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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239화 (240/653)

239화. 위대한 탐험가 '페시스'

시련의 탑에 존재하는 수많은 거주자들.

그중에서도 몇몇은 특히나 진혁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아타락시아 가문의 엘리스나 중간 관리자인 릭 헤네시, 천마신교의 암황이 그 대표적인 예였고.

그리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남자 역시 그들에 못지않은 인물이었다.

위대한 탐험가 페시스.

'나와 신격들을 제외한다면 시련의 탑에 대해 가장 많은 걸 알고 있는 자이지.'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무를 살피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페시스의 주목적은 그런 것 따위가 아니다.

기다리고 있는 거다.

탑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플레이어들을.

조금 더 정확히는…….

'나와 대화하기 위해서 말이지.'

모른 척, 시치미를 뗀 진혁이 페시스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스리안 묘목을 연구하시는 건가요?"

"오! 이스리안 묘목에 대해서 아시는 겁니까?"

"불치병 중 하나인 '육종암'을 치료해 주는 즙의 원료가 되는 나무죠. 아직, 완성 단계까지는 아니지만요."

"이야. 하하하. 이런 외지에서 다른 사람을 보게 된 것도 놀라운데, 가지고 계신 지식은 더욱 놀랍군요. 예. 바로 그것 때문에 이 묘목을 좀 살펴보는 중이었습니다."

아무렴 그러시겠지.

"이상하네요. 치료 목적이라면, 이 정도 크기의 묘목으로는 치료제를 만들 수 없다는 것 정도는 페시스 씨도 알고 계실 텐데요?"

진혁의 말에, 페시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을 거다.

시선을 끌 용도로 선택한 묘목의 가치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으니까.

더불어 자신의 본명까지 튀어나왔으니, 페시스로서는 첫 단추를 완전히 잘못 꿰맨 셈이 되었다.

"하하하. 이거 생각보다 훨씬 더 재밌는 분이셨군요. 과연, 기다린 보람이 있었습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어설픈 연기가 필요 없다는 걸 깨달은 걸까?

페시스가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나도 반갑다.'

생긋 마주 웃어 준 진혁이 '탐식의 눈'을 발동했다.

띠링!

경쾌한 음성과 함께 상대의 세부 사항이 적힌 상태창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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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페시스 단탈리안

성별: 남

나이: ???세

레벨: 50

힘 23 민첩 25 체력 26 마력 11 위기 감지 152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직업: 탐험가

고유 능력: 층계부유(層階浮游)

스킬: '제6감' Lv16, '지치지 않는 체력' Lv16, '다차원 지도' Lv15, '언변술(言辯術)' Lv14, '높은 호감도' Lv14, '뛰어난 외모' Lv14, '임기응변(臨機應變)' Lv13, '시너지(패시브)' Lv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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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 조건: 수많은 신격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페시스는, 탑의 탐험가이며, 동시에 탑의 소식을 퍼뜨리는 전령입니다. 페시스의 능력을 복사하려면 2가지 조건을 모두 클리어해야 합니다.

1. 잠시 후에, 페시스가 하는 '부탁'을 들어 주십시오.

2. 페시스를 동료로 영입하기 위해선, 당신이 얼마나 지금의 동료들에게 잘해 주고 있는지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팀워크를 강조하고 사기를 진작시킵시오. 일정 이상의 만족도가 충족되었을 때, 능력 복사와 동료 영입이란 두 가지 새를 모두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나 정도면 되게 잘해 주는 것 같은데…… 역시 시스템은 심오하네. 뭔가 인간들과는 기준이 다른가 봐.'

작게 고개를 갸우뚱거린 진혁이 다시 상태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역시나 고유 능력 부분이었다.

페시스의 고유 능력 '층계부유(層階浮游)'는 41층 아래에 한해, 각 층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사기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다음 층계로 넘어가기 위해 보스 몬스터를 처리하거나, 특정 조건을 만족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마냥 좋다고만 볼 수 없는 게 이 능력을 가진 자는 전투 능력에 관한 스킬들을 모두 포기해야만 하는 치명적인 단점 또한 지니고 있었다.

'전투와는 무관하게, 순수하게 탑을 탐험하는 것만을 즐겨야 한다는 거겠지.'

그래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고유 능력을 복사할 수는 없지만, 스킬 중에서도 쓸 만한 게 있었으니까.

'어디 보자…….'

진혁이 입맛을 다셨다.

스킬 '시너지'.

2개 이상의 스킬을 동시에 사용할 경우, 능력치를 10%만큼 상승시켜 주는 패시브형 스킬이다.

'나처럼 다중 스킬 사용자에겐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지. 이건 무조건 손에 넣어야 해.'

두근! 두근! 두근!

벌써부터 향상된 스킬들을 난사할 생각에,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이 애지중지 모은 능력들을 날로 복사해 버린다는 게 가장 짜릿했다.

좋아.

어떻게 할지 머릿속에 대충 각본이 쓰였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 저희를 기다리고 있던 겁니까?"

"하하……. 나쁜 의도가 있던 건 아닙니다. 사실, 여러 상위권 플레이어들과 거주자 분들을 만나 해야 할 일이 있었거든요. 진혁 님은 이번 주에 만난 다섯 번째 초대 손님입니다."

탑을 배회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인 탐험가가…… 사람들을 만나다라.

이건 꽤나 의외다.

아마 시스템이 말한 부탁이라는 것도 이것과 관련된 거겠지.

"어떤 종류의 초대 손님이라는 거죠?"

진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탑의 랭킹."

페시스가 예상치 못한 말을 늘어놓았다.

"……탑의 랭킹이라고요?"

"예. 진혁 님도 아시다시피, 시련의 탑에 존재하는 수많은 거주자들과 이제 탑 밖에서 합류하게 된 플레이어들 사이에는 그 순위를 비교할 수 있는 척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말이죠."

과거, 시련의 탑에서도 최상위 랭커들에 대해서만 어렴풋이 저울질을 했을 뿐이지, 정확한 순위는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실이 된 지금 새로운 기준이 생기려 하고 있다.

바로, 시스템에 의해서.

'재밌네. 이것도 달라진 점인가.'

등수 놀이는 이미 오래 전에 졸업했지만, 이건 꽤나 흥미롭다.

단순히 수치로 환산된 등수가 아니라 그 등수가 의미하는 영향력의 가치.

그건 앞으로 탑을 오르는 데 엄청난 요소로서 작용할 테니까.

'시스템과 신격들까지 연관된 셈이니, 랭킹이 높을수록 여러 가지 혜택 또한 함께 주어질 거다.'

지금 점거하고 있는 거점의 지명도를 올리고 방어 시설 등을 증강시킨다든가.

거주자들과 협상하는 데 있어서도 발언에 무게가 실린다든가 하는 등 말이다.

"허면, 우리를 기다리던 게 그 랭킹을 파악하기 위해서겠군요."

"하하. 그런 부분이 컸죠. 사실, 진혁 님이 이끄는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멤버들이 워낙에 쟁쟁하지 않습니까? 랭킹의 빈 부분을 채우려면 반드시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가 소수 정예긴 합니다만…… 그래서 그 랭킹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 조사에 협력해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당연히 해 드려야죠."

첫 번째 복사 조건을 달성하려면 어차피 부탁을 들어 줘야 한다.

물론, 그 사실을 말해 페시스의 호감도를 깎을 필요는 없다.

'너도 우리 회사에 강제 입사해야 할 운명이거든.'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중소 세력 '고인물 코페레이션'의 멤버들이 랭킹 측정에 편입되었습니다.]

[랭킹에 편입된 자는 총 강진혁,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 5계층의 보스 몬스터 안드리아, 천유성, ???(고구마), 테레사 드 로렌시아입니다.]

푸른색 상태창이 나타났다.

유연화와 이태민이야 둘째 치고 월영이나 티본, 그리고 5대 정령수도 랭킹에 들어가지 못했다.

마인 협회에서 나름 간부급에 위치한 멜레나나 드워프 대장장이 오룬의 이름 또한 보이지 않았고.

대체 기준이 얼마나 높은 거냐 이거?

진혁이 어이없어 했지만, 페시스는 잔뜩 흥분했는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놀랍네요. 이렇게 많은 분들이 랭킹에 포함될 줄이야! 요 근래 많은 분들을 만나 봤지만, 이런 멤버를 가진 세력은 처음이에요."

"많은 건가요?"

"다, 당연히 엄청 많은 거죠! 랭킹에 포함될 수 있는 순위는 1,000위까지거든요. 상층부의 거대세력들도 있고. 랭킹에는 포함되어 있지만, 제 권한으로는 만나 보지 못한 존재들도 있습니다. 이 안에 드는 것만으로도 엄청나신 거예요. 특히 플레이어 분 중에서 랭킹 안에 든 경우는 그리 많지 않거든요."

다급하게 떠들던 페시스가 한 마디 덧붙였다.

"물론, 업적이나 영향력 등 기타 다양한 요소들이 작용되기 때문에 순위가 곧 전투력을 뜻하는 건 아니지만,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정비례한다고 봐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탑 50층에 있는 '그놈'들도 랭킹에 있다는 뜻이겠군.

페시스 역시 완벽하게 모든 걸 알지 못하는 걸 보니, 시스템 측에서 전체적인 걸 관리한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그때였다.

"뭐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려? 아는 사람이기라도 한 거야?"

"모기!"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엘리스와 고구마가 다가왔다.

천유성과 가장 뒤에 있던 테레사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진혁과 페시스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 미안. 꽤 흥미로운 게 있어서 말이 길어졌네. 온 김에 너희도 한번 봐 봐. 이게 최신 도입되는 시스템이라고 하더라고."

진혁이 허공을 향해 턱짓을 했다.

"응? 뭔데 그래?"

"모기?"

"랭킹……이라고?"

"와아. 신기하네요."

모두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

[???고구마(28위),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29위), 강진혁(117위), 테레사 드 로렌시아(231위), 천유성(688위), 안드리아(815위)]

[다양한 변수들에 의해 시스템이 파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신뢰도 97.85%]

"자, 잠깐만! 이거 장난해?"

엘리스가 즉각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뭐가 이상해? 내가 볼 때 딱 적당한 것 같은데."

"적당하긴! 대체 뭐가 적당해! 내가 어째서 저 멍청한 파충류보다 순위가 낮은 건데?"

절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엘리스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모기!"

반면, 높은 순위를 받은 고구마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진혁의 품안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거야, 고구마는 본신으로 현현하면 세잖아. 너도 알지 고대종에 대한 것 정도는?"

"그, 그럼 나는?"

"넌 전성기 때나 그랬고.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겠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 잘나갔던 이야기를 하면 뭐 하나?

지금은 아닌데.

"그건 그런데……. 그래도 나도 제법 쓸모 있어. 제대로 하면 충분히 저 말미잘 같은 녀석보다 잘할 수 있다고."

"알고 있어. 뭘 그렇게 주눅이 들었냐. 너답지 않게."

진혁이 엘리스의 머리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순간, 엘리스가 얌전해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저는 은근히 랭킹이 높네요."

"테레사 씨는…… 그 '타락'했을 때 상승폭이 꽤 높은 평가를 받은 게 아닐까요?"

"아…… 그 친구 때문……이군요."

테레사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아직까지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닌 흑화 버전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듯 보였다.

이해는 한다.

그 버전은 솔직히 말해 나도 부담스러울 정도였으니까.

당사자는 매 순간마다 흑역사를 마주하는 기분이겠지.

마지막으로 천유성 또한 어금니를 드러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랑 네놈의 격차가 이렇게 벌어져 있을 리 없다."

"넌 바로 얼마 전에 대체 어떻게 해야 날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질질 짜더니 벌써 그건 까맣게 잊어버린 거냐?"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

와…… 이 자식은 머릿속에 지우개를 넣고 다니는 거냐?

저 머리로 어떻게 의대를 합격했는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아무리 봐도 수능 감독관 목에 칼을 들이민 게 더 현실성이 높아 보이는데…….

"됐다. 내가 말을 말자. 너한테 승복을 받아내려고 한 내가 멍청이지."

"흥."

천유성이 차갑게 몸을 돌렸다.

"역시, 진혁 님과 동료들 사이는 분위기가 좋네요."

"이게 좋아 보여요?"

"티격태격 대는 것도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일이거든요."

싱글벙글 웃던 페시스가 기지개를 켰다.

"그럼, 슬슬 서두르도록 하죠. 너무 늦게 도착했다가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주연 자리를 그들에게 뺏기면 안 될 테니까요."

"뺏긴다니…… 저희 말고도 누가 또 오는 건가요?"

"모르고 계셨습니까? 지금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에는 진혁 님 말고 또 다른 세력도 초대받았습니다."

페시스의 말에,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또 다른 세력이라면…… 설마?"

"예. 마지막 마족인 밸마리옐. 그를 제거한 분들도 지금 황궁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마, 진혁 님도 들어보셨을 거예요. '간다라'라는 이름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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