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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193화 (194/653)

193화.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단합 대회 (Feat. 놀이동산) (1)

카페에서 진혁을 기다리고 있던 인물은 다름 아닌 제국의 소드마스터 '펜하이머'였다.

시스템의 간섭상 탑 내부에 있는 거주자들이 탑 외부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다.

위화감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은 자체 필터링이 되거나, 자동적으로 기억이 왜곡되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펜하이머는 탑 밖의 세계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덜컹!

진혁이 펜하이머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앉았다.

중층부에서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고 하더니…….

탑 밖으로 나올 수 있을 정도의 코인도 아낌없이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 된 모양이다.

그나저나 저 아저씨도 갑옷이 아니라 검은색 양복을 빼 입으니 중후한 느낌이 제대로 사네.

영국 신사가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 보자고 하셔서 꽤나 의외였습니다."

"하하. 가능하면 제국 내로 초대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덕분에 진혁 님께서 사시는 세계를 볼 수 있게 됐으니 썩 나쁘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겠군요."

펜하이머가 카푸치노를 한 입 가득 머금었다.

"흐음……."

감탄사를 내뱉는 게 정말로 이 세계의 음식들이 마음에 드는 듯싶었다.

티라미수에 몽블랑에 마들렌에…… 아주 다과회를 열고 계셨구만.

"값은 제대로 치르고 마시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금화를 주니까 주인이 가게를 전세로 주더군요. 조용히 대화를 나눠야 하는 저로서는 다행인 일입니다."

"……."

이놈의 부르주아들은…….

엘리스나 이 사람이나, 돈이 썩어나면 한 나라의 화폐 가치를 붕괴시키는 게 취미라도 되는 건가.

진혁이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제국이 얼마나 부유한지 여부가 아니다.

지금 여기서 얻어가야 할 정보가 어떤 종류냐는 게 관건이지.

"그래서. 절 보고자 하신 이유에 대해 듣고 싶군요. 설마, 차나 한 잔 마시자고 부른 건 아닐 테고요."

"언제나 본론을 좋아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펜하이머가 골드 드래곤과 황금 장미로 장식된 반지 하나를 건넸다.

이건…….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황실을 상징하는 두 개의 문양이다.

"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통행증 같은 겁니까?"

"예. 귀족에게서 직접 받은 하사품이라는 뜻이니, 이것만 소지하고 계시면 제국 내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실 수 있을 겁니다."

확실히 이게 있으면 여러 가지로 행동에 자유가 보장이 된다.

그러나 단순히 반지 하나를 주려고 펜하이머가 직접 이곳까지 왔다고 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 정도 심부름이야 다른 사람을 시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무림이 생각보다 더 강하게 치고 들어오고 있나 보군요."

진혁이 서두를 잘라내고 대뜸 핵심을 찔러 버렸다.

"그, 그걸 어떻게……."

"무림이 선제공격을 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모두들 당연히 제국에게 유리한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고요."

하지만.

실상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직접 보지 않아도 오랜 경험이 그럴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놀랍군요. 혹시 저희 쪽에 스파이라도 보내두신 건 아닌 건지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

"맞다는 뜻이군요."

"말씀하신 것처럼 상황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이미 24층 일부가 완전히 무림 쪽에 넘어갔고. 1개 기사단과 5천 명으로 구성된 병력이 궤멸당한 상태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

아무리 무림이 개개인의 무공이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저 많은 수를 궤멸시킬 수 있을 정도는 아닐 텐데?

그렇다는 건.

"상층부에서 개입한 겁니까?"

더 높은 세력이 개입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된다.

35층의 위.

다시 말해 '신격'과 '초월체'들이 거주하는 층계로부터.

"……그들이 개입한 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무림에서 그토록 강하게 나올 수 있는 카드가 없을 텐데요."

"사실, 딱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진혁의 말에, 펜하이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오히려 신격들의 개입보다 더 골치 아픈 이름을 언급했다.

"천마가 폐관을 끝냈습니다."

천마(天魔).

시련의 탑에서 전체 서열을 꼽는다면, 단연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다.

인간의 몸으로 그 한계를 집어던진 존재.

그렇기에, 녀석이 걷는 길은 피로 얼룩지고 놈의 손이 지나가는 곳은 폐허가 된다.

하늘에서 내린 재앙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천재지변에 버금가는 괴물은 무림뿐 아니라 탑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절대자 중 하나였다.

그런 녀석이 폐관을 끝내고 나왔다니.

'만약 놈이 현경을 넘어 자연경의 경지에 이른 거라면 진짜 골치 아파지는데…….'

진혁이 굳은 얼굴로 새로 나타난 변수를 계획에 추가했다.

그러다 문득 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정말로 천마가 나타난 거라면 나에게 말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제국의 소드마스터와 왕궁 마법사들이 전부 달라붙어야 할 일을 일개 플레이어에게 맡길 리는 없다.

플레이어가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아직까지 거주자들의 수준에는 한참이나 못 미쳤으니까.

결국 펜하이머가 이곳에 온 건 천마와는 관련이 없다는 말이 된다.

장황한 척 여러 정보를 주고 있지만…… 정작 이자가 노리고 있는 건…….

'그런가.'

진혁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야 알겠다.

펜하이머가 확인하고자 하는 건 이런 저런 정보를 주면서 이쪽이 그 편린들로 어떤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정보력과 분석력 그리고 자신이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파악할 수 있느냐는 거겠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까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공을 들이고 있다는 건 결코 가볍지 않은 뒷사정이 있기 때문이리라.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떠보는 건 이쯤해서 충분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묻죠. 저를 만나고자 한 진짜 이유가 뭡니까?"

"……하하하하! 역시 진혁 님에게 오기로 한 게 옳은 결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펜하이머가 광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웃음 뒤에 이어진 말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진심이 실려 있었다.

"전쟁이 벌어진 것도 사실이고 천마가 나타난 것도 사실입니다. 허나, 그 모든 건 저희 쪽에서 해결해야 할 일. 제가 진혁 님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건 저희 내부에 있는 첩자를 선별해 주시길 부탁드리기 위함입니다."

"첩……자라고요?"

"그렇습니다. 누군가 무림과 내통하고 있습니다. 내부의 정보를 교묘하게 빼돌리고 있는 상황이죠. 그리고 정보의 수준으로 짐작하건대, 굉장히 높은 곳이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거 일이 꽤나 복잡하게 얽혀 있다.

잘만 하면 꽤 재밌는 판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는데…….

대충 어느 쪽에서 황실을 배신했는지 짐작이 갔다.

제국에 관해서라면 건국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연도별로 줄줄 꿰고 있을 만큼 관심 있게 공부해 둔 덕분이었다.

"만약 제가 한다고 하면, 그 대가로 제국은 저에게 뭘 해 줄 수 있습니까?"

"중층부의 지원과…… 상층부로 갈 수 있는 최단 루트의 제공. 이 두 가지를 약속드리겠습니다."

복잡한 20층대 층계를 일일이 돌파할 필요 없이 몇 년이 걸려야만 하는 일을 몇 달로 단숨에 줄여주겠다는 의미다.

"조만간 제국에서 뵙겠습니다."

***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사원 여러분. 모두 좋은 오후입니다. 그동안 각자 열심히 활동하느라 얼굴을 볼 새가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단합을 위해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으니 초대장을 받은 분들은 빠짐없이 참석 부탁드립니다.]

[장소: 시련의 탑 1층에 위치한 테마 파크 / 시간: 오후 3시까지.]

정중한 초대장이 배송되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정작 약속 장소에 온 멤버는 다소 뒤죽박죽이었다.

우선, 검은 까마귀 길드를 담당하는 김희웅과 정신병동을 맡은 안드리아, 그리고 마인 협회의 멜레나는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그 자리에 천유성과 테레사가 함께해 줬다.

물론,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엘리스와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월영이 합류한 건 덤이었다.

"놀이동산은 진짜 오랜만에 와 봐요."

테레사가 동심에 빠진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련의 탑 중앙에 위치한 테마 파크는 디즈니랜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실제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탑을 오르느라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기껏 바쁜 사람을 불러다 놓고 한다는 게 이런 거냐?"

천유성이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음.

그런 것치곤 묘하게 들 떠 보이긴 하는데.

말로는 툴툴대면서 왜 시선은 롤러코스터에게 꽂혀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해명을 좀 듣고 싶다.

아니, 진심으로 왜 반대 손엔 자유이용권의 가격에 해당하는 코인을 손에 쥐고 있는 건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해라.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응. 하고 싶은 말이 있긴 한데. 놀이동산에서 칼부림 날까 봐 참을게."

"그게 무슨 뜻이지?"

"별 다른 뜻 없어. 그냥…… 모처럼의 사내 단합 대회의 평화를 유지하고 싶은 거랄까."

의대생이 장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시련의 탑 커뮤니티에 올라가기라도 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꽤나 곤란하다.

'한국대 소드 마스터의 실체.avi'라는 제목의 영상이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건 더더욱 곤란하고.

진혁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로 그때.

꾸욱.

옆에 있던 엘리스가 진혁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인간. 나는 저것이 먹고 싶노라. 빨리. 빨리."

엘리스가 큼지막한 솜사탕을 가리키며 군침을 꼴깍 삼켰다.

안 사 줬다간 놀이동산 전체를 폐허로 만들어 버릴 기세다.

이놈의 여왕님도 모시기 참 번거롭다.

첫 번째 주주총회를 할 때는 그래도 말 잘 듣고 얌전한 사원들만 모였었는데…….

잠시 과거의 추억을 곱씹던 진혁이 모든 걸 포기한 채 푸드 코트로 향했다.

"솜사탕에 핫도그에 구슬아이스크림에…… 그냥 여기 있는 거 종류별로 한 개씩 다 주세요."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도 풀 겸 확실하게 쏠 생각이었다.

'2개 층을 공략하고 50만 코인도 받았으니, 이 정도 사치는 부려도 되겠지.'

게다가 올려 둔 동영상의 조회수도 쭉쭉 늘어나고 있는 만큼 비워진 잔고는 이전보다 더 두둑하게 차오를 것이다.

무엇보다 엘리스는 앞으로도 무궁무진한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회심의 카드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지금 쓰는 코인은 푼돈처럼 느껴졌다.

***

그 후 6시간 동안 일행들은 각종 놀이기구를 타고 맛있는 걸 먹으며 모처럼의 꿀맛 같은 휴식을 마음껏 즐겼다.

워낙 엄한 예절 속에 자라 온 테레사나 무뚝뚝한 성격의 천유성은 물론이고.

이런 장소에 처음 온 엘리스는 하도 비명을 지르느라 목이 다 쉬어 버릴 지경이었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요?"

해가 저문 걸 본 테레사가 해산을 제안했다.

폐장 시간도 거의 다 됐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아니. 벌써 가면 어떡합니까?"

진혁은 묘한 미소를 지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네? 설마 아직도 뭐가 더 있다는 건가요?"

"그럼요. 아직. 제일 중요한 곳이 한 군데 남았습니다."

진혁이 놀이공원의 가장 안쪽을 가리켰다.

화려한 전경 뒤에 가려져 있는 터라 잘 보이지 않던 문이 보였다.

뭐랄까.

그냥 한 눈에 봐도 들어가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문이었다.

"가볍게 놀았으니, 이제 고인물식 놀이동산을 제대로 즐겨 봐야죠."

저곳이…….

바로 놀이공원의 숨겨져 있는 진짜 '하드 모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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