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상위 신격 (1)
하늘에서 붉은빛의 기둥이 떨어졌다.
[한정 능력 '혼신일체(魂身一體)'가 발동됩니다!]
쿠쿠쿠쿠쿠!
니라샤의 몸을 통해, 짙고 어두운 기운이 일렁였다.
파괴의 신 '시바'.
인도의 주신급에 해당하는 신격으로, 공격력에 관해서 만큼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최강의 신격 중 하나이다.
"후후……."
니라샤가 넘쳐흐르는 힘에 가늘게 몸을 떨었다.
몸에 깃든 시바의 힘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그 압박감은 플레이어나 거주자들이 견딜 수준이 아니었다.
"잊지 마세요. 공작님. 앞으로 제국에서 나오는 모든 수익의 10%는 저희 간다라 길드에 있다는 걸요. 그리고 그 '약속'까지 지켜 주셔야 합니다."
"무, 물론이네.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그게 문제겠나? 내가 책임지고 더 챙겨 주겠네. 무림 측에도 자네의 공로에 대해선 똑똑히 말해 주도록 함세."
베인슈텔른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등을 돌리려고 하는 이때, 이제 믿을 건 니라샤와 그녀가 이끄는 간다라의 랭커들밖엔 없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니라샤가 생긋 웃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우둑…….
우두둑!
걸을 때마다 지면이 바스러졌다.
"당신에 대해선 정말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죠."
언론, 매체, 커뮤니티, 뷰튜브, 명예의 전당.
모든 것들이 강진혁이란 이름으로 도배되어 온 지난 1년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그동안 해 온 수많은 업적들과 눈부신 활약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단연 독보적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분했다.
자신도 이렇게나 강한데.
자신도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을진대.
어째서 그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저 인간이 모두 독차지하는 것인지.
그것이 그저 분했다.
"허나, 그것도 여기까지입니다. 탑을 오르는 건 저희로 충분해요."
니라샤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신격의 힘을 가진 플레이어와 그러지 못한 플레이어 간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또한 현재 존재하는 모든 플레이어들 중 자신만큼 신격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자는 없다는 걸 알았기에.
니라샤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부드러운 미풍(微風)이 무덤 내부를 가로질렀다.
[상층의 존재가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느려진 시간과 무채색으로 물든 공간 속.
누군가 진혁의 앞에 나타났다.
짙은 은발의, 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미남자였다.
"호오?"
장난기가 가득 배어 있는 표정에선 흥미로움과 호기심이 잔뜩 묻어나왔다.
허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내 마력을 접하고도 별로 놀라워하는 것 같진 않네."
진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당신이 올 줄 알고 있었거든. 애초에 나에게 호의를 갖고, 또 힘을 빌려줄 수 있는 신격은 하나뿐이었으니까."
"호오. 내가 알기론 이집트 녀석들과 더 친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녀석들과는 그럭저럭 안면을 트긴 했지만, 친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라서 말이지."
호루스나 오시리스는 몰라도 아누비스의 배배 꼬인 성격을 생각해 봤을 때 절대 힘을 빌려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천유성에게 메이드복을 입히라는 조건을 내건 신격이 있었다.
얼핏 보면 장난처럼 보이는 조건이었지만,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닌 신격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무리를 한 게 틀림없겠지.
"호의를 베풀었다…… 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네. 너에게 흥미를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긍정적인 반응이다.
대부분의 신격은 금세 흥미를 잃거나 약속을 어기는 일이 다반사인데.
이 녀석은 적어도 대화를 계속 하려는 의지가 있다.
"보다시피 내가 좀 곤란한 상황에 빠져서 말이야. 이번 한 번만 도와줬으면 좋겠어."
"시바……의 힘을 담은 그릇인가. 확실히 플레이어가 상대하긴 벅찬 힘이야. 물론, 내가 나선다면 해볼 만하겠지만."
"도와주겠다는 뜻이야?"
"아니."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듯 말하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말은 모두 어림짐작에 지나지 않아."
조각난 정보들로 상대를 떠보는 건 선무당이나 하는 짓.
"나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내 진명(眞名)을 말해라. 그리하면 너를 도와주겠다."
과연.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가.
운으로 때려 맞추는 플레이어는 도와줄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정신병동에서 마계의 성물 중 하나인 '오물을 먹는 항아리'를 습득함으로써 너와의 연결점이 생겼지."
말이 좋아 연결점이지 상대 쪽에서 이쪽을 일방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하늘의 지명석'을 통해 이곳에 불러올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게 됐다.
'썩어 가는 심장'이라는 이명을 지녔으며 자신의 검은 사도로 전직해 함께하자고 제안했던 신격.
한 번 저주를 내려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로 인해 오히려 더욱더 흥미를 가지게 된 존재.
마왕 '베리엘.'
"그게 네 진명이다."
진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장난기 넘치는 남자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 나갔다.
"훌륭해. 역시 내가 눈독 들이는 플레이어답구나."
베리엘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졌다.
동시에.
멈췄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풀리기 시작했다.
***
거침없이 앞으로 향하던 니라샤의 몸이 멈칫했다.
오싹하고.
차갑고 끈적끈적한 기운이 등골을 따라 척수까지 퍼져나갔다.
방금…….
무언가 변했다.
"설마……."
니라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릴 리가 없다.
그토록 까다롭고 오만방자한 신격들이 고작 '하늘의 지명석'을 통해 부르는 것만으로도 응답하다니.
인도에 뿌리를 둔 자신조차 인도 신격의 가호를 받는 데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들었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 쉽게 해냈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 봤자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괴물 같은 놈. 재능이 있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단 말인가."
니라샤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 자리에 멈췄다.
"니, 니라샤 님과 같은 플레이어가 또 있을 줄이야."
"아니, 한 번의 시도로 신격의 인정을 받은 건 니라샤 님도 하지 못한 일이야."
"어떻게 저런 자가 존재할 수 있는 거지?"
"믿……을 수가 없어."
지켜보던 간다라 길드의 플레이어들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제국의 귀족들과 기사들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내 생전에…… 하늘의 지명석이 반응하는 걸 보게 될 날이 오다니."
"초대 황제 폐하의 인정을 받은 자의 동료다워. 정말이지…… 감탄밖에 나오질 않는군."
"우리는 저런 자를 적으로 삼으려고 할 뻔한 건가."
감탄은 경외로 이어졌으며, 그 감정은 이내 방관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당연한 일이다.
터무니없는 일 앞에서 인간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쿠쿠쿠쿠쿠!
[한정 능력 '혼신일체(魂身一體)'가 발동됩니다!]
하늘에서 또 하나의 빛줄기가 낙하했다.
니라샤의 것보다 더 짙고 농밀한 기운이 공간을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왜 그래? 자신 있게 나서더니, 갑자기 꼬리를 말아 버리고?"
"누가…… 꼬리를 말았다는 거냐? 어차피 네놈이 불러온 신격의 수준이라고 해 봤자 내 신격에 비해 그 격이 한참이나 떨어질 텐데."
니라샤가 품에서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금강저(金剛杵)를 꺼냈다.
황금빛 운무가 서서히 그 크기를 부풀렸다.
동시에.
파츠츠!
진혁 역시 마왕의 가호에 어울릴 만한 능력을 꺼냈다.
'달을 가리는 손톱'이 발현되자, 진혁의 양손을 따라 검은 발톱이 나타났다.
마치, 짐승을 연상케 하는 그런 흉흉한 발톱이다.
'장시간의 전투는 피차 무리야.'
상위 신격들의 대리전인 만큼, 시스템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을 터.
길어야 몇 합을 주고받는 게 한계리라.
그렇다면…….
-한 번 한 번에 전력을 쏟아붓는다.
-이번 한 번의 공격으로 쳐죽인다.
두 개의 생각이 하나로 합쳐졌다.
이어진 것은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는 충돌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
금강저와 발톱이 교차하자 엄청난 충격파가 발생했다.
바닥에 깔려 있는 석판과 대리석들이 모조리 뒤집어졌고, 천장을 받치고 있던 기둥들이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시, 실드를 펼쳐라!"
"피해!"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다급히 실드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그 후폭풍마저 버티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나마 무덤 내부를 지탱하고 있는 결계들이 남아 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여기 있는 인원 전체가 무덤 내부에 생매장당할 뻔했다.
"이, 인간들의 싸움이 아니야. 더 멀리 떨어져야 돼. 말려들었다간 뼈도 못 추리겠어."
"7서클 실드에도 이런 충격이라니."
"고서클 공격 마법을 정통으로 맞은 기분이야."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구경하는 것마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야."
"다 죽게 생겼는데,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저 폭풍 안에 있는 당사자들에 비하면…… 우리는 천국에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여기도 이럴진대, 저 안은 대체 어떤 상황인 걸까?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자욱한 연기 속.
두 명의 괴물은 여전히 무시무시한 기세로 서로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건…… 그렇지."
"맞는 말이군. 맞는 말이야."
***
카가가가각!
검은 발톱이 금강저의 측면을 훑고 니라샤에게 뻗었다.
하지만, 부드러운 살 속에 발톱이 파고들기 바로 직전,
우우우웅!
니라샤의 몸을 따라 황금색 막이 퍼졌다.
'만다라'. 그것도 최상위 랭크의 고유 능력이다.
"큭!"
진혁이 다급히 궤도를 틀었다.
저기에 말려들었다간 위험하다.
니라샤만이라면 몰라도 '혼신일체'로 강화된 지금은.
[치사하게 간다라나 펑펑 남발해대지 말고 제대로 덤벼라. 그래서야 '분노 조절 장애'라는 이명이 울지 않겠냐?]
베리엘이 혀를 찼다.
[마계의 추잡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가 싶었는데, 네놈이었나. 베리엘! 감히, 누구 보고 분노 조절 장애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내 이명은 '푸른목의 천둥'이란 말이다!]
[이야, 보이는 족족 다 부숴 버리는 놈한테 푸른 나무는 개뿔. 네 인중 색깔이 푸르딩딩한 거겠지.]
[뭐, 뭣이라? 이런 천박한! 역시 천 년 전에 전쟁에서 네놈의 마족들을 모조리 쓸어 버렸어야 했거늘.]
[진작 그러시지 그랬어? 그리고 아무렴 전날 술을 톤 단위로 마셔도 내가 너희한테 지겠냐?]
베리엘이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힘으로는 몰라도 말로는 아주 일방적으로 탈탈 털고 있는 중이다.
이 녀석도…… 나름 무게감 있는 마왕이었던 것 같은데.
'오물을 먹는 항아리'로 나를 관찰하게 된 이후에 뭔가 성격이 좀 변한 것 같다.
하지만, 지금 하는 저 말들은 그저 의미 없는 농담 따먹기가 아니다.
상대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도발이지.
[안타깝지만, 지금 너와 나의 연결 수준으로는 저 권능을 깨뜨릴 수 없다.]
"알고 있어."
그런 것쯤이야, 애초에 시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니라샤와 시바에게 맞선 건…….
……그걸 넘어설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똑똑히 지켜봐라.
탑의 정상을 봤던 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탑을 최초로 정복한 자를 위한 세 번째 특전'이 해방됩니다!]
이미 라인하르트의 완벽한 신뢰를 얻었기에, 두 가지 보상을 얻은 상태였다.
첫 번째는 라인하르트의 스킬 중 하나인 '외교'를 복사할 수 있게 된 것.
그리고 두 번째가 바로 '탑을 최초로 정복한 자를 위한 세 번째 특전'이었다.
'내용은 싸움 시작 전에 확인해 뒀지.'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계속되는 공방전으로 서로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고.
또 지금까지의 수준이 서로의 한계라며 멋대로 선을 그어 버리는 그 순간만을.
[……을 개방하시겠습니까?]
상태창이 나타났다.
"그래."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