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일곱 개의 대죄 (1)
전음으로 말을 걸어 온 상대는 베리엘이었다.
요 며칠 잠잠하나 싶어, 다른 사도들을 보러 간 건가 생각했는데.
음흉하게 옆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모양이다.
"골치가 아파질 수 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인간들은 맡을 수 없겠지만, 내 코끝에는 찌를 듯한 악취가 풍겨 오고 있거든. 꽤나 위험한 냄새야.]
베리엘이 맡을 수 있는 향이라면.
설마……?
"마족의 마기가 흘러나오는 곳이 있다고? 이 유적에?"
[여기서 꽤 멀리 있는 곳이다. 그 마녀가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거겠지. 잡냄새가 섞여 있는 걸 보니 마녀 외에도 누군가 또 있는 것 같군.]
적그리스도의 무덤, 그 7번째 방안에 있는 성마소는 탑에서도 3개밖에 없는 마왕과 마족을 현현시킬 수 있는 장소다.
게다가 함께 있는 놈들이라면…….
진혁의 눈매 가늘어졌다.
온갖 경우의 수 중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대충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예상이 간다.
그리고 이걸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도…….
"충고 고마워."
살다 살다 마왕이 도움이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덕분에 꽤 유용한 정보를 손에 넣었다.
[후후. 너무 좋아하진 말거라. 만약 정말로 작위가 있는 마족이 현현하는 거라면, 네 수준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내가 죽게 될 거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바로 그렇다. 하지만, 만약 나의 사도가 된다면 비참하게 죽는 건 피할 수 있을 터. 지금이라도 계약을 받아들여라 미천한 인간이여. 내가 이 정도로 자주 권유하는 게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다.]
"호오. 너도 제법 끗발이 있는 마왕인가 봐?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걸 보면?"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당연한 소릴! 그 누가 감히 내 앞에서 격을 논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마계의 최강이라 하면 바로 이 몸을 두고 말하는 것. 마녀 따위가 어떤 마족과 연이 닿아 있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나보다 격이 높은 마족을 불러낼 순 없다!]
"오오오!"
진혁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러자 베리엘 역시 만족한 듯 광소를 터뜨렸다.
금빛 눈을 가진 마왕이 상태창에서 껄껄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녀석도 생긴 건 신화 속에 나오는 남신들을 뺨칠 정도로 잘생겼는데 하는 짓은 왜 이렇게 경박한 건지…….
[푸하하하! 이제야 내 위대함을 조금이나마 깨달은 건가? 그렇다면 내 사도가 되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도 알겠구나. 자. 어서 영혼과 영혼을 잇는 계약을…….]
"싫어."
[읭?]
"정보는 고맙게 받을게. 하지만, 겨우 이걸 귀띔해 주고 계약이니 뭐니를 말하면 안 되지. 이런 수준이면 최소한 30개 정도는 더 알려 줘야 계약을 해 볼까 말까 고민할 것 같아. 그러니 앞으로도 열심히 힘내 봐."
좋은 사도를 얻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특히나 요즘 같이 구인난 시대에는 더욱더 말이다.
[자, 잠깐! 너 대체 이 몸을 뭐라고 생각하는……! 아니 마족적으로 이건 상도의가 아니지 이 망할 자식아! 마왕도 너처럼 하지는 않을…….]
베리엘이 다급하게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진혁은 귓속말 모드를 해제해 버린 뒤였다.
바로 그때.
"지인하고 대화를 나누셨나 봐요? 꽤 즐거워 보이시던데……."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음소거 기능 때문에 어떤 말을 하는지 듣진 못했지만, 연신 싱글벙글 웃는 것까지 못 보진 않았다.
"아. 스카웃 제의를 좀 받아서요. 관심 없다고 적당하게 거절했습니다."
"스카웃 제안이라면……."
마리아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진혁에게 함께하자고 할 수 있는 건 길드가 아닌 거대 세력이라는 걸 눈치챈 것이다.
"제국이나 무림 말고도 아직 중층부에서 진혁 씨에게 제의를 하지 않은 세력이 남아 있었나요?"
"음……. 그보다는 좀 더 위죠."
더 위라니.
마리아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이야기는 상층부에서도 진혁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말이다.
더 놀라운 건 그걸 여유 있게 거절해 버린 거였고.
"역시…… 대단하시네요."
차마, 올림포스는 관심이 없느냐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상층부의 세력들도 탐내고 있는 마당에, 자신들 따위가 눈에 찰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올림포스는 점점 그 입지가 흔들리다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게 될 것이다.
그 마음을 예상하듯 진혁이 넌지시 운을 뗐다.
"간다라나 단군도 함께하기엔 나쁘지 않은 선택지지만, 다들 제 밥그릇 찾기도 힘들 겁니다. 무엇보다 언제 어디서 배신을 할지 모르는 자들에게 등 뒤를 맡기고 마음 편히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렇겠죠. 이해관계에 얽혀 맺은 일시적인 연합 레이드니까요."
공적치나 보상 등.
허울뿐인 계약이야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종이쪼가리가 되어 버리겠지.
"그러니, 그런 자들은 버리고 저와 손을 잡으시죠."
"예?"
"저랑 연화 태민이 그리고 마리아 씨라면 충분히 이곳을 공략할 수 있습니다. 나눠야 할 보상이 많아지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요."
"그, 그건 그렇지만…… 왜 하필 저를 고르신 거죠?"
여기서 복사 조건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마음 같아선 마리아 역시 근사하게 뒤통수를 치고 싶지만, 조건 중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조항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치와 아이템을 헬파이어와 비교한다면…….
……당연히 선택해야 할 것은 하나뿐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저 마리아 씨라면 신뢰할 수 있다고 제 직감이 말해 주고 있거든요."
진혁이 생긋 웃었다.
모든 의심과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지게 만드는.
그런 따스한 미소였다.
***
연합 안에 또 다른 연합이 생겼다.
물론, 니라샤나 박정진은 까맣게 모를 수밖에 없는 비밀 연합이.
"……그래서. 당신과 마리아 씨는 정찰대가 실종된 그 루트를 통해서 가겠다는 건가요?"
니라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럴 생각입니다."
"정말입니까, 마리아 씨?"
"예. 고민해 봤는데, 결정했어요. 저는 진혁 씨를 따라 가겠습니다."
마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찾아낸 메인 루트는 중형급 몬스터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길도 넓고 시야도 좋아서 딱히 변수가 없어요."
박정진 역시 눈살을 찌푸린 채 한 마디 덧붙였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거겠지.
다수의 이점을 살려 힘으로 뚫어 버릴 수 있는 메인 루트와 지름길이긴 하나 정찰대가 전멸해 버린 미지의 루트.
안정성과 성공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어디를 골라야 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정 불안하면 다 같이 제가 선택한 곳으로 가시든가요. 그 편이 훨씬 안전하다고 장담드릴 수 있습니다."
"장담한다라…… 하. 웃기지 마세요. 시청자들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신을 받아들인 거지. 당신을 신뢰하는 건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런 도움 따윈 없어도 저희만으로 충분히 이 유적을 공략할 수 있어요."
한 마디로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의미다.
"정 그러시다면야. 각자 갈 길을 가는 수밖에 없겠네요."
"당신 쪽으로 제 사람 중 몇몇을 붙이겠습니다. 총공대장으로서의 결정이니 너무 삐딱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어디까지나 도움을 드리려고 그러는 거니까."
니라샤가 손가락을 튕기자,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아룬.
간다라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로 니라샤로부터 직접 만다라를 전수받은 랭커였다.
말이 좋아 조력자지. 사실상 감시를 하겠다는 뜻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진혁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도움.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마침 같이 가 주실 분들이 꼭 필요했거든요."
***
잠시 뒤, 제1 공격대와 떨어진 제2 공격대는 두 번째 사도가 지키고 있는 길에 도착했다.
정찰대가 모조리 전멸해 버린 바로 그 장소다.
일직선으로 뻗은 통로는 기껏해야 사람 다섯 명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여기가 바로 그곳인가.'
[아룬이 고유 능력 '진궁(振窮) 만다라(曼茶羅)'를 발동합니다!]
우우우웅!
황금색 운무가 통로 전체를 따라 퍼져나갔다.
"과연……."
아룬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탄성을 흘러나왔다.
대상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만다라의 힘 덕분에 이 통로에 펼쳐져 있는 함정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침묵의 통로.
이곳은 말을 하거나…… 혹은 움직임으로 인해 소음이 일정 수준의 데시벨을 넘길 경우 그 대상을 잠에 빠지게 만드는 저주가 걸려 있는 곳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효과는 절대 판정과 동일한 수준이었기에, 고유 능력과 스킬로는 해제가 불가능했다.
'한 번 저주에 걸리면 최소한 일주일 이상은 잠에 빠져드는 저주로군.'
이러니 선발대로 보낸 정찰대가 가다가 전멸할 수밖에.
아마, 저 앞쪽 어딘가에 잠에 빠져든 녀석들이 널브러져 있을 것이다.
'몸에 무리는 가지만, 역시 능력을 사용하길 잘했어.'
적어도 두 번째 관문은 간다라에서 통과하는 걸 보여 줘야 한다.
이 유적은 특정 조건을 만족할 경우 다음 층계로 넘어가기 위한 것과 동일한 취급을 받을 수 있었기에. 반드시 클리어가 필요한 장소였다.
생방송을 진행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고.
"우리가 먼저 통과하겠다. 괜히 걸리적거리지 말고 뒤에 있어라."
"함정을 통과할 방법은 알아냈다는 겁니까?"
"그래. 너에겐 말해 봤자 시간만 잡아먹으니, 먼저 우리가 통과하고 나서 함정을 해체해 주는 쪽으로 해 주마."
"뭐,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의외로 진혁은 순순히 물러났다.
살짝 의심스럽긴 했지만, 아룬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함정의 발동 조건을 파악했고 상대가 양보해 줬으니 더 이상 무언가를 따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함정 해체는 영원히 없을 테니, 평생 거기서 서서 구경이나 하고 있어라.'
저벅.
아룬과 나머지 4명의 플레이어들이 자신만만하게 통로의 시작점에 섰다.
소리를 죽이는 것쯤이야 그들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사박.
지면을 스치는 아주 작은 발걸음 소리.
호흡은 속으로 삼키며, 전신의 감각은 극도로 끌어올렸다.
속도가 빠르진 않지만, 착실하게 전진해 나가고 있으니, 머지않아 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침착하게 유지만 하면 된다.'
아룬이 목표를 목전에 뒀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드디어 저 고인물을 제치고 니라샤 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빰빠 빰빠빠 빰빠라라 빰빠! 전 병력은 06시 30분까지 연병장으로 집합해 주시기……!]
시작점에서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은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모닝콜이……! 죄송합니다. 음소거로 해 놓는다는 걸 그만 깜빡했네요. 하하."
진혁이 멋쩍은 듯 재빨리 붉은색 상태창을 껐다.
늦잠 자지 말라고 맞춰 둔 게 여기서 울려 버리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그것도 하필이면 우렁찬 군대식 기상 알림이 걸려 버릴 줄이야.
"이런……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아룬이 말끝을 흐렸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더 이상 사고를 유지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길 통과하려면 수면 저주에 최소 5명이 잠에 빠져야 하거든요. 귀하께서 자진해서 해 주신 고귀한 희생은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희생 같은 소리 하……."
흐려지는 시야 속.
진혁이 두 손을 모아 사과하는 게 얼핏 보이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비틀린 입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치아가.
쿠웅!
그리고 그것이.
아룬이 기억하는 마지막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