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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219화 (220/653)

219화. 혈검(血劍), 백사(白蛇) (1)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오는 그림자들.

지금까지 여러 번 미행이 붙은 적이 있었지만, 이토록 숙련된 자들은 처음이었다.

'조금 더 숲속 깊숙이 들어가야지 모습을 드러낼 생각인가.'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건 좋은 의도는 아닐 터.

그렇다면 상대가 누구든 제압하고 그 이유를 밝혀낼 뿐이다.

진혁이 엘리스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넌 왼쪽 셋을 맡아. 티본은 나무 위에 있는 놈 하나만 맡아 주고."

나머지 오른쪽 셋과 아직 파악이 되지 않는 놈은…….

"내가 처리할게."

이번엔 적이 오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친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만큼 놈들 역시 절대로 들키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차 있을 거라는 점을 노린 계획이었다.

심장 박동 소리에 맞춰 호흡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허공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며,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푸른빛을 띤 송곳니와 한 자루의 쌍룡검이 나타났다.

엘리스와 티본도 각자의 무장을 꺼냈다.

"지금!"

진혁의 신호와 함께.

탓!

타악!

툭!

셋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

혈검(血劍), 백사(白蛇).

암황의 그림자라 불리며, 천마신교에서도 손꼽히는 살수 집단인 음영대(陰影隊)를 이끄는 대주이다.

처음 암황께서 플레이어 하나에 관심을 가지셨을 때만 해도, 백사는 코웃음을 쳤다.

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플레이어 따위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살을 베고 뼈를 깎는 수련을 매진해 온 자신들에 비하면 그들은 먼지나 다를 바 없는 미물들이었다.

'대충 끝내고 제국 소드마스터 몇 녀석이나 적당히 사냥하면서 몸이나 풀어야겠어.'

오랜 폐관으로 인해 근질근질한 몸.

제법 쓸 만한 실력을 가진 제국의 기사들은 음영대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대였다.

그런 기대에 부푼 채 느긋하게 목표물을 뒤따랐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합격진을 펼치기에, 적절한 공터가 나올 터.

거기서 단숨에 임무를 끝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헉!"

갑자기 목표물이 이쪽을 향해 움직였다.

빠르다.

상대는 이쪽의 위치를 완벽하게 파악한 상태였다.

"큭!"

"응수해라!"

백사가 본능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카카카캉!

콰아앙!

눈부신 불꽃과 함께 나무 위에 있던 그림자들이 지면에 착지했다.

그러나.

나름 기습을 가했음에도 중상을 입은 자가 단 하나도 없다.

과연, 정예다운 움직임이다.

'제법이네.'

진혁이 송곳니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최소한 두 명 정도는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 버리고 시작하고 싶었는데, 의외로 시작이 만만치 않다.

심지어 엘리스마저도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했으니까.

어디서 온 놈들인진 모르겠지만, 최소한 무림의 최상위에 위치한 집단임에는 틀림없었다.

물론, 현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음영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뒤를 밟는 걸…… 눈치 챘단 말인가."

백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기분 나쁜 기운을 잔뜩 뿌려대는데 눈치를 못 채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놀랍군. 제국 놈들은 우리가 수도를 활보하는 동안 눈만 뜨고 바라보고 있었거늘."

"그거야 너희가 멍청한 기사들이나 경비병들을 상대했으니까 그렇겠지. 기를 숨기는 게 제법이긴 한데, 그 정도론 황궁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는 아니야. 특히 너를 제외한 나머지는 더욱더 말이지."

"허어. 마치, 네가 기사들보다 위라는 듯한 말투로구나."

"아래는 아니지 않을까?"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에브라함과 몇몇 녀석들을 제외한다면,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지금 자신의 적수가 될 수 있는 놈은 없다.

워낙에 최적화된 루트로 성장을 해 온 덕분이었지만.

"……미쳤구만."

"대주님. 지금 저 녀석이 뭐라고 하는 겁니까?"

"검을 잡은 지 얼마나 됐다고. 어려서부터 죽어라고 검만 휘두른 기사들보다 자기가 낫다?"

누가 들어도 어이가 없을 발언에, 음영대 사이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미행을 눈치 챈 건 제법이었으나, 단지 기감이 뛰어날 뿐이다.

플레이어들에겐 고유 능력이나 각종 스킬들이 있었으니까.

남들보다 조금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지. 그것이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작 그것만으로 중층부의 거대 세력인 제국의, 그것도 그 제국의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기사들보다 낫다는 말은 기가 막힌 개소리였다.

"저런 헛소리나 하는 놈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니."

"대주님께서 나서실 필요도 없습니다. 깔끔하게 저희 쪽에서 해결하겠습니다."

"어디, 지금까지 어중간한 놈들하고만 상대해 봤나 본데, 오늘 제대로 쓴 맛을 보게 해 주마."

그러나 모두가 비웃은 와중에도 백사는 웃지 않았다.

"……."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진혁을 정면에서 마주봤다.

"과연, 어째서 그분께서 관심을 가지시나 했더니…… 이런 이유였군."

백사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옆에 도열해 있던 음영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타깝지만, 너희들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대, 대주님? 그게 무슨……."

"저희가 설마 저 애송이 하나 못 상대한다는 말씀입니까?"

당연히 불만 섞인 반발이 튀어나왔다.

지금까지 수많은 임무를 함께해 온 사이였으나, 백사가 이런 행동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진심이라는 방증이리라.

"그래. 너희는 꼬마 계집과 해골바가지나 처리해라. 저 녀석은 내가 맡겠다."

스릉!

백사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톱날 형태의 붉은빛 칼날이 예기를 발했다.

그리고 암(暗)이라고 새겨진 문자를 본 순간.

"암황……."

진혁은 상대가 어디에서 보낸 녀석들인지 깨달았다.

"그런 거였나."

이제야 수긍이 간다는 듯, 진혁이 작게 중얼거렸다.

실력이 심상치 않아서 평범한 놈들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그쪽에서 보낸 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특히나 이제 막 폐관을 끝내고 출두를 준비하는 천마신교에서 자신들의 주력 중 하나인 음영대를 보낼 줄이야.

'그 할아버지도 참 한결같네.'

진혁이 암황을 떠올리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과거, 시련의 탑에서 만났던 수많은 강자들.

암황은 그중에서도 몇 안 되게 진혁이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할 수 있던 인물 중 하나였다.

여러 의미에서 배울 점도 많았고.

허나, 백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웃어?"

"아, 미안. 잠깐 옛날 지인이 좀 떠올라서."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모르나 본데, 너는 양 대주에게 그분의 이름을 팔아 이득을 취했다. 이건 우리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

파츠츠츠!

백사의 검 끝을 타고 붉은색 기운이 솟구쳤다.

"암황껜 네 녀석을 몸 성히 데리고 가겠다곤 했지만, 반항한다면 의도치 않게 손속에 사정을 둘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적색 검강.

색을 지닌 강기가 강자의 상징이라는 걸 고려한다면…….

확실히 이 녀석 또한 무시하기 힘든 괴물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무림인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봐야겠네.'

하지만.

'색'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진혁이 양손에 각각 '송곳니'와 '쌍룡검'을 쥐었다.

[고유 능력 '검의 무덤'이 발동됩니다!]

쿠쿠쿠쿠쿠쿠!

서로 다른 길이의 검에서 검은색 강기가 일어났다.

녀석의 무공이 암황에게 뿌리를 두었다면. 검의 무덤은 검마의 혼에 그 뿌리를 두었다.

최강이자 최악의 재능을 지녔던 마두.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색이 숲 전체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이, 이런 미친……!"

"저 강기는 대체 뭐야?"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플레이어가 저런 힘을 가지다니."

엘리스와 티본을 상대하려던 음영대 그림자들이 순간 제 자리에 우뚝 멈췄다.

숨이 턱 하고 막히는 듯한 압박감이다.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살벌한 기운에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일어났다.

"크하하하! 역시 재밌는 놈이야. 근처에 있다가 말려들어 죽어도 책임지지 못하니, 너희들은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서 나머지 놈들을 처리해라."

백사가 광소를 터뜨렸다.

그것을 끝으로.

콰앙!

백사의 신형이 사라졌다.

눈 하나 깜빡일 시간조차 없다.

한 호흡 만에 거리를 좁힌 백사가 붉게 물든 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카앙!

……가볍다.

승부를 보려는 것보다는 시선을 끌기 위한 목적.

그렇다는 건.

'뒤!'

진혁이 반사적으로 검으로 후두부를 방어했다.

콰아아앙!

이번에는 묵직한 충격이 느껴지면서 몸이 반대쪽으로 튕겨 나갔다.

"반응 속도도 빠르고 강기 역시 수준급이군. 훌륭하다."

백사가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진혁은 입술을 살짝 비튼 채 이죽였다.

"내 쪽은 실망이야. 뭐랄까. 음영대의 대주치곤 첫 맛이 영 싱겁다고 해야 하나? 화끈한 마라탕인 줄 알고 기대했는데, 소스 부은 지 3시간 지난 탕수육 같잖아. 그래서야 암황의 그림자라는 말이 어울리긴 하겠어?"

"뭐라고……?"

"너무 열 받아 하지 말고. 잘 봐. 내가 조미료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려 주지."

진혁이 양 손에 쥔 검을 부드럽게 회전했다.

우우우웅!

검의 궤적을 따라 검은색 초승달이 나타났다.

[흑월야(黑月夜)가 발현됩니다!]

한 줌의 빛마저 삼켜 버리는 듯한 초승달이다.

"이게 매운맛이다."

불길한 강기 덩어리가 백사의 정면으로 날아갔다.

"흠!"

심상치 않은 기운이 담겨 있다는 걸 느낀 걸까?

백사의 눈매가 한 층 무거워졌다.

관자놀이에 힘줄이 불룩하게 튀어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정면으로 흑월야를 맞받아쳤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천지가 요동쳤다.

기와 기의 폭풍으로 인해 지면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졌다.

가히 천재지변이라 불릴 만한 일격이다.

"피해라!"

"마, 말려들었다간 다 죽는다!"

"훨씬 더…… 훨씬 더 멀리 떨어져야 돼."

조금 멀리 있던 음영대원들이 고함을 지르며, 두 사람의 사정거리에서 도망쳤다.

이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쿠쿠쿠쿠쿠!

지면으로부터 뿌연 연기가 솟구쳤다.

시야 또한 탁하게 물들었다.

바로 그때.

툭.

백사의 검 위로 하얀 손바닥이 닿았다.

"내가 암황의 수제자를 사칭한다고 했지?"

허면.

"이건 어떻게 설명할래?"

"설마……."

아주 짧은 찰나였으나, 진혁은 백사의 동공이 떨리는 걸 느꼈다.

모를 리가 없겠지.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암황의 독문 무공인 흑천마황공(黑天魔皇功)을.

"이런 말도 안 되는……."

당황스러운 감정은 이내 경악으로 변질되었다.

***

'끝이다.'

콰콰콰콰콰콰콰!

검을 관통한 충격파가 백사의 전신을 꿰뚫었다.

아니, 꿰뚫었다고 생각했다.

격동하던 기가 조금씩 갈무리되며, 대신 그 자리에 붉은색 기가 가득 메워지기 시작했다.

"……!"

뭔가 이상하다.

그렇게 느꼈을 땐 이미 늦었다.

퍼퍽!

화끈한 통증이 뇌수를 파고들었다.

위치상 절대로 올 수 없는 곳으로부터. 무언가가 진혁의 오른팔과 왼쪽 허벅지를 훑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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