된 오우거들이 괴성을 질렀다.
하늘을 나는 익수와(翼獸)와 땅속에서 서식하는 절지류 몬스터들도 함께 움직였다.
각각의 개체는 약할지 모르지만, 다양한 종류가 함께 시너지를 낸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조합이다.
“월영!”
진혁이 고함을 질렀다.
“존명!”
기다렸다는 듯이 대기하고 있던 월영과 흑풍회가 움직였다.
탓!
타앗!
가볍게 땅을 박차고 사라지는 그림자들.
검과 단도로 무장한 무림의 거주자들이 몬스터들에게 파고들었다.
그렇게, 두 개의 세력이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서걱!
시작을 알린 건 월영의 검이었다.
검강을 발현시킨 검이 일렬에서 달려오던 오크 셋의 머리를 일검에 토막내 버렸다.
곧바로 폭풍과 같은 검격이 이어졌다.
콰콰콰콰콰!
닿는 게 무엇이든 잘라내어 버릴 수 있는 최강의 힘.
‘검강(劍强)’.
그런 검강 앞에 오크들의 방어구 따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카아아앙!
상대 역시 그만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크읍!”
투사(鬪士) 계급의 오크가 끼어들었다.
“한낱 마물 따위가…….”
“칼부림을 하는데 종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인간?”
둘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나머지 흑풍회도 투사 계급의 오크들과 상대하게 되면서 종횡무진 움직이던 질주가 잠시 멈췄다.
[운디네가 ‘아쿠아 블레스트’를 발동합니다!]
[노움이 ‘랜드 피스트’를 발동합니다!]
[살라맨더가 ‘파이어 스톰’을 발동합니다!]
콰아앙!
퍼어엉!
5대 원소의 정령수들도 각자 보유한 스킬들을 난사하며, 수십 마리의 익수들을 하늘에서 떨어뜨렸다.
거기에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고구마까지 가세하면서 난전이 더욱 가속화됐다.
“모기!”
[고구마가 Lv4 ‘에시드 브레스’를 발동합니다!]
소형 브레스로 인해 수백 마리의 몬스터들이 삽시간에 녹아 버렸다.
치이이익!
불꽃과 연기로 인해 가려지는 시야.
몬스터들의 수의 이점을 살려 찍어 누르려고 하면, 진혁과 나머지는 개개인의 특성을 극대화함으로써 그 간격을 메워 버렸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속될 거라 예상했던 균형은 의외로 빨리 기울었다.
“헉!”
“주군!”
멜레나와 월영의 입에서 긴박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혁 역시 이변을 깨달았다.
“이건……?”
신속하고. 날카롭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새로운 변수가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