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스승님을 뵙습니다.
"제안이라고?"
암황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예. 어차피 암황께서도 제가 자진해서 함께하는 걸 원하시지 않습니까?"
강압에 의한 복종과.
자신의 의지로 따라가겠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재밌구나. 내 앞에서 제안을 하려 하다니,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냐?"
쿠쿠쿠쿠쿠!
암황의 내공을 해방하자, 숲 전체가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천지를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전신을 옭죄어 왔다.
하지만.
진혁은 그 속에서도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제가 제안 드리고 싶은 건 합리적인 등가교환입니다. 제 편의를 봐주신다면, 저도 암황님께서 모르시는 정보를 넘겨드리죠. 또한 제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 한 가지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어이가 없군. 네가 아는 것 중에 우리가 모르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암황이 허탈한 실소를 머금었다.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실망한 듯한 웃음이었다.
'그래도 먹히는 패와 사용해서는 안 되는 패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놈이라 여겼거늘…….'
아무렴, 무림 최고의 정보 집단이라 불리는 천마신교의 정보부가 일개 플레이어보다 정보력이 뒤지겠는가?
허세를 부리는 건 좋으나, 그거에도 어디까지나 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하물며,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해 주겠다니.
이건 자신감이 아니라 만용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그 두 개를 혼동하는 수준이라는 건……. 안타깝지만, 내가 기대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는 인재로군.'
문과 무를 모두 갖춘 인물.
자신의 모든 걸 물려줄 만한 기재를 찾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암황은 쓰디쓴 입맛을 다신 채 진혁에 관한 관심을 접어두려고 했다.
그런데.
"제국이 보유한 마도 병기 '타이탄'."
진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구동의 핵심이 되는 '마력 재생석'을 제거할 수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실망감을 단숨에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아니, 단순히 날려 버린 수준이 아니다.
경악으로 일그러진 두 사람의 표정이 꽤나 볼 만하게 변했다.
"타이탄이 마력 재생석으로 움직인다는 건…… 천마신교 내에서도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데, 그걸 대체 어떻게……."
암황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뭐 하는 놈이냐. 네놈은……."
옆에 있던 백사의 입 또한 믿을 수 없다는 듯 쩍하고 벌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국이 보유한 '타이탄'.
각종 동물의 형상을 한 골렘의 일종으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대전쟁용 마도 병기다.
타이탄은 워낙에 단단한 갑주와 무지막지한 돌파력으로 상대의 방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전투의 효율을 족히 5배가량 끌어올릴 수 있었는데.
특히 소드마스터에 해당하는 기사들이 말의 형상을 한 타이탄에 올라 탈 경우, 무림이 보유한 절정급 고수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실제로 바로 몇 시진 전.
제국이 보유한 타이탄 기사단이 로드메리우스 평원에서 점창파의 정예 3개 분파를 괴멸시켜 버렸으니까.
그런 타이탄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천금과도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적어도 천마신교가 무림 놈들과 똑같은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반응을 보니,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알겠습니다."
"……제안이라는 것부터 우선 들어보지."
"먼저, 제가 천마신교에 가는 건 입교하는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계약에 의한 일시적인 관계라는 걸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계약이 끝나면 언제든지 나가 버리겠다는 말인가?"
"제가 원한다면요."
"그게 무슨……! 지존! 저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들어주실 생각이십니까? 게다가 네놈도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이냐! 우리가 동네 왈패들도 아니고 한 번 들어온 교인은 오직 죽었을 때만 본교에서 나갈 수 있다!"
백사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암황은 묵묵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다른 요구도 있나?"
"지존!"
"두 번째는 바로 백사와 음영대를 제 수족처럼 부르게 해 주십시오. 기한은 삼일이면 족합니다."
"어째서 저런 건방진 놈의 말을…… 으잉?"
목에 핏대를 세우던 백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 백사와 음영대는 암황님께 하듯이 저를 따라야 합니다."
"자, 잠깐만!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하하. 지존, 그렇지 않습니까?"
"허락한다."
두 가지 조건을 들어줘도. 타이탄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을 얻을 수 있다면 이득이리라.
암황은 그렇게 저울의 무게를 판단했다.
"그, 그럴 수가……."
"3일간 아주 자알 부탁드립니다. 우선 백사님은 눈에 힘부터 좀 빼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제가 기분이 아주 살짝 나빠지려고 하거든요."
진혁이 생긋 웃었다.
잘하자는 말은 진심이다.
삼일뿐이긴 하지만…….
아마, 암황의 옆에 있던 게 천국으로 느껴지게 될 거다.
"또 다른 조건이 있나?"
"마지막으로 한 가지. 월영을 돌려받고 싶습니다."
"……!"
진혁의 말에, 이번엔 잠자코 있던 월영이 움찔했다.
"허락하마. 저 녀석도 너에게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저는……!"
"되었다. 나도 그리 눈치 없는 건 아니다."
암황이 단칼에 상황을 종결지었다.
"이번엔 내가 한 가지 묻지. 이 제안을 내가 받아들일 거라고 확신한 이유가 뭐였나?"
타이탄이 굉장히 유용한 카드이긴 하지만, 세 가지 조건을 전부 들어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괘씸하다고 생각된다면, 언제든지 저울을 엎어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건, 암황님께선 반드시 저를 제자로 맞이하고 싶어 하실 테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우우우웅!
진혁의 손을 타고 검붉은 기가 일렁였다.
흑천마황공.
암황이 창시한 독문무공이며, 동시에 수많은 천마신교의 고수들 중 그 누구도 익히지 못한 무공이…….
……탑 밖에 있는 플레이어의 손을 통해 발현되기 시작했다.
***
한계를 돌파하며 끝없이 걸어온 수라의 길.
붉게 물든 손은 아무리 씻어도 혈향이 빠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강해지기 위한 길이었고.
그것이 본교를 위한 업이었으니까.
무림은 그런 그를 가리켜 암황이라 부르며, 경외와 두려움을 표했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행보는 어느 순간 멈췄다.
스스로에 대한 한계를 느껴버린 것이다.
흑천마황공의 12식을 모두 극성까지 익힌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
마(魔)의 13식.
그 벽을 돌파하는 데 필요한 게 단순히 재능과 노력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때. 암황은 절망에 빠졌다.
'시간…… 그래. 나에겐 남아 있는 시간이 없다.'
너무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올라왔기에, 환골탈태를 했음에도 수명이라는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자신이 할 수 없다면…….
그걸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제자를 찾겠노라고.
그렇게. 너무나 많은 실망과 절망 속에 적합한 인재를 찾아 헤매던 세월.
자신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사람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며 포기하려고 했었는데.
마침내.
……찾았다.
"하하…… 크하하하하하!"
암황이 미친 듯한 광소를 터뜨렸다.
"그래. 탑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었으니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던 거였구나. 그런 거였어."
"이렇게 좋아하실 줄 알았으면, 진즉에 좀 찾아올 걸 그랬나 봅니다."
"허어. 정말로 그러지 그랬느냐. 기다리다가 목이 빠질 뻔했느리라."
"저런. 불초 제자. 하마터면 처음 모시는 스승님을 팔척 귀신으로 만들어버릴 뻔했습니다."
"무어라? 지금 그게 스승에게 할 말이냐?"
"못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이것도 다 제자를 잘못 맞이한 스승님 업이지요. 그러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십쇼."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대화가 이어졌다.
옆에 있던 백사는 이런 암황의 모습을 생전 처음 봤기에,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천마신교의 두 호법 중 하나인 암황이 이토록 허술한 모습을 보일 거라고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아마 이 일을 나머지 대주들에게 말한다면,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느냐며 비아냥거릴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위화감을 느낀 건 암황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구나. 분명, 본좌는 오늘 너를 처음 보는데, 어째서인지 오랜 세월을 함께한 것처럼 네가 편안하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겠지.
함께했던 플레이어들이 모두 시련의 탑을 떠나 홀로 남겨진 터라.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라곤 탑 내부에 있던 거주자들이 전부였다.
함께 울고 웃으며 추억을 쌓아 왔기 때문에, 진혁은 알고 있었다.
암황이란 인물에 대해서.
물론,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순 없으니, 여기선 적당히 얼버무려야 한다.
"같은 무공에 뿌리를 둔 탓이겠죠. 스승님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한 무공입니다만……."
"흐음. 흑천마황공을 어디서 익혔는지까지는 지금 당장은 묻지 않겠다. 너에게도 너만의 사정이 있을 테니까."
중요한 건 뿌리가 아닌, 재능.
오히려 독자적으로 독문무공의 묘리를 깨달은 거라면 그 편이 더욱 좋다.
진혁이 그만큼은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기재라는 뜻이었으니까.
암황이 사소한 부분은 유하게 넘어갔다.
"정식으로 사제 관계를 맺는 건 지금 당장은 무리겠구나. 이토록 소란을 피웠으니 제국에서도 곧바로 눈치를 채고 조사단을 파견하겠지."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본교로 찾아 오거라. 약조한 대로 음영대를 3일간 허락하겠다."
암황이 진혁에게 독특하게 생긴 풀로 만든 피리를 건넸다.
"이걸 불면 일각(15분)이내에 음영대가 나타날 거다. 그리고 백사."
"예. 지존."
"이 녀석은 이제부터 내 수제자다. 앞으로는 그에 맞는 예를 갖추거라. 만약, 이후에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간 본좌가 직접 그에 대한 책임을 묻도록 하겠다."
"조, 존명."
백사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본능적으로 깨닫고 만 것이다.
이 3일이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보다 더 고통스러울 거라는 것을.
***
암황과의 일을 마무리한 진혁은 곧장 숲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뭐야? 왜 이렇게 늦었어?"
"마스터. 괜찮은 겁니까? 달그락."
티본의 뼈로 만든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음영대원들과 그 감옥 위에 걸터앉아 갓 끓여낸 홍차를 홀짝이고 있는 엘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나.
이렇게 될 거라곤 예상했지만, 너무나 일방적인 결과긴 하다.
마력의 제한이 걸려 있어도 이 정도면…….
완전히 본신으로 현현했을 때는 얼마나 강하려나?
언젠간 그 진가를 한 번 보고 싶다는 위험한 호기심이 들었다.
"여러 일들이 좀 있었어. 자세한 건 가는 길에 차차 말해 줄게."
"음? 근데, 뒤에 있는 애는 뭐야? 저 녀석. 새빨간 거짓말만 해 대는 너한테 질려서 손절해버린 거 아니었어?"
엘리스가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월영을 발견했다.
"넌…… 뭔 말을 그렇게 하냐. 새빨간 거짓말에 질렸다니."
"사실이잖아."
"……크흠! 그건 그렇긴 한데."
거짓말을 한 것도 사실이고. 그것에 배신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미안한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월영이 삐진 걸 풀어 주는 게 아니다.
거인들의 성체를 공략하는 게 급선무지.
[거인들의 성체.]
중요한 거점이지만, 제국과 무림 양측에서 이 거점을 쉽사리 손에 넣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성체 전역에 펼쳐져 있는 결계가 굉장히 골치 아픈 종류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어지간한 고인물도 혀를 내두르는 난이도긴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