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철혈의 수호자 '제국(帝國)' (3)
좌중이 모두 얼어붙어 버린 회의장.
꿀꺽!
여기저기서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인재가 갑자기 떨어지다니…….
-우리 가문에 영입할 수만 있다면 단번에 세를 바꿀 수도 있겠어.
-공작가가 되는 것도 꿈만은 아니야. 제국 제일의 기사단장이랑 같은 수준의 실력이라는 거잖아?
-이거라면 무림과의 전쟁에서도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혈통이 보장된 귀족의 자제가 아니라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 그랜드 소드마스터급의 실력자라면 신분의 차이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특히나 현재 제국은 무림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상황.
뛰어난 인재가 얼마나 귀중한지는 말해 봤자 입만 아프다.
그렇게, 모두가 몸을 달싹이며 진혁에게 말을 걸 타이밍을 엿보고 있을 때였다.
"지금 다들 무엇에 현혹되고 있는 건가! 당장 저 사악한 마법을 쓰는 이교도를 끌어낼 생각을 하지 않고!"
새로운 인물이 끼어들었다.
나이는 약 40대 중반.
무인은 아니었으나, 몸에서 흘러나오는 날카로운 기세는 오히려 무인의 그것을 뛰어넘었다.
굳이 '탐식의 눈'을 사용하지 않아도 상대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베인슈텔른 공작.
황권을 위협하는 명실공히 제국 최고의 권력자이자, 무림과 손을 잡은 내부의 첩자다.
간다라에게서 들은 정보의 당사자를 직접 마주하게 됐다.
"베, 베인슈텔른 공작님?"
"이교도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뜬금없는 말에, 다시 한번 동요가 일어났다.
그러나 베인슈텔른은 단칼에 모두의 의심을 일축해 버렸다.
"그대들도 저자가 검은색 오러블레이드를 사용하는 걸 보지 않았나?"
통상적인 오러는 푸른빛을 띠어야 한다.
하지만, 진혁의 오러는 '검의 무덤'의 효과로 인해 짙은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색이 이상하긴 해. 저런 건…… 네크로맨서들이나 무림 쪽에서나 볼 법한 건데."
"오러블레이드가 아니란 건가."
과거 17개 왕국과 달리 현재 7개의 왕국으로 구성되었으나.
여신 '페리스'를 섬기는 신성 제국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았다.
전 국민과 지도부 모두가 이교도에 극도로 민감하다는 뜻이다.
베인슈텔른은 그 점을 노려 진혁을 압박하려 했다.
"이야. 신분이 계속해서 바뀌네. 무림인에 이교도에. 나중에 가면 악마라는 소리도 들을 수 있겠어."
"억울하다면 순순히 무장을 포기하고 투항해라. 그렇게 할 경우 공정한 재판과 심문을 통해 항변할 기회를 주겠다."
"앵무새처럼 너희들이 원하는 말을 할 때까지 고문이나 하는 거에 '공정한'이란 형용사가 붙을 수 있는 건가?"
진혁이 피식 웃었다.
이런 레퍼토리는 하도 많이 들어봐서 신선하지도 않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실력으로 요구해."
단검의 끝이 베인슈텔른에게 향했다.
"실력은 뛰어나나 상황 파악은 잘 안 되는 모양이구나. 혼자 이곳에 덩그러니 와서 대체 무얼 하겠다는 거냐?"
이곳은 제국이다.
그것도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군사 회의가 열리는 장소.
비록 근위대장이 어이없게 기세에서 밀리긴 했지만…….
그런 녀석을 대체할 수 있는 '진짜 실력자'는 언제든지 불러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저벅.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공기가 달라졌다.
'역시 오는 건가.'
진혁의 눈매가 문 쪽으로 향했다.
그래도 조금 쉽게 가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으음. 저희가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요?"
회의실 밖에서부터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는 대략 20대 초중반.
평상복 차림에 금발 머리와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다.
얼핏 보면 너무나 순수하게 생긴 옆 동네 총각처럼 생겼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절대 녀석의 외모만 보고 넘겨짚어선 안 된다.
제국이 보유한 최강의 무기.
단신으로도 전원이 소드마스터로 구성된 기사단을 뛰어넘는 전력이라 평가받는 그랜드 소드마스터다.
'에브라함 드 펠리시아.'
이 독종을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에브라함 옆에는 제국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맥켄시까지 있었다.
두 녀석 다 지금쯤 무림을 상대하기 위해 최전방으로 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가.'
어쩌면 단순히 제국뿐 아니라 다른 변수가 끼어들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혁이 '탐식의 눈'을 통해 상대의 상태창을 열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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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에브라함 드 펠리시아
성별: 남
나이: 25세
레벨: 125
힘 72 민첩 85 체력 70 마력 36 초감각(超感覺) 103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직업: 기사
고유 능력: 고속검(高速劍)
스킬: Lv35 '비전검술', Lv35 '마력 이동', Lv33 '대(對)마법 방어', Lv32 '신속', Lv30 '정신방벽'…… 너무 많은 스킬이 나열되어 있어 일부 '접어두기' 상태로 전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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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설명: 제국의 명문가 펠리시아 가문의 첫째 아들인 에브라함은 5살 때부터 마력을 느꼈으며,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16살 땐, 오러의 형(形)을 완전히 갖출 수 있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고 24살 땐 오러의 이치를 깨달아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황제가 아닌 귀족들을 위해 검을 휘두르며, 특히 공작인 베인슈텔른의 직속 라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복사 조건: 에브라함은 그의 단짝이자 동료인 맥켄시를 굉장히 아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기사인 맥켄시에겐 어려서부터 궁정 마법사도 어찌할 수 없던 병을 앓고 있는데…… 그 상처를 들쑤신다면 에브라함이 보유하고 있는 고유 능력과 스킬 중 한 가지를 복사할 수 있게 됩니다.(최소 3번의 창의적인 멘트를 곁들여 주세요.)]
과연…….
스탯을 읽는 것만으로도 엄청나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다.
레벨도 100이 넘는 것도 대단한데, 상대의 움직임을 예상하게 해 주는 스탯인 '초감각(超感覺)'까지 3자리 수다.
'완전히 괴물이군.'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플레이어들이나 거주자보다 뛰어난 스펙이다.
아예 규격 외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전신에 쭈뼛쭈뼛 일어나는 솜털과 빠르게 뛰는 심장이 낯설게 느껴졌다.
동시에 탑을 오를수록 이런 강적과의 접점이 많아질 거라는 생각에 묘한 기대감 또한 솟구쳤다.
'완전히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어.'
이런 기연을 접한 이상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복사 조건을 성공시켜야만 한다.
특히, '고속검'은 현재 저장된 스킬들하고도 시너지가 잘 날 터.
융합을 통해 상위 버전의 스킬까지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글쎄, 이걸 놓쳤다간 한 달간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
가장 중요한 복사 조건을 확인하던 진혁의 눈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문무와 혈통까지 모든 게 완벽한 맥켄시.
그의 유일한 상처이자 트라우마는 바로 맨들맨들하게 비어 있는 머리였기 때문이다.
***
"허허. 아닐세. 딱 맞춰서 와 줬네."
베인슈텔른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아군을 얻은 것 같은 얼굴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래서 이자가 황실의 근위기사들에게 칼을 겨눴다는 침입자입니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친구지. 감히 황제 폐하의 앞에서 불경을 범한 죄. 그게 얼마나 무거운 대죄인지 경이 직접 알려 주게나."
"알겠습니다."
에브라함이 검으로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
"에브라함 경까지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는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맥켄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몸이 근질거리기라도 한 것이냐? 공작께선 나에게 명을 내리셨다."
"고작 침입자 하나를 상대로 제국 제일검께서 나서는 건 모양상 좋지 않습니다."
"흐음. 그것도 그렇긴 하지. 공작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야 저자만 처리할 수 있으면 상관없네."
베인슈텔른이 동의했다.
그러자.
부웅!
일격에 바위도 쪼개 버릴 것 같은 투헨드 소드가 천장으로 향했다.
주춤하고.
지켜보던 귀족들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혹시라도 말려들었다간 뼈도 추리지 못하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꿀꺽. 저자는 이제 죽었어."
"와이번의 머리를 통째로 잘라 버리는 괴력……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생포가 아니라 시체 수습하는 것도 쉽지 않겠군."
하지만,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던 맥켄시의 걸음은…….
이어지는 말에 우뚝 멈췄다.
짝! 짝! 짝! 짝!
"모시는 주인을 번거롭게 할 수 없다라…… 진짜 '헤어'나올 수 없는 충성심이야. 그 풍성한 충성심이 모발에도 좀 남아 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진혁이 손뼉을 마주쳤다.
"헉!?"
"지, 지금 뭐라고?"
"제정신인가?"
귀족들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모두들 암묵적으로 금기시하고 있던 걸 진혁이 후벼 파 버렸으니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강인한 척 묵묵히 수련에만 집중하고 있는 맥켄시였지만.
사실 그가 탈모로 인해 얼마나 스트레스 받고 있는지에 대해선 제국에 있는 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
베인슈텔른은 물론, 완벽하게 연기를 하고 있던 펜하이머까지 당황했다.
'젠장. 나도 알아.'
너무하다는 것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복사 조건이 이렇게 정해졌으면 그에 맞춰 따라야하는 게 플레이어의 숙명인 것을.
"죽여 버리겠다!"
쾅!
맥켄시가 지면을 박차고 도약했다.
무식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 깜짝할 사이에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방 안을 가득 채우는 푸른빛의 오러 블레이드.
대조적으로 진혁의 '송곳니'에선 검에 물든 강기가 1m 가까이 솟구쳤다.
콰콰콰콰콰!
콰아앙!
두 개의 검이 맞부딪치자 푸르고 검은 스파크가 일어났다.
순수한 힘과 힘의 대결.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던 맥켄시가 위에서 아래로 검을 짓눌렀다.
쿠쿠쿠쿠쿠!
"묵직하네."
"이죽거리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라. 그 연약한 팔과 다리로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다만."
"아무렴. 아무리 내 팔다리가 근육질이 아니라도 '두 발'이 없는 너보다 연약할까?"
"크아아아아!"
맥켄시가 단숨에 균형을 깨고 검을 휘둘렀다.
책상이 송두리째 잘려 나가며, 벽에 검이 지나간 흔적이 남았다.
그러나 그 일격은 진혁에게까진 닿지 못했다.
날다람쥐처럼 몸을 날린 진혁이 회의실의 구석으로 향했다.
'이걸로 두 번째…….'
여기서 마지막까지 달성하고 싶었지만, 더 했다간 귀족들이 다칠지도 모른다.
'내 목적은 황제에게 가치를 입증하는 거지. 귀족들을 몰살시키는 게 아니거든.'
게다가 이걸로 첫인상은 확실하게 박아 뒀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스타트였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스펙터클하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설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에브라함이 즉각 검을 뽑았다.
물론, 한 발짝 늦었다.
['빙하조형(氷河造形)', '서리운무'가 발동됩니다!]
모두의 시야가 뿌옇게 물들었다.
얼음 알갱이와 수증기가 섞인 구름이 회의실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쳇. 눈속임으로 시간을 벌어 봤자……!"
어차피 이 안에서 도망갈 길은 없다.
혹은 독 안에 든 쥐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수증기가 걷혔을 땐, 진혁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신 회의실 바닥에는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 하나가 덩그러니 나타난 상태였다.
그리고.
"……."
이 모든 걸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황제의 얼굴에 처음으로 격한 감정이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