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철혈의 수호자 '제국(帝國)' (4)
황궁 내에는 황족을 위한 수많은 비밀 루트들이 존재한다.
최악의 경우.
적들이 이곳까지 오더라도 황족들만큼은 탈출시켜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보안이 중요했기에, 오직 황족들만이 이런 통로들의 위치를 알고 있어야 했건만…….
대체 어떻게 이방인이 황궁의 비밀 통로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말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너무나 충격적인 상황에 베인슈텔른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놀란 건 나머지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회, 회의실에도 비밀 통로가 있었을 줄이야."
"이곳에서 30년간 회의에 참석했지만, 저기에 틈이 벌어진다는 건 처음 알았어."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모두가 통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리고 있는 동안, 에브라함이 맥켄시에게 다가갔다.
"괜찮냐?"
맥켄시는 아직까지 분을 삭이지 못해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였다.
"예. 괜찮습니다."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
하지만.
에브라함은 곧바로 맥켄시의 팔을 붙잡았다.
"크읍!"
고통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에브라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벼, 별 것 아닙니다. 제가 마력을 제대로 주입하지 않아서 살짝 다친……."
맥켄시가 무어라 변명했지만, 그런 말은 에브라함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설마…… 이 정도라고?'
팔이 부러졌다.
육안으로 봤을 때 거의 동수라고 판단했었는데…….
아니, 오히려 체급이나 힘에서 맥켄시가 상대를 압도했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오판이었다.
그 짧은 찰나, 놈은 기감으로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순간적인 마력을 폭발시켰다.
그래서 눈치를 채지 못했던 거였다.
정말이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빠른 마력 운용이다.
'꼬리를 말고 도망친 게 아니었구나.'
오히려 마음만 먹었다면 맥켄시의 목이 바닥에 뒹굴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
분노로 얼룩진 베인슈텔른이 다가왔다.
"에브라함 경. 당장 추격대를 꾸려 놈을 뒤쫓게. 이대로 이교도를 놓쳤다간 주변 왕국들에게 신뢰를 잃어버릴 우려가 있네."
"공작 각하. 그 전에,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에브라함이 목소리를 낮췄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 말해 보게."
"꼭 그자를 적으로 돌려야겠습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녀석과 굳이 적대해서 피를 보느니 차라리 저희 쪽으로 회유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허허. 놈이 제법 쓸 만한 실력을 보유했다곤 하나, 그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무엇보다 대업을 코앞에 둔 이때, 어디에서 굴러온 놈인지도 모르는 걸 품는 위험을 감수할 순 없네. 그러니 당장 추격대를 꾸리게."
오랜 세월, 철저하게 준비해 온 씨앗이 마침내 발아할 때가 되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마침내 귀족의 신분이 아닌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위해서 10년이 넘는 세월 간 모든 걸 희생해 계획을 세웠고.
그걸 위해서 평생을 적으로 싸워 오던 무림과 손을 잡았다.
하지만, 자신의 말에 곧바로 긍정해 줄 거라 생각했던 에브라함은 의외로 조용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무는 모습에선 자신감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자네가 그렇게 걱정할 정돈가?"
"솔직히 말씀드려 이길 수 있는 확률은 50 대 50이라고 생각합니다."
승률 50 대 50.
만약, 이 말을 한 것이 에브라함이 본인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믿지 못했을 만한 일이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제국 최강의 기사가 고작 승률 반반을 논한다면 그 누가 긍정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처음 보는 이방인을 상대로 말이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보군."
"예. 마력을 조절해 맥켄시의 팔을 일격에 부러뜨린 실력을 봤을 때, 놈은 결코 제 아래가 아닙니다."
그제야 베이슈텔른도 새로 끼어든 변수가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걸 인지했다.
"이거…… 완전히 판을 새로 짜야겠군."
고민은 길지 않았다.
"거사에 참여한 수뇌부들을 전부 내 저택으로 모으게. 저녁 식사를 겸해서 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군. 물론, 황실에게 충성하는 놈들은 절대 모르게 하는 건 잊지 말고."
***
첨벙! 첨벙!
하수도를 따라 한참이나 간 끝에.
진혁은 제국 수도의 외각에 있는 골목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젠장……."
혹시라도 마력을 사용하면 잔향이 남을까 봐 그냥 왔더니, 발목까지 아주 제대로 젖었다.
"쯧쯧. 그러게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더냐. 하마터면 이 몸의 고귀한 날개에도 오물이 묻을 뻔했다. 냄새는 또 왜 이리 역한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구나."
어깨 위에 있던 엘리스가 손가락으로 코를 막은 채 불평을 늘어놨다.
사람이 죽어라고 고생하며 이곳까지 왔는데.
편하게 온 주제에 입만 살아 있다.
진혁이 엘리스의 날개를 살포시 붙잡았다.
그리고 물 위를 향해 서서히 손을 뻗었다.
"꺄아아악! 놔라. 자, 잠깐만! 발에 닿는다. 발에 닿는다고!"
엘리스가 온몸을 마구 버둥거렸다.
"제가 고오오귀하신 진조님을 몰라 뵙고 이런 누추한 곳으로 모셨네요. 정말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미안해.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야! 이거 옷 비싼 거야!"
"한 번만 더 하면 심폐 능력이 얼마나 좋은지 물속에서 직접 실험하게 해 줄 거야. 그러니까 조심하도록 해. 부탁 좀 할게."
"으, 으응."
"좋아."
진혁이 다시 엘리스를 어깨 위에 올려놨다.
한숨 돌린 엘리스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건데?"
"어떻게 할 거냐니?"
"제국이랑 같은 편을 먹으려고 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렇게 깽판을 치고 나오면 공공의 적이 되는 거 아니야?"
그래. 그렇게 생각하게 쉽겠지.
귀족들이 잔뜩 모여 있는 회의실에 난입해 한바탕 소란을 피웠으니, 지금쯤 수도 전체의 경비들이 이쪽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거다.
하지만.
"오히려 내가 벌인 일로 인해 한 쪽은 나에게 흥미를 갖게 되었을 거야."
제국은 현재 귀족파와 황제파.
2개의 진형으로 나뉘어져 있는 상태다.
방금 전 싸웠던 베인슈텔른 공작이나 맥켄시는 전부 귀족파에 속한 놈들이지만.
제국에서 함께해야 할 동아줄은 놈들이 아닌 황제와 황실에 충성하는 반대편 세력이었다.
무기력한 황제의 눈빛에 불꽃이 일어났으니, 가능성은 충분히 만들어뒀다.
"흐응. 그것까지 다 생각해두고 일을 벌인 거야? 생각보다 막 나가는 게 아니었네."
"넌 대체 날 뭐로 생각했던 거냐?"
"그거야 당연히 악…… 아니, 세상에 다시없을 훌륭한 계약자로 생각하지. 진짜야."
진혁이 손가락이 날개로 향하는 걸 본 엘리스가 다급히 말을 돌렸다.
"근데 황실 세력만으로 무림하고 싸우는 게 가능하겠어? 공작 쪽은 가뜩이나 무림하고 손을 잡았다며?"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우리가 무림 전체를 상대할 필요는 없어. 놈들 중에서도 이용해 먹을 수 있는 카드가 있거든."
지금까지 계속 부딪쳤던 쪽은 오대세가와 구파일방, 그리고 사파로 구성된 무림이었다.
그러나 여기엔 또 한 가지 세력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폐관을 끝낸 천마신교다.
"천마라…… 나도 몇 번 부딪쳐 본 적이 있는 놈인데. 그 녀석 진짜로 지독해. 아무리 너라고 해도 이용하기 쉽지 않을걸?"
"그거야 하기 나름이겠지."
녀석이 다루기 힘든 거야 물론 알고 있다.
하늘 아래 자신을 거역하는 자는 없어야 한다는 광오한 대사를 뱉을 수 있는 중2병 걸린 놈이 어디 고분고분 말을 들어먹겠는가?
그럼에도 진혁은 그 성격까지 계산 안에 둘 자신이 있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너는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네."
"새삼스럽게 뭔……. 그보다 슬슬 준비해. 목적지에 다 왔어."
아무리 수도가 크다고 해도 모든 경비병들을 따돌릴 순 없을 터.
이곳에 있는 동안 머물 장소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장소는…….
이미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진혁이 엘리스에게 주입하는 마력의 양을 조절했다.
우우우웅!
밝은 빛과 함께 엘리스의 신장이 160cm 가까이 늘어났다.
"여기야?"
"그래."
덜컹!
진혁이 수없이 늘어져 있는 판자촌 중 하나의 문이 열었다.
그러자.
"딱 맞춰서 오셨군요."
익숙한 목소리가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
4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방.
낡은 나무로 만든 테이블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이는…….
……회의장에서 만났던 펜하이머였다.
"안전가옥치곤 너무한 거 아닙니까?"
진혁이 툴툴거렸다.
방 4개에 화장실 2개 딸린 저택은 아니어도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명색이 제국 100인의 소드마스터 중 하나면서 씀씀이는 일개 경비병 수준이네.
"하하. 이런 곳이 오히려 더 눈에 띄지 않는 법입니다. 두 분 다 어서 들어오시죠."
펜하이머가 진혁과 엘리스를 안에 들이자마자,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누추하긴 해도 대신 먹을 건 충분히 갖춰 뒀습니다."
물, 와인, 맥주, 차 등의 마실 것부터.
치즈와 소시지, 베이컨 등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빵까지.
초라한 내부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엘리스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식도락이 가장 큰 행복인 그녀에게 있어 새로운 세계의 먹거리란 언제나 가슴이 뛰는 법.
"호오. 나쁘지 않구나. 이 치즈와 와인의 조합은 제법 만족스러워."
그렇게 엘리스가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입을 오물거리고 있는 동안.
펜하이머는 흡족한 눈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진심으로 부담스러운 눈빛이다.
"회의장에서의 퍼포먼스가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물론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요구였을 텐데, 진혁 님께서는 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 주셨으니까요."
압도적인 무력으로 근위 기사들을 찍어 누르고.
심지어 터프하기로는 제국에서 견줄 자가 없다는 맥켄시의 팔까지 부러뜨릴 줄이야.
"언제나 여유로웠던 에브라함 경이 그렇게 당황한 건 처음 봤습니다. 물론, 베인슈텔른 공작의 표정도 제법 볼 만했죠."
이 정도면 더 이상의 자격 증명 따위는 무의미한 일이리라.
"제가 감히 진혁 님을 시험한 걸 사죄드립니다. 다시는 진혁 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아이박 폰 펜하이머의 이름으로 맹세하겠습니다."
쿵!
펜하이머가 진혁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양손으로 잡은 검이 나무로 만든 바닥에 닿았다.
기사의 예를 갖춘 동작이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번엔 진혁이 당황했다.
'제국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던져버릴 수 있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고고한 기사가 무릎을 꿇으며 사죄한다는 것 따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고개를 드세요. 어떤 뜻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물론,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일어났다가는 지금 한 맹세에 대한 책임을 묻겠지만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이제 펜하이머 님께서 생각하고 계신 계획을 말씀해 주시죠. 황실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겁니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전력이 분열된 상황으로는 절대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심각한 이야기 나왔다.
본질을 찌르는, 그리고 냉정하게 현실을 판단한 결과이기도 했다.
"……아마 그렇게 되겠죠. 황실이 보유한 군사력으로는 절대 '거점'을 확보할 수 없을 테니까요."
무림과의 전쟁에 있어 첫 번째 핵심 포인트는 29층에 위치한 '거인(巨人)들의 성체'를 누가 확보하느냐는 것이다.
서로의 영역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는 주요 거점이었지만,
워낙에 거인들의 기세가 막강했기 때문에 두 세력 모두 쉽사리 이곳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승기를 잡기 위해선 저 지역을 확보하는 게 최우선 사항이었다.
"맞습니다. 언제 귀족 측에서 뒤통수를 칠지 모르고. 무엇보다 저희 쪽에서 실력 있는 소드마스터들의 정보는 모두 그 정보가 알려져 있습니다."
특기는 뭐고 즐겨 쓰는 검술은 무엇인지.
심지어 자주 가는 식당이 어디인지까지도.
이미 귀족들이 훤히 꿰뚫어보고 있다는 말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거늘 그게 상대에게만 해당한다면 그것만큼 절망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 임무를 진혁 님께서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펜하이머가 담담한 얼굴로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었다.
……응?
지금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