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각자의 선택 (2)
'음영극살(陰影亟殺)'은 그림자를 이용한 고속 이동술을 기본으로 한다.
소리나 기척이 거의 없을뿐더러 단거리 공간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기술이다.
거기에 월영 특유의 '무음보(無音步)'까지 사용한다면…….
그 날카로움은 배가 된다.
카아앙!
일 초에 몇 합이 오고갔는지 식별할 여유는 없다.
눈부신 불꽃이 번뜩이더니.
카카카캉!
이내 검격이 폭풍처럼 몰아졌다.
"큭!"
남궁천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방금 전까지 앞에 있던 월영이 어느새 뒤쪽에 있는 그림자를 통해 기습을 가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했지만, 이번에도 아슬아슬했다.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었다면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남궁천이 Lv10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을 발동합니다!]
간단하지만, 모든 검의 묘리가 담겨 있는 남궁세가의 독문무공이 펼쳐졌다.
쿠쿠쿠쿠쿠!
가볍고도 경쾌한 검이 월영이 있던 자리를 휩쓸었다.
그러나.
월영은 그 검로를 모조리 간파해 버린 뒤였다.
스스슥…….
그림자로 이동한 월영이 재차 자세를 잡았다.
아무리 남궁세가의 장문인으로부터 직접 검을 전수받았다고 하더라도, 단시간 내에 월영을 돌파하는 건 무리다.
"젠장! 천유성!"
결국, 남궁천이 결단을 내렸다.
"멀뚱멀뚱 보고만 있지 말고 당장 도와라!"
혼자서 전부 죽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타인의 손을 빌릴 수밖에.
하지만, 어찌된 이유인지 천유성은 제자리에서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뭘 하는 거냐! 이대로 있다간 다 죽는단 말이다!"
남궁천이 재차 다그쳤지만, 천유성은 월영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천유성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넌…… 어째서 저 녀석을 그토록 믿는 거지?"
"나야말로 묻고 싶군. 내가 듣기로 당신은 주군과 오랜 시간을 함께해 왔다고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주군을 믿지 못하는 거냐?"
움찔하고.
천유성이 얼굴에 미미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 변화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녀석과 나는 서로 믿는 사이가 아니다. 검으로 쓰러뜨려야 할 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주군께선…… 너에 대해 여러 번 말하신 적이 있다. 차갑고 무뚝뚝하지만,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라고."
"……."
"천유성! 그딴 말에 현혹되지 말고 당장 놈을 쫓아 베어라. 그걸 위해 우리와 함께했던 것 아니었나!"
분위가 이상해지려하자, 남궁천이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네놈이 처음 우리에게 찾아왔던 날을 잊지 마라. 무얼 위해 모든 걸 던지고 무림과 손을 잡게 된 건지. 그걸 떠올리란 말이다!"
목적.
그렇다.
무림과 함께하기로 한 건, 결코 가벼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 차가웠던 결심을…… 천유성은 천천히 곱씹었다.
"……알겠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다.
콰앙!
천유성이 등을 돌린 채, 진혁이 있는 곳을 향해 자리를 박찼다.
***
화염 해골이 날뛰면서 생긴 불길 때문일까?
창문이 유독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창가에 쏟아지는 눈부신 빛 사이에선, 천유성을 기다리고 있는 진혁이 서 있었다.
"드디어 왔네. 뭐, 이렇게 될 거라곤 예상했지만, 타이밍이 좀 안 좋은 거 아니냐?"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현재 성채는 아포칼립스를 방불케 하는 상황.
지금 이 순간에도 제국과 무림의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심연에서 나오는 마수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나 역시 이것보다는 좋은 무대를 기대했다. 허나, 모든 게 마음처럼 되는 건 아니지."
천유성에게 있어 세상이 멸망하는 것보다 이 싸움이 훨씬 더 중요했다.
역시나 녀석다운 발언이다.
계단의 위와 아래를 마주한 채.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봤다.
……정적이 흐른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도 잘 알았기에.
쉽사리 검이 뽑히지 않았다.
바로 그때.
쿠쿵!
천장이 무너지면서 대리석으로 된 파편 하나가 둘 사이로 떨어졌다.
돌이 낙하하면서 만들어진 찰나의 공백.
[천유성이 고유 능력 '검의 노래'를 발동합니다!]
번개처럼 뽑힌 검이 파편을 깔끔하게 베어 버렸다.
콰콰콰콰콰!
잘린 파편 사이로 '송곳니'를 역수로 쥐고 있는 진혁이 보였다.
'검의 무덤'으로 인해 검게 타오르고 있는 칼날이 천유성의 검과 정면으로 격돌했다.
천유성이 어금니를 부러져라 깨물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태산과도 같은 고인물과 맞서 싸워 왔다.
쓰라린 패배의 뒷맛이 혀에 베일 만큼 지고 또 졌지만.
그 모든 경험들이 아무 의미가 없던 것만은 아니었다.
카가가각!
정면 대결을 하려는 듯 보였던 천유성은 순식간에 검기를 아래로 이동했다.
검면 타고 흘러내린 검이 진혁의 발등을 노렸다.
"……!"
진혁이 재빨리 궤도를 틀었지만, 천유성은 그 수마저 읽고 있었다.
"그래. 너는 항상 허를 찌르면 무게중심을 오른쪽으로 싣는 경향이 있지."
검이 뱀처럼 기묘한 각도로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어긋난다면, 오히려 송곳니에 먼저 당할 테지만.
그 타이밍을 실수할 천유성이 아니었다.
콰앙!
진혁이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버팀목이 되어야 할 오른쪽 허벅지에 가늘게 떨렸다.
바로 지금이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이긴다.'
단 한 번의 기회.
천유성이 쌓아 뒀던 마력을 모조리 토해냈다.
유형화된 푸른 기운이 검을 통해 완전히 발현되었다.
콰아아앙!
노도와 같은 기세의 검격이 폭발하자, 진혁이 정신없이 단검을 휘둘렀다.
카캉! 카아앙!
식은땀이 흐르고 호흡이 가팔라진다.
대조적으로 승기를 잡은 천유성은 더더욱 거칠게 날뛰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진 순간.
[천유성이 Lv14 '전장 선택'을 발동합니다!]
[천유성이 Lv14 '일기토(一騎討)'를 발동합니다!]
두 개의 스킬이 동시에 시전되었다.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무대를 고를 수 있는 '전장 선택'과.
1:1에서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일기토'.
모두, 이 승부를 위해 극한까지 갈고닦은 스킬들이었다.
[심상 세계가 펼쳐집니다.]
무채색으로 변한 세계.
붉게 타오르던 불꽃도, 미친 듯이 날뛰던 마수들도 없다.
진혁이 을씨년스러운 공간을 보며 혀를 찼다.
"너는 손속을 둔다는 표현 같은 건 모르는 거냐? 우리가 10대도 아니고 그렇게 날뛰다간 관절 나간다."
"완전히 밀리고 있어도 그 이죽임은 여전하구나. 알고 있나? 아무리 너라도 한쪽 다리에 부상을 입은 상황에선 나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럴지도 모르지. 확실히 이번엔 고생 좀 하겠어."
"고생을…… 좀 한다고? 그게 감상의 전부인 건가?"
"응."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자신감. 바로 그게 네가 오늘 내게 패배하는 이유다."
천유성이 검을 앞으로 뻗었다.
츠츠츠……!
공기가 급변한다.
피부에 와 닿는 화기는 지금껏 천유성이 보여 줬던 그 어떤 검과도 느낌이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검은 녀석의 검이 아니었으니까.
'설마…….'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추혼검무(追魂劍舞)'
추혼검을 만든 창시자, 추혼사영.
틀림없다.
'제10식(第十式)'
추혼검의 수많은 초식 중 그 정수가 담겨 있다고 일컫는 게 바로 10번째 초식이다.
분명, 완벽하진 않은 초식이다.
허나.
천유성은 그 검의 편린을 재현해 내었다.
'천뢰광폭참(千雷光爆斬)'!
콰콰콰콰콰!
콰아앙!
하늘에서 낙하하는 수십 줄기의 번개가 지면을 송두리째 갈아 버렸다.
얼마나 위력이 강했는지 '전장 선택'으로 인한 결계에 일부 구멍까지 생겼다.
"허억……. 허억. 헉."
천유성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됐다.
이거라면 제아무리 그 빌어먹을 놈이라고 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내…… 승리다!'
길고 긴 싸움의 종지부가 마침내 찍혔다.
그런데.
"천뢰광폭참이란 게 훌륭하긴 한데, 6성 이상으로 익히지 못하면 패턴이 단순해지거든. 차라리 낮은 식을 펼치더라도 완성도를 높이는 게 확률이 더 높았을 거야."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도 태연한.
아예 피해 자체를 받지 않은 듯한 말투다.
심지어 아까 전 거칠었던 호흡과 신음 소리마저 전부 사라져 있었다.
"이럴 수가……. 번개의 움직임을, 그것마저도 전부 읽었단 거냐?"
"솔직히 말해 살짝 놀랐어. 그동안 정말 열심히 수련했나 보네."
이 말은 진심이다.
이곳에서 추혼검의 10식을 보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으득!
"쓸……데 없는 동정하지 마라! 그딴 말은 집어 치우란 말이다!"
천유성이 재차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방금 전 공격으로 마력을 전부 소진해버린 몸에 위력과 속도가 실릴 리 없었다.
검이 허공을 갈랐다.
"수천 번."
부웅!
"수만 번! 검을 쥐었다. 손에 피가 배일 정도로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천유성이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었다.
그동안 쌓인 분과 피로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듯한 고함 소리였다.
"너를 쓰러뜨리기 위해 모든 걸 버렸다. 내 전부를 내던졌단 말이다! 그런데도…… 대체 어째서! 왜 매번…… 결과는 이렇단 말이냐……."
검끝이 흐트러졌다.
푹!
힘을 잃어버린 검이 바닥에 꽂혔다.
"나는……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정말…… 모르겠어."
천유성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뛰어난 재능과 그에 뒤지지 않는 노력.
그 모든 걸 갖고 있음에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
그 절망감은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족쇄와 같았다.
잠시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혁이 입을 열었다.
"넌 가장 오랫동안 나와 탑에서 티격태격했던 놈이야."
다른 이들이 모두 접고 떠날 때도.
가장 나중에까지 남아 싸웠던 찰거머리가 바로 천유성이다.
처음에는 그런 녀석이 귀찮기만 했지만…….
나중에 모두가 탑을 떠나 버린 뒤에는 그 귀찮음마저도 그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한 말이다.
고인물의 주위에는 그 누구도 남지 않았으니까.
"재능과 노력. 그 모든 걸 가지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지는 건 네가 너무 급하기 때문이야."
"급……하다고?"
"그래. 초조한 마음은 알고 있지만, 너무 한 번에 모든 걸 끝내려고 하지 마."
탑은 언제나 이곳에 있다.
그리고…….
"나 역시 언제나 여기 있을 거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 한번 탑의 정상에 가기까진 무수히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계속해서 나와 싸워 주겠다는 건가?"
"그래. 그러니 그만 울어. 명색이 과거에 검성이라고 불린 놈이 왜 울상을 짓고 있냐? 폼 떨어지게."
"누, 누가 울었다는 거냐!"
천유성이 재빨리 눈가를 훔쳤다.
저 녀석이 저런 모습을 보일 정도면 정말로 분하기는 분한 모양이다.
"추한 모습을 보여 미안하군. 그래. 어쩌면 내가 초심을 잃어버렸는지 모르지."
천유성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저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동기 부여가 됐던 시절.
얼마나 다양하고 참신한 방법으로 상대를 공략할지, 그리고 그게 과연 먹힐지.
기대에 부풀었던 그때가 떠올랐다.
"네게는 빚을 졌다. 정말……."
차마 뒷말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고맙다."
***
'이 정도 해 줬으면 슬슬 됐겠지.'
울고 떼쓰는 애를 달래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아슬아슬하게 힘겨루기를 해 주는 척 연기하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고.
그래도 이렇게 열심히 노력한 덕에 첫 번째 조건을 클리어 했다.
바로.
새로운 스킬을 얻기 위한 조건을 말이다.
진혁이 '탐식의 눈'을 통해 얻은 정보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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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천유성
성별: 남
나이: 28세
레벨: 62
힘 55 민첩 71 체력 45 마력 20 어두운 집념 90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보유한 코인: 16,540
직업: 검사(劍士)
고유 능력: 검의 노래
스킬: '추혼검(追魂劍氣)' Lv15, '선인의 눈' Lv14, '일기토(一騎討)' Lv14, '호신강기' Lv14, '전장 선택' Lv14, '추혼검무(追魂劍舞)' Lv17, '암막 결계' Lv13, '인내' Lv13, '집념' Lv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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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 조건: 같은 대상에 대해 2번째 복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생 당신 하나만을 쓰러뜨리기 위해 살아온 검성. 그런 검성의 목표를 잠시나마 잊게 하고 당신에게 손을 뻗게 만든다면, 천유성이 보유하고 있는 스킬 중 하나를 복사할 수 있게 됩니다.]
[부가 조항(상위 신격의 요청): 만약 검성에게 메이드복을 입힐 수 있다면, 앞으로 검성이 얻게 될 스킬 중 하나를 복사할 수 있게 됩니다.]
두 개의 스킬의 복사.
이건 절대 포기하지 못한다.
'하나는 달성했으니 이제 하나만 남았군.'
거기에 월영의 선택으로 인해 '음영극살'까지 복사하게 됐으니, 이번 싸움에서 무려 3개의 스킬을 손에 넣은 셈이 되었다.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나에게 빚을 졌다고 했지?"
"음?"
"왜 모르는 척을 해? 방금 전에 말했잖아. 빚을 졌다고."
"그, 그렇게 말을 하긴 했는데……."
그렇다면 이제 그 빚을 갚을 차례다.
지금 바로 말이지.
[아공간 인벤토리가 개방됩니다.]
[프랑스제 고급 레이스 메이드복을 선택하셨습니다.]
천유성의 얼굴에서 감동의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은 건 깊고 어두운 절망과 후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