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용살검(龍殺劍) '발뭉' (2)
'이, 이런 식으로 탐험을 하게…… 될 줄이야.'
페시스는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몇 번이고 현실을 부정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건 기존의 가슴 뛰는 모험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참상이었으니까.
"히이이익!"
"사, 살려 줘!"
"마, 마스터 뼈 맞았다. 진짜로 뼈 맞았단 말이다!"
티본과 고대 병사들이 통째로 얼어붙거나 활활 타 버리는 건 이제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신체가 반파되면 마력으로 열심히 복구해 다시 다음 함정에 투입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충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언데드로는 감당하기 힘든 상위 등급의 함정들이 나오자 진혁이 이번엔 새로운 소환수들을 꺼냈다.
정령사들이 꿈에 그린다는 5대 원소의 정령수들이었다.
"오……오오! 정령수들까지 계약을 맺으신 겁니까?"
페시스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좀처럼 보기 힘든 정령수.
그것도 5대 원소의 정령수들이 전부 한자리에 모인 건 굉장히 희귀한 장면이었다.
"아. 이 녀석들이요?"
"예. 어지간해선 인간과 계약을 맺지 않는 존재들로 알고 있는데, 다섯이나 계약을 맺은 플레이어는 처음 봅니다. 거주자들 중에서도 이렇게 친화력이 높은 분은 찾기 힘들거든요."
"배신하면 지옥을 맛보여 주겠다고……가 아니라. 따뜻한 사랑과 진심으로 대하니 다들 마음의 문을 열어 주더라고요. 그렇지 얘들아?"
진혁이 생긋 웃었다.
모두가 머뭇거리자, 진혁이 더욱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째 대답이 늦네. 혹시 내 말이 틀렸니?"
"으, 으응."
"우린 주인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
"오랜만에 만나니까 더 좋은 것 같아. 기왕이면 더 오랜만에 만나고 싶었는데……."
시선이 마주친 정령수들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학습된 공포라는 게 무엇인지 말해 주는 것처럼.
"봤죠? 다들 행복해하고 있잖아요?"
"……그, 그렇군요."
"그럼, 다시 안내 부탁드리겠습니다. 해가 뜨기 전에 돌아가려면 서둘러야 할 테니까요."
진혁이 콧노래를 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에도 수많은 함정들이 나타났지만, 페시스의 안내와 소환수들의 활약 덕분에 가까스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
험로를 뚫고 도착한 곳은 사방이 훤히 뚫려 있는 커다란 공동(空洞)이었다.
크기가 가늠이 안 되는 거대한 심연 탓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해진다.'
신화 속에서 활약하던 용살검의 마력이 전신을 자극했다.
두근! 두근! 두근!
진혁의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마지막 한 단계만 돌파한다면, 드디어 새로운 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화르륵!
십여 개의 '태초의 불꽃'이 일렁이자, 커다란 공동의 어둠이 걷혀 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수십 미터에 이르는 백골이었다.
마룡(魔龍) '파프니르'.
지그프리트에 의해 숨통이 끊긴 용의 사체가 보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기를 잃지 않고 있는 검이 꽂혀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되는구나.'
저것이 바로 용을 베어 버린 용살검, 발뭉이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파프니르의 사체 주위에 흐르는 독기가 심상치 않았다.
검에 눈이 멀어 멋모르고 다가갔다간 채 몇 걸음도 떼기 전에 핏물로 화해 버릴 것이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요."
진혁이 기대에 찬 눈으로 중얼거렸다.
검을 보자마자 지난 몇 시간 동안 고생한 게 씻은 듯이 녹는 게 느껴졌다.
"아직 가장 어려운 함정이 남아 있습니다만…… 진혁 님의 소환수들이 탈진 상태라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페시스의 시선이 소환수들에게 향했다.
"마, 마스터…… 제 죽음을 알리지 마십……."
"달그락."
티본과 고대 병사들이 만신창이가 된 채 바닥에 굴러다녔다.
음.
머리가 얼어 버린 녀석도 있었고. 팔 뼈와 다리 뼈가 바뀌어 버린 녀석도 있었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고생을 많이 시킨 것 같긴 하다.
조만간 칼슘이 듬뿍 든 우유 목욕이라도 좀 시켜 주든가 해야지.
"주인. 이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했던 게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어."
"콜록. 콜록."
"다들 조용히 좀 해. 머리 아파."
5대 원소의 정령수들도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쓰러졌다.
"모기이이이……."
고구마까지 혓바닥을 한쪽으로 축 늘어뜨렸으니, 좀 심하게 달려오긴 한 모양이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잠깐들 호흡 좀 가다듬고 있어."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저장해 둔 식재료들을 한가득 꺼냈다.
시련의 탑에서만 맛볼 수 있는 레인보우 슈림프, 쿼드러플 버섯, 대봉(大鳳)의 알.
검은 산맥의 염소에서 나온 치즈 등등.
그야말로 온갖 진미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거기에, 마정석 가루 3kg까지 준비해 뒀으니, 원기 보충하는 데 있어 최고의 영양식이 될 거다.
[Lv4 '이세계 식당'을 사용하셨습니다.]
종족을 초월하여 모든 이들이 즐길 수 있는 요리 스킬이 발동되었다.
이슬과 과일만 먹고 살았던 엘프들까지 만족시켰던 요리법이니, 소환수들의 입맛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으리라.
곧이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각종 요리들이 하나둘 완성되었다.
환상적인 비주얼과 향.
식욕이 당기다 못해 모두의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우리를 위해서 맛있는 것까지 준비해 주다니.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주인이 우리를 부려먹는 파렴치한 악덕 업주라고만 생각했는데……."
"주인이 겉으로만 그렇지 속은 따뜻하다니까. 헤헤."
"주, 주인. 나는 평소에도 주인을 세상에서 제일 존경했어."
"뭐래, 불도마뱀 따위가. 주인이 정령수 중에서는 내가 대장이랬거든? 다들 줄 똑바로 서."
운디네가 작은 양팔을 좌우로 파닥였다.
"마스터, 골다공증이 치료되는 기분이다."
"달그락."
티본과 고대 병사들도 칼슘 농도가 99%에 달한다는 오우거 밀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모기!"
고구마도 참지 못하고 가장 큼지막한 슈림프를 덥석 물었다.
좋아.
부려먹으려면 이렇게 부려먹어야지.
채찍만 쓰면 반감을 갖거나 삐뚤어질 우려가 있었다.
그렇다고 당근만 주면 배만 불러 나태해질 염려가 있었고.
결국, 가장 잘 조련하려면 채찍과 당근을 적절하게 섞어 써야 한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그리고 원래 심리라는 게 10번 잘해 주다가 1번 못 해 주면 욕을 하지만, 10번 못 해 주다가 1번 잘해 주면 고마워하는 법이거든.'
그렇게 모두가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짧은 휴식을 즐기는 사이.
['코인 거래소'가 활성화되었습니다.]
홀로 남은 진혁은 코인 거래소를 살폈다.
필요한 아이템은 총 여섯.
[페샨 산맥의 안개 나무 - 35,000코인]
[중급 정화석 - 15,000코인]
[강철의 속삭임(재료형) - 150,000코인]
[붕괴 촉진제(재료형) - 22,000코인×3개]
[황금 실타래(150,000km용) - 50,000코인]
[멜모르망 치료원의 연고 500g - 15,000코인]
전부 해서 331,000코인이다.
'더럽게 비싸긴 하네.'
현재 보유한 코인이 8만 3000코인 정도였으니.
약 25만 코인이 더 필요했다.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 있는 게 조회수가 잘 뽑혔어야 할 텐데…….'
진혁이 떨리는 마음으로 시련의 탑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제국으로부터 대공의 지위를 받은 플레이어가 있다?(Feat. 팬티가 웅장해진다)]
-조회수: 30,563,225회
-인기 순위: 1위
다행히 명예의 전당에 올라간 동영상은 엄청난 인기를 구사하고 있었다.
올린 지 6시간도 되지 않은 걸 생각한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수치다.
-만취한 루돌프: 아니 ㅋㅋㅋㅋ. 뭔 플레이어가 귀족 칭호를 밭냐? 이개 말이 됌?
-국립국어연구소: 한 문장 안에 맞춤법 다 틀리는 님이 더 말이 안 되네요.
-파랑이 좋겠어: 근데 진짜 대단하긴 하다. 그냥 귀족도 아니고 대공 지위야. 제국으로부터 독립된 지위를 보장받는 공국이라고!
-choigh-lonk: 지금 전 세계 길드 중에 저런 규모의 거점을 손에 넣은 데가 있나? 7대 길드나 다른 신흥 세력 다 포함해서.
-우리정글 유병단수하길: 하나도 없음. 최근에 길드들이 거점 알박기 하려고 난리긴 한데, 다들 몬스터에 다른 세력들 침공 막는 것도 허덕이는 중. 그나마 별로 좋은 거점도 아님.
길드들이 가장 혈안이 되어 있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탑에 존재하는 거주자들로부터 간택을 받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중층부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두 가지를 모두 달성한 길드는 극히 드물었다.
그마저도 변방에 위치한, 영양가라곤 하나도 없는 산골 거점이 대부분이었다고 하는 게 맞겠지.
-지구방위대 어벤져스: 당연하지. 애초에 그런 떨거지들이랑 고인물 코퍼레이션이랑 비교할 수준이 아님. 멤버를 봐.
-호날두의 탐욕, 라모스의 반칙, 베일의 유리몸: ㅇㅈ. 드림팀이 모인 거니까. 검성이나 성녀도 다들 스카웃 0순위 인재들임. 그리고 강진혁은 규격 외 괴물이고.
-사이버 렉카차: 루머이긴 한데, 인도 간다라 길드가 얼마 전에 제국 쪽 갔다가 개박살 났다고 함. 상대가 고인물 코퍼레이션이었고.
-고․코 팬클럽1호팬: 와, 진짜 대단하다. 그런데 영상 속에 언노운은 안 보이네. 어디 갔지?
-김치보끔밥: 처음에 잠깐 함께 한다는 제스처만 취해 주고 자기 할 일 하러 간 거일 듯. 최상위 랭커는 항상 바쁘잖아.
-새영언환: 글쎄. 아니면 언노운과 진혁은 한 자리에 있기 좀 애매할 수도 있는 거겠지.
쏟아지는 댓글만 봐도 지금의 관심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있었다.
'하하…… 조회수가 3천만이 넘다니.'
진혁의 입꼬리가 연신 꿈틀거렸다.
대박이다.
이 정도면 아이템을 사는 것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아니, 앞으로 더 다양하고 자극적인 영상들을 올려, 탄탄한 고정 구독자를 만들 수 있다면 이런 재료형 아이템들이 아닌 상급 성유물들까지 넘볼 수 있게 될 거다.
그런 미래를 그리자, 짜릿한 고양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왔다.
하지만.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저벅.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이거 정말로 놀랍군. 우리는 이 입구를 찾으려고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말이지, 그냥 뒤만 따라오니 발뭉이 있는 곳까지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진혁의 뒤쪽에서 낯선 음성이 들렸다.
가까이 다가올 동안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마력 탐지에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실력을 가진 놈이었다.
은색 머리카락과 붉은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
"뱀파이어……."
정확히는 엘리스와 마찬가지인 순혈의 뱀파이어, 진조가 틀림없었다.
"모기이이!"
"마스터!"
"주인. 기분 나쁜 냄새야. 짙고 불길해."
소환수들이 적대심을 드러냈다.
뱀파이어와는 이미 여러 차례 마찰을 빚어 왔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호오. 그래도 배신자와 계약을 맺었다고 바로 나에 대해 알아보는구나. 미천한 인간과 소환수들치고는 아주 제법이야."
"하루 종일 고귀하다라는 말이 입에 붙어 있는 녀석하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라고."
어쩜 뱀파이어란 것들은 하나같이 특유의 오만한 말투가 입에 붙어 있는지.
유아기 시절부터 단체로 조기 교육이라도 받는 모양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야 태생부터 다른 종과는 격이 다른 존재들이니까."
"그래서…… 그 격이 다른 그쪽은 어느 가문에서 온 거냐? 데카서스 가에서 또 다른 순혈종을 보낸 건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군."
진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만 맞추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내가 데카서스 가문에 속한 건 맞지만, 누가 나를 보낸 게 아니다. 내 스스로의 의지로 이곳에 온 거지."
스스로의 의지로…… 왔다?
설마…….
진혁의 동공이 급소도로 가늘어졌다.
"내 소개를 하도록 하지. 아뮬람 드 데카서스. 내가 바로 데카서스 가문을 이끄는 가주(家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