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꺼지지 않는 모루 '오룬' (1)
파괴된 팔찌를 본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다.
'꺼지지 않는 모루'라는 이명을 지닌 오룬은 과거, 드워프 왕의 왕관을 손수 만들 정도로 위대한 대장장이였지만.
일련의 사건 이후, 그 지위를 잃은 채 왕국에서 쫓겨났다.
평생을 술에 의지한 채 인간들을 상대로 입에 풀칠이나 하는 게 고작인 상황.
그마저도 이렇게 강화에 실패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터라, 소수의 고객까지 등을 돌리고 있었다.
진혁이 재빨리 '탐식의 눈'을 통해 오룬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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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오룬
종족: 드워프
나이: 71세
레벨: 23
힘 23 민첩 13 체력 21 마력 1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직업: 강철의 대장장이
고유 능력: 금속의 숨결
스킬: Lv32 '제련(製鍊)', Lv31 '숙련된 망치', Lv31 '연속 강화', Lv31 '불 조절', Lv30 '공방 무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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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 조건: 드워프들의 왕국 '펜타 혼'의 '꺼지지 않는 모루'이자 '다섯 망치' 중 하나인 오룬. 이미 닳고 닳아 모든 것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철의 장인의 진심을 발휘하게 만드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가 가진 고유 능력과 스킬 중 하나를 복수할 수 있게 됩니다.]
[특이사항: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심각한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장인이라는 말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평균 스킬 레벨이 무려 30이 넘었으니까.
'개인 레벨에 비해 이 정도 숙련도를 보유한 자는 탑 전체에서도 손에 꼽겠지.'
그리고 그런 오룬의 능력을 복사하기 위해선 달성해야 할 조건들이 있었다.
좋아.
대충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에 그려진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진혁이 오룬을 향해 괜찮다는 듯 생긋 웃었다.
"살짝 실수를 좀 하셨나 보네요."
"크흠! 내 말이 말일세. 원래 실수를 잘 안 하는데 이번에는 컨디션이 영 안 좋았던 모양이구먼.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기회를 좀 줄 수 있겠는가?"
오룬이 뻔뻔한 말을 당연하다는 듯 내뱉었다.
이쯤 되면 양심에 털이 무성한 수준이 아니라, 브라질리언 왁싱 전문 숍도 영업 거부를 할 정도다.
하지만.
"오룬 님이 해 주시는 건데 당연히 기회를 더 드려야죠."
"허허 고맙네. 역시 자네는 참된 호구…… 아니 손님이야."
"대신, 저에게도 철을 다루는 기술을 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뭐? 철을?"
"예. 아! 물론, 일일이 알려 달라는 게 아니라. 속도만 조금 천천히 조절해 주셔도 충분합니다. 최고의 대장장이신 오룬 님이 무기를 강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초보자인 저에겐 억만금의 가치가 있으니까요."
결코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상대를 치켜세워 주고 더불어 합리적인 이유까지 갖다 붙인다.
엘리스가 준 팔찌를 박살내 버린 것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까지 있을 테니…….
거부하기엔 꽤나 부담이 될 것이다.
"허허. 전투 기술도 아니고 대장장이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사람은 처음 만나 보는군. 플레이어들은 다 자네 같은 건가?"
음…….
"플레이어들이 다 저와 같으면…… 아마 탑 전체가 지옥으로 변할걸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화석이 된 고인물들이 낄낄대며 뭉쳐 다니는 걸 생각하면.
"별종이라는 뜻이군."
"진정한 기술은 철을 다루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푸하하! 간만에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만. 어디, 잘 보고 한 번 배우게. 이 몸의 망치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그리 자주 오는 건 아니니까."
오룬이 광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재차 룬어가 새겨진 육중한 망치를 만지작거렸다.
"거…… 강화질하기엔 딱 좋은 날씨야. 왠지 이번엔 느낌이 좋네."
먹구름과 안개가 잔뜩 끼고 부슬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게 사나이 마음에 불씨가 지펴지는 기분이었다.
망치가 다시 한번 하늘 위로 높게 솟구쳤다.
당연히 재료로 사용되는 아이템은 엘리스의 몸에 걸치고 있는 각종 액세서리들이었다.
"아…… 안 돼. 그거 내가 가주를 물려받은 기념으로 만든……!"
엘리스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지만…….
"간드아아아!"
콰아아앙!
[강화에 실패하였습니다!]
['태양의 루비 반지'가 파괴되었습니다!]
눈부신 불꽃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룬은 굴하지 않고 재차 망치를 휘둘렀다.
"허이짜아!"
콰득!
[강화에 실패하였습니다!]
['델수스 호수의 심장'이 파괴되었습니다!]
"우오오옷!"
망치가 미친 듯이 위와 아래를 반복했다.
퍼걱!
그리고 그때마다 박살난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이곳은 지옥이다.
적어도 엘리스에게 있어서는.
[강화에 실패하였습니다!]
['무지개 보석 목걸이'가 파괴되었습니다!]
"내, 내 목걸이가아아! 이거 진짜 좋은 날에만 꺼내는 건데……!"
엘리스가 이성을 잃고 날뛰고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
대장장이의 손에 의해 파괴된 아이템은 결코 복원할 수 없었으니까.
***
오룬이 망치질을 멈추기까진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
총 11개.
강화에 실패해 박살난 액세서리 수가 무려 11개다.
아무리 낯짝이 두꺼운 오룬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얼굴을 들 수는 없었다.
"허억. 허억. 허억……."
오룬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목이 탔는지 테이블 위에 있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빌어먹을…… 3일만 젊었어도……."
"벌써 지치신 겁니까?"
"함부로 말하지 말게. 이게 얼마나 고도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인 줄은 알고 있는 건가?"
"대충 휘두르는 것처럼 보여도 3~4개의 스킬을 복합적으로 사용하더군요. 손목의 스냅이나 타이밍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게 적절했다.
그럼에도 강화에 실패한 건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트라우마.'
가장 중요한 순간.
스스로의 망치질로 인해 소중한 사람을 잃어야만 했던 비운의 대장장이.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상처를 뛰어넘고 전성기 때의 모습을 되찾게 해 주는 것이다.'
진혁이 대장간에 있는 망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오룬의 망치에 비해 크기는 훨씬 작았지만, 손에 착 감기는 맛이 일품인 망치였다.
"……제법 보는 눈이 있는 인간이었군. 한데, 그건 뭐 하려고 드는 겐가?"
"몇 번 망치질을 하시는 걸 보니 저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뭐라고?"
진혁의 말에, 오룬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지금까진 어떤 일이 있다 해도 너털웃음만 터뜨렸던 오룬이었으나 이 말만큼은 자존심을 건드린 듯싶었다.
물론, 그것 또한 진혁이 의도하는 바였지만.
"아무리 위대한 대장장이라고 해도 술에 쩐 데다, 망치에 감정까지 실려 있는데…… 제가 못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십여 번의 망치질을 통해 배울 건 전부 배웠습니다."
"어이가 없군.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당연히 진심입니다. 원하시면 내기를 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대가로 이걸 걸죠. 대신 오룬 님께서 질 경우 제가 원하는 걸 한 가지 들어주셔야 합니다."
진혁이 엘리스가 제국의 보물창고에서 가지고 온 와인들을 꺼냈다.
하나하나가 명주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보물들이었다.
"흐음. 설마, 지실까 봐 걱정되는 건 아니겠죠? 하긴, 이렇게 계속해서 실패만 하시는데 겁이 나시는 게 당연하긴 합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건 입꼬리를 13.5도 가량 올려주는 거다.
마치,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것처럼.
그리고.
그 도발은 정확하게 먹혔다.
"……좋아. 아무래도 자네에게 금속을 다루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 줘야 할 것 같군."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느슨했던 기운이 삽시간에 팽팽하게 조여졌다.
[오룬이 고유 능력 '금속의 숨결'을 발동합니다!]
과연…….
전투계열이 아닌 생산계열 거주자가 이토록 무거운 위압감을 뿜어내리라고 그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정상적인 대결이었다면 절대 오룬을 상대로 이길 수 없겠지.'
만능 잡캐에 가까운 진혁이었기에, 망치질 역시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았다.
바둑으로 치면 아마 4단.
게임으로 치면 다이아몬드 티어 정도?
아주 뛰어나진 않지만, 평범한 사람들 중에선 돋보일 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오룬과 비교하면 아예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이다.
아무리 오룬이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전성기 때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이 대결을 제안한 건…….
[복사 조건을 달성하셨습니다!]
[고유 능력 '금속의 숨결'을 복사합니다!]
애초에 이 대결에서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로든 말이지.
"종목은 이걸로 하도록 하죠."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레드 드래곤의 피'와 '송곳니'를 꺼냈다.
"까다로운 재료군."
오룬이 이맛살을 구겼다.
뭔가 쉽지 않은 게 나올 거라곤 예상했지만, 설마하니 이토록 어려운 주제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레드 드래곤의 피는 제국의 궁정 마법사들조차도 다루는 데 실패한 최상급 마법 재료였고.
그걸 통해 강화하고자 하는 '송곳니' 역시 상위 환수 펜타그리스의 송곳니로 만든 단검이었던 것이다.
"그래야 실력을 저울질할 수 있을 테니까요."
"……좋아. 그럼, 누가 먼저 하겠나?"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진혁이 앞으로 나섰다.
***
진혁이 망치를 잡는 걸 지켜보던 오룬이 콧방귀를 뀌었다.
'애송이 주제에 감히 철을 다루는 것에 대해 뭘 안단 말이냐?'
평생을 철과 불 속에서 살아 온 자신이었다.
뛰어난 재능과 쉬지 않는 노력.
그 두 가지가 전부 받쳐 줘야만 비로소 대장장이라는 장인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흠…… 그나저나 망치질은 나쁘지 않군.'
적절한 속도와 타이밍으로 스타트를 끊는 게 제법 그럴 듯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망치질인 것 같기도 했고.
'허어? 저것까지 할 수 있다고?'
오룬의 동공이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초보자라면 실수를 할 수밖에 없는 일련의 과정들을.
진혁은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듯이 주파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일종의 연륜미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제법이군. 제……법이야.'
하지만. 거기까지일 거다.
불의 온도를 조절하고 거기에 드래곤의 피를 다루는 건 아예 차원이 다른 영역이었다.
금속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호흡을 느껴야만 한다.
강력한 마법 재료가 철을 갉아먹는 걸 막기 위해선 그 마음까지 읽어내야만 한단 말이다.
'그걸 저 녀석이 해낼 리 없지.'
불가능한 일이다.
절대로.
하지만, 오룬은 결코 알지 못했다.
[고유 능력 '금속의 숨결'과 '불의 원소', '별의 가호'가 융합합니다!]
[융합에 성공하셨습니다!]
[고유 능력 '화룡의 숨결'을 획득하셨습니다!]
[융합된 능력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화룡의 숨결]
입수 난이도: SSS
내용: 불의 지배자이자 최강의 종족인 용족. 그들 중에서 화룡 '텐시아'는 불을 이용해 수많은 아티팩트들을 만들었습니다. 불과 철의 본질을 관통할 수 있는 힘, 그 이 능력은 그런 그녀의 정수가 담긴 결정체입니다.
세상에는…….
노력과 재능마저 찍어 눌러 버리는 고인물이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