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유럽에서의 Vlog 일상 (3)
모두가 홍보 영상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진혁은 한쪽 구석에서 토라져 있는 엘리스에게 다가갔다.
뭐가 불만인지 잘 모르겠지만, 엘리스는 연신 구시렁대면서 혼잣말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칫…… 나도…… 있는데……."
"엘리스."
"왜?"
엘리스가 여전히 쌜쭉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너한테 한 가지 부탁할게 있어."
"부탁이라고? 나한테?"
부탁이란 말에, 엘리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지금부터 생방송이라는 걸 할 건데. 대화도 나누고 미션도 수행하고 하면 시청자들이 코인으로 후원을 해 줄 거야. 지금 자금난이 심각하니까 가서 코인 좀 벌어와 줘."
오싹하고.
공기가 급변했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밤의 귀족인 이 몸이 하찮은 인간들 앞에서 재롱이라도 부리라는 것이냐?"
엘리스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흐음. 하는 수 없지. 그럼, 테레사 씨에게 부탁해야겠네."
"뭐?"
"틱틱대는 것보다 사근사근한 편이 시청자들 입장에서도 더 좋을 것 같거든. 기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잘됐어."
청순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닌 성녀.
인생 고민 상담 콘텐츠 같은 걸 하면, 시청자들의 관심을 독식할 수 있을 거다.
-요즘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미래도 안 보이고 하루하루는 막막하고.
-저에게 전부 말해 주세요. 들어 주는 것밖에 해 드릴 순 없지만, 적어도 끝까지 이야기는 들어드릴 수 있어요.
크으.
차갑게 식은 심장이 다시 뛰는 느낌이다.
천사들이 머리 위에서 나팔을 불며, 꽃가루를 뿌려대는 것 같달까?
괜히 암스테르담을 구원한 성녀가 모두에게 인기가 많은 게 아니다.
"이이익! 할게. 하면 되잖아! 그 금발 바보한테 질 수는 없어."
엘리스가 방송 시스템 앞에 섰다.
"이거 파란색 화면 밖에 안 보이는데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잠시만 있어봐. 공지 올렸으니까 곧 사람들이 들어올 거야."
[강진혁의 야외 방송 #힐링 #고민상담 #고인물_코퍼레이션 #시키면_뭐든지_다합니다!]
이미 몇 분 전에 공지사항을 올려 뒀다.
BJ를 그만두고 올리는 첫 공지라 그런지, 꽤나 싱숭생숭했다.
그때는 공지를 올려도 20명이나 보면 다행이었는데…….
과연 지금은 어떠려나?
-코난: 선발대 출발합니다.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첫 번째 시청자가 들어왔다.
바로 뒤, 1초도 안 되는 찰나에 수백 명의 시청자들이 진혁의 생방송을 보기 위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코난 님이 방송에서 나가셨습니다.]
-문: 또 코난이냐?
-US: 쟤는 항상 1빠로 들어왔다 방송 나가 버리네. 설마 이 방에서도 그럴 줄은 몰랐는데.
-als: 그나저나 진혁이가 생방송 한다고 해서 들어온 건데, 왜 방송 대기임? 이거 낚시 아니지? 화면은 깜깜하고 채팅창만 보이니 답답해 죽겠다.
-AZXCY: 방송국 계정 확인했는데 동일인물 맞음. 와. 근데 진짜 이게 얼마 만의 생방이냐? 무슨 일로 생방을 킨 거지?
-정근원: 진혁이 얼굴 볼 생각하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주로 편집된 동영상만을 올려 왔던 터라, 시청자들은 지금의 생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기대감으로 인해 채팅창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대체 어떤 엄청난 레이드를 선보일지.
얼마나 화려한 보물들과 아티팩트들을 보여 줄지.
아니면, 누구도 가 보지 못한 미궁이나 유적을 탐험하려고 하는 건지.
그것이 미친 듯이 궁금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접속 중인 시청자의 수: 175,880]
단시간 내에 충분히 많은 시청자들이 모였을 무렵.
암전되었던 화면이 마침내 켜졌다.
나타난 건 눈처럼 새하얀 은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도도한 뱀파이어.
엘리스였다.
새빨간 동공엔 불만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그 표정마저도 시청자들의 입장에선 충격 그 자체였다.
편집본으로만 구경해 왔던 의문의 랭커.
수많은 활약을 보여 줬지만, 이름이 엘리스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정확히 그 정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소녀를 드디어 만난 것이다.
진혁을 보지 못한 실망감은 이내 사라졌다.
엘리스를 본 시청자들이 채팅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엽떡먹고싶당: 아니, 진혁이는 어디가고 웬…… 응? 잠깐만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인데?
-거대만두: 헉! 엘리스잖아? 진짜다. ㄹㅇ 엘리스야.
-tmd: 와 ㅁㅊ. 이게 무슨 일이래? 진혁이가 생방송 킨 것도 놀라운데 게스트도 오지게 섭외해 왔네.
-hi: 엘하 엘하. 엘리스 하이라는 뜻.
-rub: 누나! 나 죽어!
-오늘의웬디: 이 정도면 가지고 있는 코인 전부 토해내라고 협박하는 수준인데. 고블린 잡고 모아 둔 거 전부 갖다 바쳐야 되나?
-(dark): 엘리스는 미래의 아내!
-고양이집사꿈: 이번 만큼은 인정.
미친 듯이 폭주하는 채팅창은 진조의 눈으로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
"이, 이…… 인간? 이거 뭔가 너무 빠르다. 왜 다들 나보고 반갑다고 하는 것이냐?"
"나 보지 말고. 시청자들 봐. 이쪽 보지 말라고 바보야!"
"으응? 알겠다. 앞. 앞은 눈이 향하는 곳이지. 짐은 지금 앞을 보고 있다."
"채팅창 최대한 읽으면서 미션 거는 거 있으면 다 한다고 해."
"아, 알겠다. 잠깐만 기다려 보거라."
엘리스가 토끼눈을 뜬 채 채팅창을 읽었다.
"으으으……."
너무나 빠른 터라, 모든 댓글을 읽을 순 없었지만, 코인을 건 미션들 중 몇몇 개를 식별해 낼 수 있었다.
moo: 당황하는 것도 졸귀네. 고양이 귀 착용하면 2,000코인 바로 쏜다.
lmg: 받고 1,000코인 더
돌둔이: 응 거기서 더블이야.
김기범: 아이돌 노래 틀어 놓고 댄스 3분. 1분에 1,000코인씩 콜?
thelode1: 난 완전 오글거리는 모닝콜 듣고 싶음. 녹음해 놓고 매일 아침마다 들으면서 일어나게. 기꺼이 4,000코인 투자할게.
(isio): 왠지 민트초코 좋아할 것 같이 생겼는데, 패밀리 사이즈 혼자서 다 먹으면 5,000코인 쏨.
antimony51: 코인 들어간다 입 벌려랏!
"우, 웃기지 마라! 감히 밤의 귀족이자 탑의 절대자인 이 몸이…… 고작 코인 몇 푼에 고결함을 팔아 버릴 순 없다. 아타락시아의 이름을 걸고 절대. 죽어도 안 돼!"
엘리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것만큼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물론.
"전부 수락하겠습니다."
코인이 걸린 일을 마다할 진혁이 아니었다.
"야. 내가 하는 건데. 왜 니가 마음대로 수락을 해?"
"해."
"하, 하지만……."
"해."
결국 엘리스는 시청자들이 제시한 모든 미션들을 강제로 수행해야만 했다.
음.
고양이 귀나 댄스까진 그러려니 했는데.
모닝콜이랑 민트초코는 좀 심한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저런 코스프레들이 제법 잘 어울리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시청자들의 반응도 역대급으로 좋았고.
"고생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정말로 잘 어울렸다고 생각해. 도도한 면만 있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귀여운 면모도 있었네."
"진짜로?"
"응."
엘리스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조금 전까지 시무룩했던 게 거짓말처럼 사라진 건 덤이다.
바로 그때였다.
"흐응."
묘한 소리와 함께 진혁의 곁에 새로운 인물이 다가왔다.
테레사다.
그런데.
테레사의 모습이 평소와는 뭔가 달랐다.
화장이 짙은 데다…… 입고 있는 옷도 굉장히 노출이 심했다.
무엇보다 풍기는 분위기가 꽤나 이질적이었다.
'이 느낌은…… 설마?'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틀림없다.
타락을 사용해서 인격이 바뀌었을 때의 테레사다.
"순딩이 녀석은 영 쑥맥이어서 내가 직접 나섰는데, 정작 당사자는 다른 쪽에 신경이 팔려 있네?"
요염한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테레……사 씨?"
꿀꺽하고.
진혁의 목을 따라 마른침이 넘어갔다.
-꼬끼오: ㅗㅜㅑ. 이 누님도 화끈하시네.
-심연의 흑염룡: 하하. 저는 절대 한눈팔지 않았습니다.
-쿠키맛집: 성녀 코인 풀매수 간다.
-율: 22222.
-가나다: 33333
-악동악동: 진혁S2테레사
"뭐야. 방송 중이었던 거야?"
테레사의 시선이 상태창과 채팅 사이를 오고갔다.
"흐응. 10만 코인이라. 나쁘진 않네. 근데 이런 꼬맹이한테 말고 나한테 부탁했으면 코인을 10배는 벌게 해 줬을 텐데 아쉬워."
테레사가 손가락 끝으로 진혁의 볼을 쓰다듬었다.
"꼬, 꼬맹이? 꼬맹이라고?"
"어머나. 너무 실례가 되는 발언이었으려나? 하지만, 누가 봐도 그게 사실 아닐까?"
"주…… 죽었어. 아주 갈기갈기 찢어 버릴 거야!"
갑자기 테레사까지 난입하면서 생방송은 그야말로 전쟁터로 변했다.
-심연의흑염룡: ㅋㅋㅋㅋ. 여기가 맛집이었네.
-Anz: 아아. 오늘도 고인물 코퍼레이션은 평화롭습니다.
-Sla: 엘리스 승리에 6,000코인 간다.
-정윤희: 테레사 언니 승리에 7,000!
-서승희: 이 와중에 진혁이는 말리지도 않네. 저거 봐. 배팅 금액 따로 적고 있는 거 보임?
콰아아앙!
퍼어엉!
붉은 비와 함께 폭발하는 지면.
고유 성창을 개방한 엘리스와 전신을 흑갑으로 감싼 테레사는 마치, 세계관 끝판의 마왕과 저주받은 용사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애써 준비한 음식들이 잿더미가 되어 버리는 건 꽤나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짭짤하네.'
진혁은 웃고 있었다.
이 생방송의 후원으로 받은 코인이 무려 400,000코인이 넘었기에.
그리고 제작한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홍보 영상은 그 이상의 코인을 벌어들일 것이기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
다사다난했던 일주일간의 휴가가 끝났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돌이켜 보면 썩 나쁘지 않은 휴가였다.
다 같이 모여 웃고 떠들며 돈독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그만큼 서로 간에 유대감도 더 깊어졌겠지.
딱 하나, 테레사의 아버지인 더스틴이 어떻게든 약혼식을 올리려 하던 걸 거절하는 게 가장 힘든 점이었다면 힘들었던 점이었다.
그 후, 일행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천유성은 수련광만이 얻을 수 있는 스킬을 얻으려 15층 외각에 위치한 미궁으로 떠났고 테레사 역시 천유성을 돕겠다며 따라나섰다.
안드리아는 정신 병동을 너무 오랫동안 비웠다며, 본인이 관리하던 층계로 되돌아갔다.
고구마와 정령수들도 현현해 있느라 마력을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적어도 며칠간은 휴식을 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진혁은 15층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은 곳에 도착해 있었다.
바로, 통곡의 마녀가 거주하는 유적이다.
유적의 입구에서 약 1km가 떨어진 지점에 자리 잡은 진혁은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여기도 정말 오랜만에 다시 오네.'
감회가 제법 새롭다.
처음 시련의 탑이 현실로 도래하고 미노타우르스가 있는 미궁 안을 헤매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15층까지 도달해 있었으니까.
물론, 앞으로도 갈 길이 멀긴 했지만, 차근차근 층계를 정복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그때였다.
"형. 사 오라고 한 것들 전부 다 사 왔어요."
"식량이랑 침낭이랑…… 대장간에서 보급형 무기랑 고철들도 싸그리 구매했어."
이태민과 유연화가 다가왔다.
통곡의 마녀가 거주하는 곳은 워낙에 그 규모가 거대하기 때문에, 준비해야 할 것들도 많았다.
"고생했어. 다 됐으면, 슬슬 들어가자."
"아. 형 근데…… 있잖아요."
이태민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왜, 무슨 일 있어?"
"유적 안에서 경쟁이 꽤나 치열할 것 같아요."
"치열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진혁이 되묻자, 이번엔 유연화가 한 마디 덧붙였다.
"다른 길드 놈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어.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3개 이상이 손을 잡은 것 같아. 익숙한 얼굴들이 몇몇 보였거든."
그럴 리가.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아직 15층에 올 만한 스펙을 갖추지 못했을 텐데?
이곳에 오기 전 시련의 탑 커뮤니티와 뷰튜브의 상위 랭크 영상을 싹 훑어봤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대형 길드들조차 13, 14층의 B급 던전을 공략하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무모하게 도전을 하거나.'
혹은.
'지금의 전력으로도 이곳을 노려 볼 만한 [근거]가 마련되었거나.'
둘 중에 하나겠지.
어느 쪽이든 꽤나 재미난 변수가 생긴 건 틀림없었다.
통곡의 마녀를 두고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으니까.
물론, 이 변수를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전적으로 한 가지에 달려 있었다.
"그래서 그 길드란 곳이 어디 쪽인데?"
진혁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