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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231화 (232/653)

231화. 성채에서의 휴일 (3)

성채의 내실.

각종 음식이 잔뜩 차려진 식탁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관절 소리 그만 내고 빨리 좀 움직여라. 달그락. 마스터께서 서두르라고 하셨다."

"달그락!"

"다, 달그락……."

티본과 고대 병사들이 나비넥타이를 맨 채 종종 걸음으로 손님들의 수발을 들었다.

"음식이 입에들 좀 맞으십니까?"

진혁이 양측에 앉아 있는 고위 인사들을 향해 생긋 웃었다.

"……큭!"

움찔하고.

남궁천이 허리춤에 있는 검으로 손을 뻗으려고 했다.

진혁과 한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는 뜻이리라.

그러자 재빨리 백설린이 끼어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입에 맞네요. 환대에 감사드려요."

"뭐,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고마운데, 저기 자기 길드를 홀라당 말아먹은 분께선 백설린 소저와는 다르게 생각하나 봅니다. 하하."

"뭐, 뭐라고!? 중화 길드가 그 꼬라지가 된 건 전부 네놈 탓이지 않느……!"

"됐습니다. 지금 싸우려고 온 게 아니잖아요."

"암암 그럼요. 저는 싸울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는데, 왜 이렇게 다혈질인지 원. 차라리 튜토리얼 필드에 널려 있는 고블린이 더 참을성 있겠네."

"으, 으아아악!"

남궁천이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하지만, 백설린과 나머지 무림인들이 기를 쓰고 말린 덕에 최악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도발은 그쯤하시고. 저희를 이곳에 초대한 이유가 뭔가요? 정말로 식사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니겠죠?"

아직 메인 요리가 나오기도 전에 본론부터 캐물을 생각인가.

하여간, 식사 예절이라곤 없는 친구들이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어차피 다들 식사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 말씀드리죠. 아시다시피 두 세력 분들 모두 이 성의 자유로운 출입을 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전략적 위치가 너무 중요하니까요."

여기까지는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렇기에, 통보에 가까운 초대에 응한 거겠지.

"저는 양쪽 모두에게 기회를 드리려고 합니다. 더 높은 통행료를 제시한 쪽. 바로 그 쪽이 이 성채의 통행권을 가질 수 있게 해 드리죠."

"가…… 가격 경쟁? 지금 가격 경쟁이라고 했나?"

호비에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무 어이가 없었는지 두툼한 턱살이 파르르 떨렸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당연한 소릴! 그대는 세력 선택전 당시 제국의 편에 선 게 아니었나? 허면 당연히 우리에게 성을 양보해야지. 대가라니. 그게 무슨 망발인가?"

호비에르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침을 튀겼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

계속해서 웃고 있던 진혁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먼저, 한 번만 더 음식 앞에서 침 튀기면 그 주둥아리를 다시는 놀리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주…… 주둥. 아니, 너 지금 대체 뭐라고?"

"이곳은 내 성이니……."

츠츠츠!

싸늘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추라 이 말이다."

"허억!"

검이라고는 예우용으로 된 것밖에 만져 본 적 없는 호비에르다.

당연히 이런 지독한 기운에 노출된 경험 따윈 없었다.

덜덜덜!

호비에르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호기로웠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 자리엔 대신 겁에 질린 백돼지 한 마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허허. 강진혁 플레이어님. 저희 백작께서 실언을 한 모양입니다. 진정하시고 원하시는 걸 말씀하시면 저희도 겸허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노기사 한 명이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

알베르트 메커임.

철십자 기사단의 단장이며, 동시에 총사령관인 호비에르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자이다.

'강진혁이라…….'

엘베르트 역시 처음에는 제국이란 타이틀을 이용해 진혁의 기를 눌러버릴 생각이었다.

아무리 강한 플레이어라고 해 봤자 상대는 결국 단신.

결코 거대 세력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기껏해야 늑대 새끼인줄 알았는데, 완전히 착각이었군.'

아직 30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

그런데도 대체 뭐란 말인가. 이 위압감은?

수많은 사선을 넘어 닳고 닳아버린 절대 군주를 대하는 것처럼.

피부에 전해지는 따가운 기세에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다.

만약 이런 자가 정말로 분노해 검을 뽑기라도 한다면…….

'우리로는 무리다.'

백작을 호위하기 위해 이곳에 온 기사들만 서른이 넘었지만…….

함부로 덤볐다간 뼈를 묻게 되는 건 이쪽이 될 것이다.

"아, 알베르트 경. 지금 이자가……."

"알고 있습니다. 백작 각하. 우선은 강진혁 플레이어님이 하는 제안을 들어보도록 하죠."

상황이 진정되자 진혁이 테이블 위에 하얀색 종이 두 장을 꺼내 놨다.

"기회는 한 번. 서로가 제시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좋은 걸 적어서 저에게 제출해 주시면 됩니다."

"어중간하게 간을 보지 말라는 뜻입니까?"

"예. 바로 그런 뜻입니다."

이걸로 할 말은 충분히 전했다.

"그럼, 남은 식사는 천천히 즐겨 주세요. 잠자리는 티본과 나머지 친구들이 안내해 줄 겁니다. 아! 그리고…… 넌 잠깐 나 좀 보자."

"나, 나는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았다."

지목을 받은 천유성이 흠칫 몸을 뒤로 젖혔다.

1cm라도 더 멀어지고 싶은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몸놀림이었다.

"밥은 옥상에 가서 오붓하게 먹자고. 달밤을 아주 끝내주게 감상할 수 있는 야외 테라스가 있거든. 거기라면 사람 하나를 밖으로 밀어버려도 쥐도 새도 모를 거야."

"시, 싫……다."

천유성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선택권은 없어. 널 오늘 하루 빌리는 조건이 무림에게 내 건 조건이거든."

"그, 그럴 리가! 설마, 저 말이 사실인가?"

"죄송해요. 거절할 경우 출입 자체를 막아 버린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백설린이 말끝을 흐렸다.

좋아.

이제 백설린의 동의도 얻었겠다,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복수의 시간이 다가왔다.

벌서부터 얼마나 죽을 만큼 괴롭혀야 할지 손끝이 짜릿해지는 기분이다.

'메이드 복장 입히고 뷰튜브 1억 뷰 찍으면 봐주고 모자라면 모자라는 만큼 조회수 1당 1대씩 패야지.'

그 정도면 지금까지 쌓인 분이 조금이나마 풀릴 듯싶었다.

결정을 내린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오싹!

일전의 느꼈던 그 감각이 다시 한번 심장을 뚫고 지나갔다.

섬뜩하고도 이질적인 위화감.

'이건 설마…….'

진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찰나.

[빌어먹을 성주! 적이다! 이 성채 내에 공간 이동 좌표가 찍혔다고!]

백색 나무인 탄그라실이 전음을 통해 고함을 질렀다.

역시, 이 마력의 잔향은 굉장히 먼 곳으로부터의 공간 이동으로 인해 나타난 현상이었다.

기습.

그것도 매우 강한 놈이 오고 있다.

'허를 찌르려고 한 거면 가장 아플 때 찌른 셈이 됐군.'

한 차례 전투로 인해 탄그라실의 결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탄그라실의 결계들도 이번 대마법을 막아 줄 순 없었다.

이변을 느낀 건 나머지 내실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대체 무슨……!"

"간덩이가 부은 놈인가. 이 멤버에게 시비를 거는 놈이 있다니."

백설린과 남궁천이 검을 뽑았다.

"백작 각하. 저희 뒤로 모시겠습니다!"

"그, 그래. 내 몸에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해라."

제국의 기사들도 타이탄을 소환하며, 호비에르를 보호했다.

1초. 2초. 그리고 3초.

콰아아앙!

굉음이 성 전체에 울려 퍼졌다.

***

[게이트가 활성화됩니다!]

붉은색 상태창과 함께.

지면이 갈라졌다.

곧이어, 깊은 심연으로부터 전신이 화염과 용암으로 뒤덮인 해골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화륵!

화르륵!

아름다운 정원이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하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화염 해골의 입에서 검붉은 겁화가 흘러나왔다.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하필이면 이 녀석이 오다니.

심상치 않은 놈이 올 거라는 것쯤은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규격 외의 괴물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마인 협회에서 편법을 쓴 거였나.'

정신병동에서 빼앗은 '오물을 먹는 항아리'를 비롯해 몇몇 성물들을 아직 손에 넣지 못한 놈들이 차선책을 쓴 게 틀림없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끈 뒤, 통곡의 마녀가 있는 15층을 돌파할 히든 피스를 얻으려는 생각이겠지.

'나와 제국, 무림을 동시에 묶어 둘 수 있으니…… 둘 수 있는 수 중에선 가장 효율적인 수를 둔 셈이겠어.'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장궁, '어금니'를 꺼냈다.

저 녀석을 상대하기 위해선 이대로는 안 된다.

"엘리스!"

진혁이 엘리스를 불렀다.

"응! 여기 있어."

['브라함의 반지'에 주입되는 마력이 완화됩니다!]

진혁이 엘리스의 봉인을 한 단계 더 해체했다.

철컹!

금제가 풀리며, 엘리스의 신장이 5cm가량 커졌다.

"지금부터 해야 할 임무를 하나 줄 테니까. 잘 들어."

"하긴, 이렇게 안 하면 불바다가 되어 버리겠지. 그래서 내가 뭘 해 주면 되는 건데?"

"게이트를 열어 화염 해골을 현계에 구속시키게 하는 놈이 있을 거야. 그 녀석을 찾아서 제거해."

화염 해골에게 치명상을 입히려면, 우선 그 녀석을 이 층계로 불러온 네크로맨서를 처리해야 한다.

분명, 이 근방 어딘가에 숨어서 마력을 공급하고 있을 터.

바로 그 망할 마인 녀석을 제거해야지만 승산이 생길 것이리라.

그리고.

옅은 마기를 추적할 수 있는 건 이중에서 엘리스 하나뿐이다.

봉인까지 한 단계 해체해 뒀으니, 마력 감지력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상승했을 것이다.

"내가 없어도 버틸 수 있겠어?"

"최대한 시간을 끌어 봐야지. 가능하면 30분은 넘지 말아 줘."

그랬다간 애써 얻은 거점 전체가 잿더미로 변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성주가 된 축하연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역시, 너다운 이벤트로군. 어쩌면 권선징악이라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천유성이 옆에서 혀를 찼다.

"어째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 같다?"

"그럴 리가. 모처럼의 경사스러운 일이 망쳐져서 안타까워하는 얼굴이다."

저…… 저 입꼬리 올라가는 거 봐라?

'넌 진짜 죽었다. 끝나고 보자.'

어금니를 깨문 진혁이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엘리스는 성채 밖으로 날아갔고. 월영과 안드리아 역시 진혁을 따라 코앞에 다가온 전투에 대비했다.

퍼어어엉!

콰아앙!

탄그라실의 나무줄기가 잠시나마 화염 해골의 움직임을 막았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화산탄이 일제히 비산하자 식물들이 모조리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크오오오!"

마치, 지옥에서 나타난 악마가 요한계시록의 한 장면을 그대로 재연하는 것만 같았다.

창문가에 자리 잡은 진혁이 '어금니'에 시위를 걸었다.

파츠츠!

마력으로 만든 붉은색 화살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후우…….'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고 최적의 타이밍을 기다린다.

혈관을 따라 거칠게 날뛰던 마력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잦아들었다.

……지금이다!

[Lv8 '적색마탄(赤色魔彈)'이 발동됩니다!]

붉은 섬광이 점멸했다.

[Lv11 '빙하조형(氷河造形)'이 발동됩니다!]

그리고 그 섬광 위를 수백 갈래로 쪼개진 얼음칼날이 휘감았고.

[Lv9 '데이라이트'가 발동됩니다!]

마지막으로 눈부신 광휘가 그 모든 것들을 하나로 뒤덮었다.

무려 3개의 스킬이 합쳐진 저격.

거대한 마력이 화염 해골을 향해 뻗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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