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만렙 뉴비-252화 (253/653)

252화. 아타락시아, 순혈의 여제 (2)

"으으으……."

아뮬람이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오그라들고 안구가 타들어갈 것만 같다.

이 열기.

이 마력.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플레이어와의 계약으로 인해 고유 성창까진 사용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놈의 말처럼, 그런 페널티쯤이야 발목 잡을 수 있는 수준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아타락시아 최강의 혈통이란 말인가?

'그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격차가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어…….'

아뮬람의 머릿속이 온통 절망으로 얼룩졌다.

바로 그때.

화르륵!

엘리스의 손바닥에 화염으로 이루어진 단창(短槍)이 만들어졌다.

겁화로 둘러싸인 날이 앞으로 향했다.

[엘리스가 '테르시스'를 발동합니다.]

"받아라."

가속을 위한 추진체 따위는 필요 없다.

공기를 가르고 사라진 창이 아뮬람의 머리로 향했다.

순간적으로 피로 만든 장벽이 펼쳐졌지만, 단 1초도 단창을 막지 못했다.

유리벽처럼 깨지는 실드들.

퍼걱!

얼마나 파괴력이 강했는지, 머리통이 목에서부터 뜯겨 나갔다.

하지만, 아뮬람은 죽지 않았다.

뱀파이어의 지독한 생명력은 즉사가 당연한 상황에서조차 영생을 갈구했다.

너덜너덜한 상처 부위는 물론, 어느새 머리까지 완벽하게 재생된 아뮬람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허억……."

재생에 너무 많은 마력을 쏟아 부었다.

게다가 엘리스는 두 번째 단창을 쥔 채 공격이 이어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비, 빌어먹을.'

아무리 가주라고 하더라도 저 공격에 몇 번이나 적중당한다면 위험하다.

실제로 엘리스의 고유 성창에 다섯 명의 가주들과 혈족들이 모두 덤볐음에도 쉽사리 승기를 잡지 못했으니까.

이런 식으로는 무리다.

아뮬람이 냉정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죽어 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발뭉……!'

그렇다. 드래곤마저 베어 버린 저 마검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충분히 엘리스를 상대로도 승산이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진혁은 아뮬람의 시선이 발뭉에게 향하는 걸 눈치챘다.

사실 아뮬람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활로는 그것뿐이었다.

'엘리스와 싸우면서 부하들을 시켜 발뭉을 가져오게 하려 할 텐데…… 흠.'

문제는.

발뭉 주위에 퍼져 있는 시독(屍毒)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지독하다는 점이다.

"끄으으으……."

"컥! 커억."

실제로 데카서스에서 보낸 사냥개들이 발뭉을 노리려다가 피를 쏟으며 고꾸라졌다.

내성이 강한 뱀파이어들이 버티지 못한다는 건, 평범한 플레이어는 몇 초 만에 한 줌의 핏물이 되어 버릴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이전에 구매해 둔 아이템들을 꺼냈다.

페샨 산맥의 안개 나무.

멜모르망 치료원의 연고 500g.

안개 나무는 보통 고급 장식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멜모르망 연고는 최고급 보습 크림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얼핏 보면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두 개의 아이템.

하지만, 이 두 개를 적절하게 섞어 쓰면 독에 내성을 지닌 약을 만들 수 있다.

'3.25:1.758이었지 아마?'

오랜만에 하는 거라 정확한 비율은 기억나지 않지만…….

상관없다.

숫자는 외우지 못해도 몸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 5mg을 획득하셨습니다!]

성공이다.

이 배합법은 아직 탑에서도 알려져 있지 않은 탓에, 시스템조차 '정체를 알 수 없다'라는 수식어로 대체했다.

꾸덕꾸덕하고 무색무취의 액체를 전신에 고루 바르자, 코끝을 찌르던 시큼한 냄새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거기에.

[고유 능력 '천독(千毒)'이 발동됩니다.]

독을 다루는 건 물론, 독에 대한 이해도를 올려 주는 천독까지 두름으로써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이제 기다리만 하면 된다.'

정확히는 놈이 '그 스킬'을 사용하는 걸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진혁이 차분하게 둘의 전투를 지켜봤다.

콰아앙!

퍼퍼퍽!

교차하는 수십 개의 마법들과 피로 만든 고유 능력들.

과연, 두 절대 간의 싸움은 그 수준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하나하나가 보스몬스터의 전력이라 해도 좋을 공격들을 마구잡이로 연사해 댔으니까.

1분, 2분. 3분…….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속된 치열한 전투 끝.

[아뮬람이 '블러드 하운드'를 소환합니다.]

피로 만든 지옥의 사냥개들이 나타났다.

마침내 기다리던 타이밍이 왔다.

탓!

……지금!

'검마제왕보'를 사용한 진혁이 단숨에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도약했다.

앞으로.

발뭉이 있는 곳으로.

***

"음?"

"저놈은……?"

아뮬람은 엘리스에게 온 신경을 쏟아 붓고 있었지만, 다른 뱀파이어들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사냥개들이 냄새를 맡았다.

진혁이 발뭉을 향해 질주하는 걸 감지한 것이다.

"발뭉을 노린다고?"

"멍청하긴! 저긴 우리들도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곳이다."

비웃음에는 곧이어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인간에 대한 기대가 배어 있었다.

그런데.

툭. 탓. 투욱…….

너무나 가볍게 앞으로 뻗어나가는 진혁을 본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독이…… 통하지 않아?"

"어떻게 저럴 수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놀랄 시간 따윈 없다.

"마, 막아라!"

"더 깊이 들어가게 해선 안 돼!"

지금이라면 아직 자신들도 견딜 수 있는 수준일 터.

허나, 더 나아가 독기가 절정으로 달하는 곳마저 통과시킨다면, 고스란히 발뭉을 넘겨줄 수밖에 없다.

뱀파이어들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역시, 그냥 보내 줄 생각은 없나 보네.'

진혁이 힐끗 뒤를 바라봤다.

바로 목덜미까지 따라붙은 뱀파이어들이 검붉은 칼을 휘두르려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카아아앙!

누군가 끼어들었다.

엘리스의 오른팔인 벨루스와…… 데카서스에 소속된 오필리아였다.

"잔챙이들은 우리한테 맡겨라."

"……은혜는 이걸로 갚은 거예요."

두 뱀파이어가 한 마디씩 내뱉었다.

그러면서 단숨에 달라붙은 데카서스의 혈족들을 쳐내 버렸다.

"오필리아! 이 더러운 배신자가!"

"아타락시아의 개가 될 셈이냐?"

잔뜩 악에 받친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오필리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더 이상 쓰다가 가차 없이 버려지는 장기 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처음에는 뱀파이어라면 지긋지긋한 거머리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같은 편이 되니 꽤나 든든하긴 하다.

"고마워."

진혁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뭉이 있는 곳을 향해 다시 한 번 크게 몸을 날렸다.

***

욱씬! 욱씬!

걸음을 옮길수록 독기가 점점 더 지독해져 갔다.

연고를 바르고 천독을 둘렀음에도 심층부의 독기 속에선 앞을 보는 것마저 쉽지 않았다.

"쿨럭……."

입술을 따라 피가 흘렀다.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을 하며, 경우의 수를 따졌음에도, 현실은 예상보다 더 혹독했다.

과연…….

남색 등급의 성유물은 남색 등급의 성유물이라 이건가.

진혁이 비명이 지르는 근육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검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본능이 경고를 보낸다.

지금 당장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잠시라도 이 지옥에서 머물다간 죽게 될 거라고.

하지만, 진혁은 본능을 억눌렀다.

여기서 겁을 먹거나 포기했다간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무엇보다 엘리스가 싸우고 있었다.

'내가 성공하길 믿으면서.'

그 바람을 저버릴 순 없었다.

버틸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몇 십 초.

'그 이상이 경과하면 끝이다.'

방향 감각은 이미 사라졌지만, 과거의 기억이 손끝을 대신 움직였다.

흐릿해지는 시야.

진혁이 무의식에 기댄 채 손을 뻗었다.

검은 잡히지 않았다.

손끝이 허무하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크으……윽."

입에서 비릿한 쇠 맛이 느껴졌다.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더.

포기하지 마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력을 다해. 죽을힘을 다해 손을 뻗는다.

틀림없이 이 근처에 발뭉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다.

마지막 힘을 쥐어짠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휘청하고.

진혁의 몸이 왼쪽으로 무너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검의 손잡이가 쓰러지는 손가락 끝에 닿았다.

그러자.

우우웅!

플레이어의 마력과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성유물의 마력이 공명했다.

[용살검(龍殺劒) '발뭉'이 깨어납니다!]

발뭉이 새로운 주인을 찾기 위해 꿈틀거렸다.

동시에 주위에 깔려 있던 시독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성공이다…….'

정신이 또렷해지는 걸 느낀 진혁이 발뭉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이제 마력을 주입해 발뭉의 인정을 받는다면, 그걸로 성유물의 소유권은 정해진다.

그래, 이것으로 모든 계획은 완벽하게 끝을 맺게 될 것이다.

바로 옆에서 그 목소리를 듣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고맙다. 계획대로 움직여 줘서. 덕분에 이 지긋지긋한 싸움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구나."

퍼억!

데카서스의 주먹이 진혁의 가슴을 강타했다.

정확히 심장이 있는 부위였다.

일순간, 심장으로 가는 모든 혈류가 멈췄다.

"컥!"

반응이 느려진 건 당연한 결과다.

아뮬람이 발뭉을 손에 쥐었다.

예기를 뿜은 대검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오오오! 이게 발뭉이라는 건가. 과연,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검이구나. 크하하하! 이거라면 이길 수 있다. 암 그렇고말고."

"인간!"

엘리스가 즉각 진혁에게 달려오려 했다.

하지만, 아뮬람이 한 발 더 빨랐다.

"움직이지 마라. 엘리스. 그랬다간 이 인간이 죽는다."

발뭉이 진혁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손가락에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 그대로 목이 잘려 나갈 것이다.

완전히 역전되어 버린 전황.

"어……떻게……?"

진혁이 목소리를 쥐어짰다.

"내 혈족들은 발뭉에 접근하는 데 실패했지만, 너라면 다를 거라 생각했다. 뭔가 방법을 찾아낼 거라 확신했지. 남은 건 블러드 하운드를 소환한 채 참고 인내하는 것뿐이었다. 네가 발뭉을 얻는 순간, 사냥개들이 엘리스를 맡고 나는 전이술을 이용해 너에게 간다. 이 얼마나 완벽한 계획이지 않느냐?"

변수가 많긴 했지만, 모든 게 정확히 계획대로 흘러갔다.

보라.

실제로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지 않았는가?

"싸움은 내 승리로 끝났지만, 널 이대로 죽게 하기엔 아깝구나. 시독을 돌파하는 데 사용한 그 연고의 배합법도 그렇고. 거신족의 오른팔을 재현한 것도 그렇고. 평범한 플레이어 치곤 제법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혈족들 중에서도 너만 한 인재는 없었느리라."

탐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내가…… 네 녀석의 밑으로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후후. 당연히 아니겠지.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뒤에는 모두 사라지게 될 거다."

아무런 제약 없이 상대를 부하로 둘 생각은 없었다.

아뮬람이 손톱으로 스스로의 팔목에 생채기를 냈다.

"그, 그건!"

"이게 뭔지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반항하는 게 얼마나 쓸데없는 짓인지도 알겠지."

붉은 핏방울이 맺히는가 싶더니, 이내 진혁의 입술 위로 떨어졌다.

권속의 맹세.

정신에 직접적인 각인을 새겨 넣는 가주의 권능으로, 피를 마신 대상은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게 되어 있었다.

"……."

진혁의 동공이 풀어졌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은 오롯이 명령만을 기다리는 시체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훌륭하군."

정신 지배가 제대로 걸린 걸 확인한 아뮬람이 저 멀리서 친위대와 싸우고 있는 엘리스를 가리켰다.

"자, 이제 네 손으로 엘리스를 죽여라."

배신자의 처단.

그걸로 이곳에서의 모든 목적은 달성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푸욱!

등에서 전해지는 시큰한 통증은…… 아뮬람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종류였다.

상식을 완전히 깨 버린 일에, 억겁의 세월을 살아 온 아뮬람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같은 혈족이 좋긴 좋네. 아까는 아무리 강기를 실어도 타격을 입히지 못했는데, 지금은 손맛이 아주 제대로잖아?"

진혁이 생긋 웃었다.

풀려 버린 동공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오히려 가주의 피로 인해 지난 상처와 피로가 모두 회복된 상태였다.

"내…… 정신 지배에서 벗어났다고? 그럴 리 없다. 대체, 대체 어떻게!"

"미안하지만, 이것보다 더 까다로운 걸 겪어 봤거든."

사념 그 자체에 해당하는 적을 상대한 적이 있다.

정신 계열 공격이라면, 아주 바닥까지 경험했었지.

그거에 비하면 이 정도쯤이야.

"네 피에 마력을 최대치로 주입해 권속의 맹세를 발동시켰다면 혹시 또 모르겠지만, 승리에 취해 방심을 한 게 네 패인이다."

고유 능력의 달성 조건을 위해 모르는 척. 약한 척 연기하느라 아주 골이 다 빠질 뻔했는데.

이걸로 어설픈 놀이는 모두 끝났다.

앞에선 엘리스가 다가왔고 뒤에선 진혁이 포위망을 좁혔다.

"크윽! 그래 봤자다. 어차피 발뭉이 있는 이상 네까짓 것들은 단숨에 쓸어 버릴 수 있다."

"미안하지만, 발뭉은 아직 주인을 선택하지 않았어."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네 눈에는 여기 있는 발뭉이 보이지 않는 것이냐?"

하긴, 알 리가 있겠는가.

지그프리트가 죽은 이후 그 누구도 발뭉을 손에 쥔 적이 없는데.

"그 녀석. 음의 기운이랑은 영 성향이 안 맞거든."

다시 말해.

'별의 가호'나 '만다라'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따스한 기운을 느낀 발뭉이 아뮬람의 손에서 튕겨 나갔다.

[성유물 '발뭉'이 주인을 선택했습니다!]

오른손에 쥔 대검이 거칠게 포효했다.

[고유 능력 '혈폭(血爆)'이 발동됩니다!]

왼손에선 데카서스 가주의 고유 능력이 첫 개시를 알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싸움은 끝났다. 너는 죽고 나머지 가주들도 엘리스를 배신한 것에 대해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