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새로운 세력 & 중층부의 균형 (2)
[엘리스가 Lv?? '천륜(天綸)의 혈옥'을 발동합니다!]
가벼운 손짓과 함께 성벽을 타고 오르고 있던 거인들이 서서히 하늘로 솟구쳤다.
중력을 거스르는 대마법.
"크아아아!"
"모…… 몸이 멋대로!"
핏방울로 만들어진 구체들이 거인의 전신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거기에 피로 만든 꼬챙이들이 하나씩 허공을 가로질렀다.
퍼퍽!
퍽!
꼬챙이들이 정확히 관절 부위를 꿰뚫으며 살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치명상을 입히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운동 능력을 말살시키기 위함이지.
이어지 건 물리 법칙 따위는 씹어 버리는 압도적인 마력이었다.
순식간에 압축되는 구체.
콰드득! 우두두둑!
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체 따위가 존재할 리 없다.
6마리의 거인들이 전부 축구공만 한 사이즈로 변하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슬슬 이런 장면을 연출해 줄 필요가 있었지.'
자신과 언노운이 한 장소에 등장하는 장면.
모르긴 몰라도 이 영상이 업로드된다면 엄청난 반응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가뜩이나 전쟁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하려면 코인이 많이 필요했는데, 마침 딱 적절하게 조회수를 올릴 수 있겠어.'
진혁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발 늦게.
"허억. 허억. 허억."
"왔다. 성 위야."
템플 기사단과 백장미 기사단의 기사들이 성벽 위로 올라왔다.
"굼벵이도 아니고 이제야 오면 쓰나? 다 끝났으니까. 집에 가서 발이나 닦고 잠이나 자지 그래?"
진혁이 이죽였다.
"……건방진!"
"그만."
기사 하나가 도발에 걸려들 뻔했지만, 또 다른 녀석이 재빨리 제지했다.
알고 있는 얼굴이다.
"탈모르 경! 이야 여기서 다시 보게 되네요. 어째 저번에 뵈었을 때 보다 더 허전해진 것 같습니다만……."
"맥켄시다!"
맥켄시.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하도 다른 걸로 기억하고 있어서 그만 이름을 까먹고 있었다.
"어떻게. 회의장에선 좀 괜찮으셨습니까? 당당하게 나선 것치곤 너무 허접하게 당하시길래 좀 당황했는데…… 아! 죄송합니다.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그만 입 밖으로 나왔네요. 이놈의 입이 문제라니깐."
진혁이 손바닥으로 입술을 찰싹찰싹 때렸다.
꽤나 찰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이익!"
맥켄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복사 조건까지 필요한 멘트가 이제 하나였지 아마?
마침 딱 어울리는 문장이 하나 떠올랐다.
"너무 혈압 올리지 마세요. 푹 삶은 문어 구이에 술 한 잔 곁들여 먹고 싶어지려 하니까. 미끈미끈해서 젓가락으로 잡기가 좀 힘들 것 같긴 한데…… 흠."
진혁이 가상의 젓가락으로 맥켄시의 머리를 잡으려는 시늉을 했다.
"선 넘네."
옆에 있던 엘리스가 악마를 보는 듯한 탄성을 내뱉었다.
"이…… 빌어먹을……!"
스릉!
맥켄시의 검이 반쯤 뽑혔지만, 그러 것 따윈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지금 중요한 건 방금 전의 발언으로 인해 복사 조건이 전부 충족되었다는 것뿐이다.
[고유 능력 '고속검(高速劍)'을 복사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복사된 능력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제국이 보유한 위대한 그랜드 소드마스터 중 한 명.
에브라함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고속검'을 손에 넣었다.
'진짜 이건 마약보다 더 중독성이 강한 것 같다니까.'
수많은 강자들이 평생을 일궈낸 재능과 노력의 결정체.
그걸 날름 빼먹어 버릴 수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치트에 가까운 행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정함이니 뭐니 하는 개소리를 추구할 생각은 없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법이니.
그리고.
인류의 멸망을 막고 다시 한번 탑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선.
다른 이들은 감히 넘보지 못할 위치를 확고히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그때.
"후우우……."
분노로 전신을 떨던 맥켄시가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렸다.
"공작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얌전히 따라오시면 현상 수배를 취소하는 건 물론, 거인들로부터 제국을 지킨 것에 대한 보상까지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처음엔 협박이더니 이번엔 회유라……."
하긴,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흐름이긴 했다.
이런 위용을 보여 줬는데, 계속해서 적대만 한다면 그건 한 제국의 공작이 아니라.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머저리에 불과할 것이다.
"앞장서세요. 한 번 이야기나 들어보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맥켄시가 앞장섰고. 진혁과 엘리스가 그 뒤를 따랐다.
***
다시 찾은 회의장은 이전의 상처를 말끔하게 복원한 상태였다.
깨끗한 테이블과 의자들이 나열된 내부엔, 베인슈텔른 공작을 비롯한 귀족파의 거물들이 모여 있었다.
이번엔 펜하이머나 소수의 황당파 대신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 자리는 베인슈텔른이 따로 마련한 거겠지.
새삼스럽지만, 제국의 공작이 지닌 권력이라는 게 엄청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오게."
상석에 앉아 있던 베인슈텔른이 진혁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제는 다짜고짜 검부터 뽑으라 하진 않는군요."
"하하하 그건 오해가 좀 있어서 그랬어. 갑자기 낯선 이가 공간 이동을 사용해 이곳에 나타난다면 그 누가 불안해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거인들을 몰살시켜 버린 두 사람을 홀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네. 당연히 내 권한으로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 줄 테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려는 걸 보니…….
앞으로 이어질 대사가 전부 예상이 간다.
고생했다. 네가 최고다. 그러니 우리와 함께 으쌰으쌰 좀 해 보자. 내가 황제가 되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면 너도 든든하게 한 자리 챙겨 주겠다. 등등.
상투적이고 구린내가 풀풀 풍기는 그런 음모와 모략을 제안하겠지.
왠지 모르게 길고 긴 대화가 될 것 같으니, 서로의 시간을 아껴 주는 의미에서 그 대화를 대폭 축약시켜 주도록 하자.
"무얼 약속해 주실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 어떤 걸 제안해도 제 흥미를 끌 수 있을 것 같진 않네요."
"나는 제국 제일의 권력자일세. 부와 명예 혹은 탑에 등반에 관한 정보와 아이템들…… 아니면 그대가 원할 경우 귀족들의 영애들과 혼담을 주선해 줄 수도 있네. 장담하건대 자네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미녀들일 거야."
"호오. 그런 분들이라면……."
진혁은 그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옆에 있던 엘리스가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쿡 찔렀기 때문이다.
"컥……."
순간, 비명이 터져 나올 뻔했다.
말이 찌른 거지 이 정도면 전력으로 질주하는 중갑 기사가 랜스로 차징을 한 수준이다.
"……죽는다. 너."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는 건 덤이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생각 없습니다. 게다가 제가 어느 공작님과 함께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국이 무림보다 먼저 중요 거점을 선점하는 게 더 우선순위 아니겠습니까?"
진혁이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흠……."
"확실히 그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도 저 남자의 말에 동의합니다. 각하."
귀족들이 너도나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들이 제국을 선제공격한 상황.
이런 커다란 명분이 생긴 이상, 제국은 한 시라도 빨리 거인들에게 보복을 가해야만 한다.
베인슈텔른이 역시 그 점을 알고 있었지만, 무림과의 뒤에서 손을 잡고 있던 탓에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야. 우리도 거점의 중요성은 알고 있으나, 지금까지 그곳을 공격하다가 죽은 기사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는 있는 건가?"
"얼마나 되는데요?"
"소드마스터급만 해도 오십이 넘는단 말일세. 그것도 내가 개인적으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정예들이!"
음…….
"그냥…… 공작님의 거느린 부하들이 다 무능한 거 아닙니까?"
직설적인 말에, 공작이 입이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귀족들의 얼굴도 백지장처럼 하얗게 물들었다.
딱 한 명, 베인슈텔른의 옆에 있던 에브라함만이 피식 웃었다.
흥미로워 하는 눈빛이다.
묘하게 입꼬리를 비튼 채 이쪽을 보는 게 굉장히 부담스럽네.
"자네가 대단한 건 알겠어."
어금니를 깨문 베인슈텔른이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놈들의 성체에 직접 가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이곳에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건 그 누구라도……."
"해 보죠 뭐."
"응?"
"그 공략. 저희끼리 성공시켜 보겠다고요."
진혁의 말에 회의장에 또 다시 찬물이 끼얹어졌다.
***
밤이 깊어 갔다.
방이 10개가 넘는 특실로 안내 받은 진혁과 엘리스는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한 뒤, 근사하게 차려진 식사로 허기를 달랬다.
"오오오! 이런 화려한 디저트를 먹게 될 줄은 몰랐다. 제국 놈들. 의외로 마음에 드는 구석도 있구나."
엘리스는 성을 축소시킨 듯한 외형의 아이스크림을 바라보며, 두 눈을 반짝였다.
달달한 걸 좋아하는 습관은 언제부터 들은 건지…….
한때는 피를 탐하는, 그래도 나름대로 무게감이 넘치는 보스 몬스터였는데.
"그만 좀 먹어라. 이 시간에 그렇게 먹으면 살 쪄."
"아 왜. 먹는 것 가지고 뭐라 그래? 맛있게 먹으면 0kcal라는 말도 몰라?"
"넌 그런 표현은 또 어디서 들었냐?"
"뷰튜브 보면 다 나와."
젠장.
이젠 이 녀석이 진조인지 대학교에 갓 들어간 새내기인 헷갈릴 지경이다.
"많이 먹고 꼭 배탈 나길 바랄게."
짧게 혀를 찬 진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컷 먹고 마셨으니 이제부턴 쌓인 일을 처리할 시간이다.
개인 침대에 몸을 누인 진혁은 제국에 와서 찍어 뒀던 영상을 편집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영상이 업로드되었습니다.]
짧은 메시지와 함께 뷰튜브에 영상 한 개가 업로드되었다.
이미 진혁의 인기는 전 세계적으로 상상을 초월했기에, 영상이 올라간 지 1분도 되지 않아 조회수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아직 대형 길드들도 가 보지 못한 미지의 층계.
말로만 듣던 탑의 거대 세력들 간의 신경전과 전투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모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The King: 진짜 진혁은 보면 볼수록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대체 얼마나 강해야 저런 게 가능한 거지?
-치킨마요네즈 민트초코덮밥: 저글링 vs 울트라 싸움이었는데 갑자기 캐리어 떠 버린 느낌이지.
-테크라테스: ㄴㄴ. 저 정도면 제작사가 버그 유닛 하나 투입한 수준.
-소인족은 쇼듕해: 그 와중에 드워프 호들짝 놀라는 거 귀엽다. 대장장이 스킬까지 가지고 있으면 진짜 만능 아닌가?
-이웃집 도둑놈: 드워프도 제국 기사들도 궁정 마법사들도 전부 쩌리행으로 만드네. ㅋㅋㅋ.
-보통3종 라이센스: 저번에 유럽에 랭커 한 명이 제국이랑 무림 썰 푸는 거 한 번 봤었는데, 플레이어하곤 레벨이 다르니까 덤빌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하더만. 근데 진혁 보면 모든 게 다 귀엽다 귀여워.
하지만, 충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잠시 뒤 기하학 가면을 쓴 언노운이 진혁과 같은 성벽 위에 나타났을 땐……,
차가운 전율이 피부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걸 느꼈다.
-언노운이 미래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거 꿈 아니지?
-Japle longnight: 허…… ㅁㅊ.
-엄마의 등짝스매싱: 마블과 DC의 만남 아니냐?
-프리미어리그 다챙겨봄: 메시와 호날두의 만남이지.
-라떼는CCL: 플레이어 최강자 두 명이 한 자리에 있다니. 가슴이 웅장해지려 한다.
미칠 듯이 추가되는 댓글들.
조회수 역시 올라가는 속도가 심상치 않다.
'역시, 반응이 좋을 줄 알았어.'
진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두 플레이어의 만남.
이대로라면 내일 안에 조회수 500만을 달성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실제로 지금 명예의 전당에 올라와 있는 간다라 길드의 레이드 영상이 그 위치를 위협받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한창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바로 그때였다.
똑똑!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
만약을 대비해 누군가 접근해 올 경우 주위에 펼쳐 둔 결계가 반응해야 정상인데.
그걸 건드리지 않고 문 앞까지 왔다는 건…….
'단순히 룸서비스는 아니겠군.'
진혁이 반사적으로 송곳니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