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아타락시아, 순혈의 여제 (3)
[용살검(龍殺劍), 발뭉 - 남색]
입수 난이도: 측정 불가
공격력: 35,500
무게: 37kg
내구도: 58,000 / 160,000
효과:
1. 성유물에 준하는 능력 이하의 방어를 무시합니다.
2. 신격에 한해 20% 추가 피해를 입힐 수 있으며, 용족을 상대할 경우 공격력이 2배 상승합니다.(지속 효과: 3분 - 숙련도에 따라 지속 효과 시간이 증가할 수 있습니다.)
3. 발뭉의 인정을 받은 대상의 신체 능력을 10%만큼 증가시키며, 상처 회복 속도를 올려 줍니다.
특수 액티브 효과 '신화의 재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신화의 재현'은 파프니르를 베어 버린 지그프리트의 전투를 재현할 수 있게 해 줍니다.(발뭉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이해도가 필요합니다.)
남색으로 물든 상태창은 지금까지 보아 온 그 어떤 아이템의 상태창보다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려 35,500의 공격력.
현재 보유하고 있는 쌍룡검이나 송곳니에 비할 바가 아니다.
현재 파란색 등급으로 강화시켜 둔 송곳니도 공격력이 5570에 불과했으니까.
6배가 넘는다라…….
진혁의 입에서 헛바람이 흘러나왔다.
'진짜 미치긴 미쳤네.'
아무리 송곳니가 공격 속도와 가벼움에 주안점을 뒀다곤 하지만, 공격력이 6배나 차이나는 건 '터무니없다'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머브레이커나 안트라드에게 얻은 염열의 검 역시 발뭉 앞에선 그 빛이 바랬다.
무엇보다 용족을 상대할 때 공격력이 2배 가까이 상승하는 효과는 이후 탑의 상층을 오르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될 것이다.
'드디어 이걸 손에 넣는구나.'
진혁이 발뭉을 손에 쥐었다.
우우웅!
발뭉이 기분 좋은 공명음을 토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 마력.
이 느낌.
그래. 바로 이 맛이다.
최상급 성유물이 주는 압도적인 고양감이 이런 거였지.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칼날이 앞으로 향했다.
[고유 능력 '별의 가호'가 발동됩니다!]
[고유 능력 '만다라'가 발동됩니다!]
칼날을 타고 새하얀 빛과 황금색 운무가 은은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이 대단원의 막을 내릴 시간이다.
***
콰콰콰쾅!
퍼어엉!
폭발하는 핏방울과 폭발하는 핏방울이 서로 상쇄되었다.
위력은 상이하나, 혈폭에 대한 이해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아뮬람의 얼굴이 점점 더 흙빛으로 변했다.
인간 따위가 혈폭을 사용하는 것도 믿을 수 없었고.
혈폭을 구사하는 수준이 저렇게 높은 것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콰아앙!
발뭉의 날이 번뜩이자, 아뮬람의 몸이 몇 미터나 튕겨나갔다.
실드고 뭐고 간에 용살검을 견뎌낼 수 있는 방어책 따위는 없었다.
막지 말고 피해야 한다는 말이 이것보다 더 잘 어울리는 상황은 없을 것이다.
특유의 재생 능력도 무색해진 지 오래.
상처 부위에서 흐르는 피가 점점 더 많아졌다.
"벌써 앓는 소리를 하면 어떡해? 나는 이제 좀 몸이 풀리려고 하는데."
진혁이 싱긋 웃었다.
새로운 성유물까지 손에 넣은 터라,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크윽……! 기고만장해 하기는! 발뭉만 아니었어도 네 까짓 놈은……"
"뭐, 부정은 하지 않을게. 확실히 템빨이 크긴 크네."
시련의 탑에서는 아이템 자체의 성능보다 플레이어의 경험과 실력이 우위라고 믿고 있지만.
'남색' 등급 정도가 되면 평범한 사람도 충분히 보스 몬스터와 싸울 수 있게 된다.
하물며, 고인물이 그 정도 등급을 손에 넣는다면 더 이상 말해 봤자 입만 아프리라.
"근데, 억울하면 너도 근사한 걸로 하나 장만하지 그랬어?"
"뭐, 뭐라고?"
"가주 정도 되면 보물 창고에 쌓아 둔 것들도 많을 거 아니야? 거기서 몇 개 정도만 챙겨 왔어도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뱀파이어 특유의 신체 능력만 믿고 맨몸으로 오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만약 내가 제대로 된 무장만 갖추었다면…… 네놈이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거다."
"예예. 저도 집구석 신발장에 은하계를 베어 버릴 수 있는 칼도 있고 화장실엔 울부짖는 투명 드래곤도 키우고 있습니다."
"으으…… 으아아아!"
분노한 아뮬람이 고함을 질렀다.
퍼퍼퍼펑!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붉게 물들더니, 이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이제는 도주 경로 따위는 계산도 하지 않고 혈폭을 무차별적으로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그런 운에 기댄 공격에 당할 진혁이 아니었다.
'검마제왕보'와 '얕은 호흡'이 빠르고 가벼운 움직임을 만들었다.
츠츳.
……툭!
지면을 스치고 아뮬람의 앞으로 다가가는가 싶더니.
'음영극살'을 통해 순식간에 뒤를 잡았다.
카아앙!
아뮬람이 반사적으로 손톱을 휘둘렀지만, 이미 진혁은 사라진 뒤였다.
그림자와 그림자를 오가며, 고속으로 움직이는 진혁은 계속해서 아뮬람의 허를 찔렀다.
"크윽!"
아뮬람이 이를 갈았다.
이곳에 온 뒤부터 뭔가 계속해서 어긋났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일투성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남는 일이었다.
인간 하나도 쉽지 않은 마당에, 고유 성창을 발현한 엘리스까지 있었으니, 더 이상 싸워 봤자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꼴밖엔 되지 않는다.
나이조차 잊을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신이었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군림하던 게 당연한 삶이었단 말이다.
고작 이런 곳에서 죽을 순 없었다.
아뮬람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퇴로.
아직까지 뒤쪽에 빠져나갈 길이 보였다.
나머지를 시간 지연용으로 버린다면 혼자서 빠져나가는 것쯤이야…….
가능하다. 가능하고말고.
'흥분한 척 마구잡이로 공격을 하는 연기를 해 뒀으니, 도망갈 거라곤 예상하지 못하겠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물어뜯어라!"
아뮬람이 남은 마력을 모조리 끌어 모았다.
"커엉! 컹! 컹!"
"크르르!"
피로 만든 '블러드 하운드'들이 진혁과 엘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아뮬람이 뒤쪽을 향해 움직였다.
필요한 시간은 단 1초.
가주급에게 있어 1초란 시간이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겁한 것은 변하질 않았구나."
아뮬람의 머리 위에서 들린 차가운 음성은 도망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저주받은 흡혈귀가 수십 개의 붉은색 꼬챙이를 소환했다.
"어, 어떻게……?"
"네 사냥개를 통과했는지. 그게 궁금한 건가?"
엘리스가 어깨를 별거 아니라는 듯 으쓱였다.
"말하지 않았더냐. 네가 할 수 있는 건 나 또한 할 수 있다고."
아뮬람의 블러드 하운드들이 또 다른 블러드 하운드들에게 물어뜯기는 광경이 보였다.
엘리스가 아타락시아 가문에서 기른 블러드 하운드들을 풀어놓은 것이다.
"깨갱!"
"깽!"
"아무래도 내 강아지들이 더 덩치가 큰 것 같구나."
이걸로 유일한 가능성이 사라졌다.
[엘리스가 '블라디미르의 작살'을 발동합니다!]
퍼퍽!
콰득!
"크아아악!"
손발이 꿰뚫린 아뮬람이 고통에 찬 비명을 토했다.
하지만, 아무리 박쥐로 변하려고 해도 상처 부위가 붉게 빛날 뿐. 변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콰앙!
진혁이 발뭉을 쥔 채 가속했다.
대검이 눈부신 검광을 뿌리며, 아뮬람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이런…… 하찮은 미물들 따위에게 내가‧! 내가아아!"
그리고 그것이.
서걱!
데카서스의 가주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데카서스의 인장'을 획득하셨습니다.]
[모든 신격들과 상층부의 거대 세력들이 몇 시간 뒤 이 사건을 인지하게 될 것입니다!]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세력이 중‧소 세력에서 중형 세력으로 급성장합니다!]
무수히 쏟아지는 메시지와 함께.
탑 상층부를 지배하던 위대한 절대자 중 하나가 소멸했다.
***
화르륵!
치솟는 불길과 함께 화려하게 치장된 의자 하나가 잿더미로 변했다.
"……이럴 수가."
탁자를 가운데 두고 앉아 있던 이들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의자가 불탄다는 건 곧 그 의자의 소유자가 소멸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설마, 데카서스의 가주가 실패했다는 건가요?"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유일하게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아비가일 폰 레비시타.
위대한 가문 중 하나인 레비시타 가를 이끄는 가주였다.
"아뮬람이 죽었으니, 실패를 했다고 봐야 할 거다. 빌어먹을! 대체 가주가 중층부에서 목숨을 잃다니, 이게 무슨 개쪽이란 말이냐!"
"제약으로 인해 성유물을 전부 이곳에 두고 갔으니, 아무래도 전력을 다 발휘하긴 힘들었겠지. 가주 하나를 아래층으로 보낸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큰 모험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저 아래에서 가주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자가 있으리라곤……."
나머지 가주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엄청난 대가를 치렀음에도 아무 소득도 없이, 아니, 오히려 최강이라 자부하던 가주까지 잃게 됐으니까.
"……."
심지어 엘리스의 뒤를 이어 아타락시아 가문을 이끌게 된 엑센시온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바로 그때.
"그래서 제가 경고드리지 않았습니까? 가주 분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이가 있으니 조심하라고요."
벽난로에서 불을 쬐던 고블린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주위의 시선이 모두 고블린에게 향했다.
가주들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탑의 초월체.
바로 상급 관리자 하스팅이었다.
"그 강진혁인가 하는 인간 말입니까?"
엑센시온이 물었다.
"맞습니다. 엘리스를 회랑에서 꺼내고 계약을 맺은 장본인이죠."
"상급 관리자께선 그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 강진혁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결코 가주를 죽일 수 있는 정도는 아닙니다. 가능성이 있다면, 엘리스 쪽이겠죠."
"흐음. 제 생각엔 여러분들이 그분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습니다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엘리스는 과거에도 지금에도 변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토록 강했던 전성기 시절조차 결국 가주들에게 제압당해 봉인되었다.
하물며 과거의 힘에 미치지 못하는 지금이야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진혁은 다릅니다."
단순히 전투력을 뜻하는 게 아니다.
주어진 조건 속에 승리라는 대전제를 강제할 수 있는 힘.
불리한 단점마저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진혁을 두려워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아마,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이곳에 있는 가주분들 역시 그 인간의 손에 의해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갈수록 확률은 더욱 높아지겠죠."
가주들의 죽음.
그 말도 안 되는 가정이 너무나 쉽게 흘러나왔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우리가 인간 한 명에게 당할 거라는 말씀인가요?"
"그만!"
당연히 가주들이 항변하려 했지만, 엑센시온이 그 불만을 단칼에 일축해 버렸다.
"……단순히 저희 신경을 긁기 위해 이런 말을 꺼낸 건 아닌 것 같고 뭔가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 것 같군요."
"역시, 새로운 아타락시아의 가주께선 말이 잘 통하는군요. 사실, 생각해 둔 게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방법은 실패했으니, 이번엔 제 방법대로 한번 해 보도록 하죠. 시간이 좀 필요하긴 하겠습니다만, 그만한 노력과 시간을 들일 가치는 있을 겁니다."
하스팅이 천천히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가주들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했다.
너무나 충격적인 계획이었기에, 마른침을 삼키며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입니다."
마침내 하스팅이 마침표를 찍었다.
"과연……."
"그거라면 두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나도 찬성하지. 우리에게 이빨을 보인 놈들을 씹어 먹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겠어."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하나.
엑센시온만을 제외하면.
"계획이 훌륭한 건 인정합니다. 허나, 탑의 균형을 수호하는 당신이 어째서 우리를 돕는 겁니까?"
관리자란 본래 중립을 유지하며, 시련의 탑이 존속할 수 있게끔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지금 하스팅이 이렇게 무리하게 개입하려 하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자.
"저는 지금 탑의 균형을 수호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말이죠."
하스팅이 알 수 없는 미소를 빙그레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