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일문일답(一問一答) (2)
"……지금 뭐라고?"
"탑 15층에 위치한 유적 '적그리스도의 무덤'. 그곳의 7번째 방으로 가는 루트를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가웨인이 담담하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적그리스도의 무덤.
15층의 보스 몬스터 '통곡의 마녀'가 거주하는 공간이다.
여기까지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정보였지만…….
문제는 녀석이 요구하는 것이 그 유적 안에 있는 7번째 방이라는 점이다.
탑 내에 3개 밖에 없는 성마소(成魔所).
바로, 성물을 통해 마왕과 마족을 현현시킬 수 있는 장소였다.
'이곳을 찾는다는 건 성물들의 위치를 전부 파악해 뒀다는 건가.'
아니면…….
'이미 현현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 성물들 정도는 다 모아 뒀다는 건가.'
어느 쪽이 됐든 그동안 잠잠했던 마인들이 단순히 놀고먹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내가 그곳의 위치를 어떻게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순진한 척하지 마시죠. 이미 당신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썩은 고인물이라는 것쯤은 저희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칭찬해 주는 건 고마운데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 정말로 모를 수도 있다고."
"하하. 여전히 시치미를 떼시는군요. 허나,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 진위 여부는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거짓을 고하면 그대로 천칭이 움직일 뿐.
진혁의 발아래 있는 톱니가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대답을 미룰 수 없다.
"무덤에 가면 각종 몬스터들의 석상이 잔뜩 방이 있는 방이 나올 거야."
"참회의 방…… 말씀입니까?"
"그래. 거기서 고블린 동상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 자세히 보면 녀석들의 배치가 십자가형으로 되어 있거든."
거기까지 말하자, 가웨인도 진혁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를 깨달았다.
"적……그리스도의 무덤."
거꾸로 매달린 십자가.
다시 말해 고블린 석상 역시 그와 똑같은 모양으로 재배치하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하면, 네가 원하는 방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진혁이 말을 끝맺었지만, 천칭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을 말씀하셨군요."
"쥐포가 되는 취미는 없거든."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 말은 진심이다.
비참하게 짓이겨서 죽는 건 안락한 노후를 원하는 삶과는 거리가 먼 최후였다.
그리고 물론.
놈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전해 주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고.
'나를 상대로 고유 능력을 따위를 믿은 게…… 네가 범한 가장 큰 실수야.'
가웨인의 고유 능력 '신뢰의 천칭'.
겉으로 듣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그 작동 원리는 초자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일종의 정교한 거짓말 탐지기라고 해야 할까?
심박수와 호흡, 체온 등을 통해 말의 진위를 판별하는 능력은 오히려 현대 기술 쪽에 가까웠다.
물론, 그걸 안다고 해서 저 고유 능력을 속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긴 하다.
인체가 기계도 아니고.
정확히 그 모든 걸 어떻게 조절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고인물에겐 가능하다.
그들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좋아…….'
진혁은 이미 자신의 생체 리듬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두근! 두근! 두근!
'빙하조형'과 '불의 원소'를 적절하게 배합해 체온을 유지하고.
'얕은 호흡'으로 호흡량을 조절했다.
스스로마저 속이며, 완벽하게 거짓말하기 위해 진실을 덧발랐다.
그렇게 새로운 진실이 만들어졌다.
7번째 방으로 가는 게 아닌, 바로 통곡의 마녀가 거주하는 방으로 이어지는 길이.
'가서 백날 마왕을 현현시키려고 해 봐라.'
그 목소리가 마계 근처에라도 갈 수 있나.
오히려 남의 집 안방으로 들이닥친 놈들에게 통곡의 마녀가 어떤 식으로 대접하는지 아주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다.
그나저나.
산 제물을 바쳐야만 복사 조건을 달성할 수 있어, 마녀한테 능력을 복사하는 건 포기하려고 했었는데.
이거 뜻하지 않게 산제물들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
'완전히 일석이조가 될 수 있겠어.'
예상치 못한 기연을 얻을 생각에, 진혁의 입꼬리가 연신 위로 올라갔다.
"이제, 내가 질문을 할 차롄가?"
"아, 예…… 말씀하시죠."
"마인 협회 내에서 '검은 사도'로 전직한 플레이어가 몇 명인지 말해."
"……!"
계속해서 눈웃음을 짓고 있던 가웨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있다.
이 경우가 바로 그 격언에 해당하는 상황이다.
가웨인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7번째 방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면, 우리도 어느 정도 정보를 넘겨주는 건 각오하고 있었건만…….'
설마, 진혁이 이렇게 깊숙한 것까지 파악하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검은 사도는 오직 마왕이나 상위 마족의 간택을 받은 이들만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으로, 마인들 외엔 그 존재 자체를 아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 마인 협회 내에서도 상위 간부들 사이에서만 알고 있는 히든 클래스가 바로 검은 사도란 말이다.
'그토록 조심을 했어도…… 여전히 방심하고 있던 건 이쪽이었단 말인가.'
이쯤 되면 놀라운 걸 넘어 자연스럽게 상대에 대한 공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지만, 지금 와서 자신의 실책을 책망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천칭 위에 있는 이상, 질문에 답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큭!"
이걸 말하게 된 순간 몇 명의 마왕과 마족들이 플레이어들과 계약을 맺었는지 밝혀지게 된다.
그럼에도 가웨인은 이 정보를 그대로 내뱉어야만 했다.
"셋……입니다."
셋이라…….
의외로 계약을 많이도 했다.
마인들의 수준과 지금까지 마계 놈들의 움직임을 고려해 봤을 때 대충 어느 정도 선에서 개입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이건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값진 정보다.
"좋은 정보 고마워."
진혁이 생긋 웃었다.
동시에 바닥에 있던 천칭이 서서히 사라졌다.
바로 그때.
웅성웅성!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음이 들렸다.
쇠들이 부딪치며 수십 개의 횃불들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이렇게 난동을 부렸으니, 제국에서도 바보가 아닌 이상 경비병들을 보낸 거겠지.
"아무래도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져야 할 것 같군요. 뼈를 주고 살을 취한 꼴이 되긴 했습니다만, 이번 일에 대한 대가는 다음에 진혁 님의 목숨으로 받아내 드리죠."
"음. 나는 가능하면 죽이지 않고 너랑 오래오래 만나고 싶은데."
"……그건 또 무슨 의밉니까?"
무슨 의미긴.
"너처럼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베어 버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야."
먹음직스러운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
겨울이 되면 밑둥까지 싹 잘라다가 땔감으로 쓸 수 있는 나무를 왜 벌써 죽이나?
최대한 두고두고 오래 써먹어야지.
"……그 말, 기억해 두겠습니다."
가웨인 역시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했기에, 진혁의 도발을 적당히 흘려 넘겼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났는지 발걸음을 멈췄다.
"아. 참.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리려고 했던 걸 깜빡할 뻔했군요."
가웨인이 슬쩍 진혁을 바라봤다.
"천유성이라고 했던가요?"
"천……유성? 그 녀석 이름이 왜 갑자기 나오는 거지?"
"별건 아니고. 제국에 오기 전 무림 쪽에도 잠시 들렸었는데, 그쪽에서 우연히 그분을 만났습니다. 정확히는 먼발치에서 본 것뿐이지만요."
천유성이 이 타이밍에 무림과 함께 있다.
그게 의미하는 건 단 하나였다.
***
한 줄기 부드러운 바람이 풀숲을 스치고 지나갔다.
향긋한 풀 내음이 코끝을 찔렀다.
"……."
한참이나 말없이 서 있던 천유성이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스윽…….
검이 허공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상대하는 것처럼, 검의 속도와 궤적이 조금씩 현란해져만 갔다.
머릿속에 떠오른 대상은 다름 아닌 진혁.
자신이 탑을 오르는 이유이자 이 세계에 남아 있는 목적이었다.
'……반드시 넘어선다.'
광기에 가까운 집착.
모든 걸 포기하고서라도 쓰러뜨리고 싶은, 그리고 그 대상에게 인정받고 싶은 열망이 전신을 가득 잠식해 나갔다.
부웅!
검의 속도가 한 단계 빨라졌다.
이제는 일 검 일 검에 무시무시한 마력이 깃들었다.
'추혼검'의 귀결이 펼쳐짐에 따라, 폭풍을 연상케 하는 검무가 펼쳐졌다.
콰콰콰콰콰!
거침없이 갈라지는 지형.
흙이 파이고 풀들이 잘려 나간다.
'아름답다'.
검과 하나가 된 천유성을 보고 그렇게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정신없이 가상의 대결을 한 지 몇 분이나 흘렀을까?
전신이 땀에 젖어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무렵.
"굉장하군요. 과연,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검성으로 불리는 이유를 알겠어요."
매화향과 함께 백설린이 다가왔다.
본래라면 곧장 칼을 부딪쳐야 했을 적대 관계였지만…….
천유성은 백설린을 보고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다 끝나면 내가 내려간다고 했을 텐데?"
"그랬죠. 하지만, 직접 한 번 보고 싶었어요. 비록 실전이 아니긴 하나 당신이 이토록 집착하게 만든 상대와의 대련을."
발자국의 깊이와 검이 지나간 흔적만으로도 상정한 상대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까지도.
"……넘을 수 없었다. 이번에도."
천유성이 검을 늘어뜨렸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단 한 번의 실수를 하지 않았음에도.
또다시 진혁을 쓰러뜨리는 덴 실패했다.
아무리 복기하고 또 복기해도 도저히 그 괴물을 뛰어넘을 수 있는 수는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그때 만났던 그 남자는 규격 외이긴 했습니다. 제대로 싸운다면 플레이어들 중에선 그자를 벨 수 있는 자는 없겠죠."
백설린이 담담하게 현실을 고했다.
꿈틀하고.
천유성의 이마에 심줄이 돋아났다.
그녀가 말한 플레이어들 가운데에는 자기 자신 또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너무 화내지 마세요. 그래서 저희가 천유성 님을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검의 묘리를 깨닫고 그 벽을 한 단계 뛰어넘는다면…… 당신 역시 인간을 초월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
강해지기 위해 무림에 왔다.
그 터무니없는 검격을 따라잡기 위해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어나는 최강의 랭커를 뛰어넘기 위해서.
'성장 기간을 더욱더 단축해야 한다.'
언제까지나 진혁의 그림자에 묻혀 있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가능하겠나? 이토록 짧은 기간 동안에?"
"아시다시피. 당신 정도 수준의 고수면 평범한 방법으론 벽을 뚫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절정과 초절정 그리고 그 위로 가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그나마 초기에는 혹독한 수련과 값비싼 영약을 통해 반강제적으로 벽을 뚫을 수 있었지만.
그 이상부터는 아무리 많은 수련과 영약을 들이 부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남은 건, 명상…… 혹은 압도적인 강자와의 대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뿐.
하지만.
"지금 이곳에 그 정도 고수를 데리고 올 수 있다는 말이냐?"
과거, 천유성은 화산제일검이라 불리는 매화검수마저도 꺾었다.
물론, 그때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앞으로도 한참이나 더 성장을 하긴 해야 했지만, 강진혁이란 괴물을 상대하려면 매화검수로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더 강한 상대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데.
백설린은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딱 한 분이 계십니다. 천유성 님은 무림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니 혹시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사박.
풀잎을 밟는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누군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본 순간.
"저자가 어떻게 여기에……."
천유성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
절대 이 자리에 올 수 없는 인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