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데카서스 가(家)의 가주 (2)
치이이익!
자욱한 수증기가 뿜어졌다.
무덤을 수호하는 결계와 실드도 고대종의 브레스와 정령수의 겁화를 동시에 견디는 건 불가능했다.
"엄청나긴 엄청나네."
진혁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나마 고구마가 성체 버전이 아니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황궁을 아예 지하에 묻어 버렸을 것이다.
보기 흉하게 금이 간 벽과 완전히 파여 버린 지면만이 방금 전 공격이 얼마나 터무니없었는지를 말해 주는 듯싶었다.
"모기이이……."
"콜록. 콜록."
"숨이 다 막히네."
"다들 조용히 해. 머리 아파."
고구마와 정령수들도 모두 무사했다.
페시스와 나머지도 방금 전 공격에 휘말리지 않았고.
"[다차원 지도]로 그나마 안전한 곳을 찾아내서 다행이지. 진짜로 다 죽을 뻔했습니다."
"페시스 씨가 적절하게 안전지대를 찾아내 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다행히 그 예상이 맞았네요."
"믿어 주는 건 고마운데 다음부터는 말씀 좀 부탁드려요. 제가 심장이 약해서……."
페시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지막으로 오필리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진혁을 올려다봤다.
"왜…… 날 구해 준 거죠?"
버리려고 마음먹었다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이미 이용 가치가 사라졌기에, 굳이 힘을 낭비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진혁은 '검마제왕보'를 이용해 오필리아를 페시스가 찾아낸 안전지대로 대피시켰다.
"별 이유는 없어."
진혁이 어깨를 으쓱이며,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쌍룡검과 송곳니를 꺼냈다.
"협박을 했든 트라우마를 자극했든, 어쨌건 너에게 변절자의 팔찌를 이곳에 가지고 오게 하고 아뮬람의 뒤통수를 치게 한 건 나였으니까.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했으니 적어도 목숨은 부지하게 해 줘야지."
회사의 주인이 주주라는 말은 적어도 고인물 코퍼레이션에서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지만.
주주의 안전은 그 어느 세력보다 확실하게 책임지는 게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이념이기도 했다.
"……."
오필리아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진혁을 바라봤다.
역시나.
가장 절박할 때 손을 내밀어주는 건 동서고금과 탑 내외를 통틀어 가장 잘 먹히는 방법이다.
[오필리아의 호감도가 +10만큼 상승했습니다.]
거기에 '교감' 스킬까지 더해지면서 꽤나 쏠쏠히 호감도를 올릴 수 있었다.
호감도 10은 진심으로 고마워할 때만 오르는 수치였으니, 오필리아의 마음을 확실하게 잡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깔끔하네.'
충성스러운 노예는 언제나 환영이다.
특히나 본인이 자발적으로 목걸이를 차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그렇다고 너무 안심하진 말고. 아직 제대로 된 싸움은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방금 전 공격으로 뱀파이어들에게 제법 큰 피해를 주긴 했지만, 결코 치명상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기세를 조금 꺾고 실력이 떨어지는 놈들에게 부상을 입힌 것뿐.
주력이라 할 수 있는 흑익(黑翼) 칭호의 뱀파이어들과 아뮬람은 여전히 건재한 마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 예상을 대변하듯.
저벅.
연기 속에서 아뮬람이 걸어 나왔다.
마찬가지로 먼지를 조금 뒤집어썼을 뿐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이다.
그래도 브레스를 정통으로 맞은 건데, 저렇게 멀쩡한 건 살짝 어이가 없긴 하다.
"뭘 먹어야 너처럼 튼튼해지냐? 아침마다 드래곤 피라도 한 사발씩 마시면 되는 건가?"
진혁이 질렸다는 듯이 혀를 찼다.
"나야말로 묻고 싶구나. 뭘 먹어야 너처럼 막무가내로 이런 곳에서 브레스를 쏘게 만들 수 있는지 말이다."
"파동과 에너지, 열역학 등등 이래 봬도 딜 계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거든. 대충 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더라고."
"흐음. 계속해서 헛소리만 지껄여대는구나."
"헛소리라고 하는 걸 보니 뱀파이어들은 문과 출신만 있나 봐? 아니면, 내가 너무 어려운 단어를 말했나?"
진혁이 한 번 더 이죽였다.
그러자, 아뮬람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더 이상 말을 해 봤자, 상대의 술수에 말려들기만 한다는 걸 느낀 것이다.
"그런 식으로 알량한 도발을 해 대는 놈치고 제대로 된 놈은 만나지 못했는데, 어디, 네놈은 뭔가 좀 다를까?"
콰앙!
말보다 손이 먼저 다가왔다.
아슬아슬하게 붉게 물든 손톱을 받아쳤지만,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허공을 따라 붉은색 핏방울이 흩뿌려지는 게 보였다.
"피를…… 흘렸구나."
차가운 음성이 고막을 파고든 건 바로 그때였다.
[아뮬람이 고유 능력 '혈폭(血爆)'을 발동합니다!]
순간, 핏방울이 급속도로 팽창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아니, 착각이 아니다.
이건 위험하다.
진혁이 본능적으로 상대와의 거리를 더욱 크게 벌렸다.
퍼퍼퍼퍽!
콰아아앙!
공중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무슨……!"
진혁이 정신없이 몸을 좌우로 날렸다.
연쇄적으로 이어진 폭발은 속도도 속도였지만, 그 위력까지 상상을 초월했다.
한 번에 사람 하나는 통째로 날려 버릴 수 있겠는데. 이거.
날다람쥐처럼 빙그르르 회전한 진혁이 거리를 크게 벌렸다.
"도망치는 것 하나는 인정해 줘야겠군. 흑익에 소속된 혈족들마저 이 능력을 처음 상대했을 땐 그대로 반신이 쓸려 나갔거늘."
그 말대로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경험과 그로 인해 날카롭게 가다듬어진 반사 신경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고기 조각이 되어 버렸을 거다.
"빠르고 위력적인 스킬이긴 한데, 그걸 사용하는 놈이 어설퍼서 그런가? 그럭저럭 피할 만은 한 것 같아."
"이런 버러지 같은 인간 놈이. 감히 로드께……!"
"됐다. 이 녀석은 내가 직접 상대하겠다. 너희는 나머지를 맡아라. 고대종 쪽은 혹시 모르니 각별히 주의하도록 하고."
"아, 알겠습니다. 로드시여."
혈족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
콰아앙!
콰콰콰쾅!
굉음과 폭발이 이어졌다.
마력과 마력 간의 충돌로 인해, 내부는 이미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상태.
티본과 고대 병사들이 탱커 역할을 자처하며 앞에서 진형을 형성했고. 그 뒤에선 정령수들과 고구마가 원거리 지원을 맡았다.
데카서스 가의 혈족들 역시 워낙에 산전수전을 다 겪은 터라, 맹렬하게 날뛰며 방진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대규모의 집단전보다 더 치열한 건 진혁과 아뮬람의 일기토였다.
[Lv?? '천혈의 이슬'이 발동됩니다!]
축구공만 한 핏방울들이 진혁의 주위를 가득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 보여 줬던 능력을 생각한다면 이건…….
"죽어라."
콰콰콰콰쾅!
핏방울들이 동시에 폭발했다.
주위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폭발로 인해 비산한 핏방울들이 또다시 새로운 폭발의 매개체가 되었고.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폭발들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풍경을 뒤바꿔 버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호오?"
진혁은 그 속에서도 죽지 않았다.
'음영극살'을 통한 그림자 전이술.
종이 한 장 차이이긴 했지만, 혈폭의 사정 거리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이젠 이쪽이 반격할 차례다.
단숨에 아뮬람의 뒤를 잡은 진혁이 쌍룡검을 찔렀다.
푹!
그런데.
"……!"
……느낌이 없다.
액체 속을 찌른 그런 감각.
성유물인 쌍룡검에 '검의 무덤'을 통해 검강까지 발현했음에도 피해를 주지 못했다는 건가?
"말했잖느냐. 네놈이 대단한 건 사실이다만, 나는 그 격이 다르다고. 아무리 발악해 봤자 나에게 피 한 방울 보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우우우웅!
또다시 핏방울이 점멸했다.
이번엔 바닥에 있던 작은 피 웅덩이로부터였다.
'시간차…… 공격?'
분명,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느새 핏방울들이 급속도로 팽창한 뒤였다.
콰아아앙!
바로 머리 옆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휘청하고.
충격파로 인해 날아간 진혁이 몸의 균형을 잃고 무너졌다.
이명이 고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아뮬람의 두 번째 공격이 이어졌다.
원거리 공격이 아닌, 지근거리에서의 공격이다.
콰콰콱!
아뮬람의 손톱이 진혁의 눈앞에서 멈췄다.
정확히는 진혁이 아뮬람의 손목을 붙잡은 거지만.
"재밌군. 힘으로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 건가?"
같잖다는 듯 웃은 아뮬람이 팔에 힘을 더욱 줬다.
그러나 교착 상태는 깨지지 않았다.
부르르 떨리는 손톱은 여전히 진혁에게 닿지 못했다.
평범한 팔이라면 불가능했을 일.
허나, 그 팔이 거신족의 대영웅인 툼그레이브의 오른팔을 재현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거신 족의…… 팔까지? 이것 참. 네놈은 정말이지 몇 번이고 나를 놀랍게 하는구나."
"놀라긴 좀 이른 것 같은데……."
팔은 그저 강화를 위한 것일 뿐.
진짜는 강화된 팔을 통해 펼칠 또 하나의 무공이었다.
'흑천마황공(黑天魔皇功)'.
식(式)을 초월한 무형의 절초.
'천살침투경(天殺浸透勁)'.
투쾅!
손바닥을 통해 퍼져 나가는 이질적인 기운이 속에서부터 내장을 뒤흔들었다.
"크읍!?"
아뮬람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이건 효과가 있다.
확실하게 손에 전해지는 감촉이 달라진 게 느껴졌다.
물론, 이 공격 한 번을 성공시키기 위해 지불한 대가는 뼈아팠다.
진혁이 어깨를 따라 생긴 커다란 상처를 바라봤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게 이런 뜻일까?
그 와중에 카운터를 날린 아뮬람은 역시나 괴물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콸콸콸!
분수처럼 흐르는 피.
'별의 가호'로 지혈을 하고 있지만, 동맥을 다친 게 분명했다.
그래도.
드디어 목적을 달성하게 됐다.
"피 한 방울. 흘렸네?"
진혁이 손끝에 묻은 핏방울을 바라봤다.
선홍빛이 맴도는 액체가 이토록 반갑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모든 걸 쏟아 부어서 겨우 한 방울을 얻은 건가? 퍽이나 훌륭한 성과로구나."
"고작 한 방울이라…… 맞는 말이야. 내 꼴이 이래서야 성과라고 하기도 민망하긴 하지. 그런데, 그거 아냐?"
['변절자의 팔찌'의 발동 준비 시간이 모두 되었습니다.]
"내가 왜 하필 변절자의 팔찌를 손에 넣으려고 했을까?"
굳이 성물이 아니라, 뱀파이어들이 가지고 있는 보물이나 성유물 등을 가져오라고 할 수 있었음에도.
딱 꼬집어서 이걸 고른 건…….
변절자의 팔찌에는 숨겨진 특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구속한 자의 피를 팔찌의 보석에 닿게 할 경우…….
"너희가 회랑에 걸어 둔 결계는 그 힘을 잃게 된다."
['변절'과 '오염'의 능력이 개화합니다.]
타락한 자들의 회랑.
아타락시아의 권속들이 갇혀 있는 그 깊은 심연의 구덩이 속.
'브라함의 반지'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우우우웅!
나타난 것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붉은색 게이트였다.
***
저벅.
완전히 성인이 된 엘리스가 일렁이는 표면을 뚫고 걸어 나왔다.
처음 회랑에서 만났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눈처럼 새하얀 은발과 칠흑같이 검은 옷에선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
고고한 눈동자에 깃든 감정은 틀림없는 분노였다.
그리고 그 뒤로 벨루스와 나머지 혈족들이 하나둘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너는……!"
아뮬람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에서 금제가 완전히 해제되는 상황이 벌어질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뮬람 드 데카서스여. 나를 기억하는가?"
엘리스가 입을 열었다.
이것은 질문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대에게 던지는.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겠느냐? 네년을 구덩이에 봉인한 가주들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그래. 그랬지. 너희들 덕분에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심연 속에 갇혀 있었다."
엘리스가 억겁의 세월을 추억하듯 두 눈을 감았다.
달과 별의 아름다움도.
풀의 싱그러움과 바람의 부드러움도.
모두 잊은 채 살아 왔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는 자유보다도 더욱 간절히 원했던 건…… 바로 명예.
더럽혀진 아타락시아의 이름과 스스로의 긍지를 되찾는 일이었다.
비록 그것이 오롯이 자신들 스스로의 힘만이 아닌, 한 인간의 도움 덕분이라고 할지라도.
엘리스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눈동자가 피를 머금은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 이름은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
탑의 절대자 중 하나이자.
모든 가주들이 두려워했던 최강의 진조다.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피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엘리스라는 이름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이리라.
"아타락시아 가주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지난날의 죄를 묻겠다."
마력이 해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