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결계학개론 (2)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
결계사의 정수라 할 수 있는 12개의 별자리를 재현하는 비기다.
아직 '잃어버린 언어'를 습득하지 못했기에, 그저 그 형태를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늘을 푸르게 물들인 전갈자리의 위용은 그 열화를 잊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우우우웅!
우우웅!
육망성 너머로 무수히 많은 빛이 점멸했다.
마치 천벌처럼, 하늘에서 쏟아지는 푸른색 유성우가 통곡의 마녀가 있는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
지형이 바뀐다.
콰아앙! 콰드득!
"키에에에!"
"크와아아!"
근처에 있던 몬스터 석상들까지 휘말릴 정도로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폭풍의 한가운데에 있는 통곡의 마녀는 그 화력을 오롯이 맨몸으로 받아내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공격이 몇 분이나 계속되었을까?
마침내 유성우가 멎었을 땐, 유적 내부의 상태가 꽤나 달라져 있었다.
***
"크으…… 끄아아아! 내, 내 몸이. 내 몸이……!"
넝마가 되어 버린 몸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걸 맞고 형체를 유지하다니.
생긴 건 골다공증을 달고 살 것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튼튼하다.
바로 그때.
"저건?"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녀의 몸 주위로 검은색 액체가 꿀렁이며 솟구치는 게 보였다.
……검은 눈물이다.
"그렇게 자존심을 세우더니, 살려면 어쩔 수 없었나 봐?"
마지막 별자리가 폭발하는 순간, 검은 눈물을 통해 그 피해를 상쇄시킨 게 틀림없었다.
[통곡의 마녀가 고유 능력 '검은 눈물'을 발동합니다!]
쿠쿠쿠쿠쿠!
조금 전 공격대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능력이 재현되었다.
"크윽. 너 따위에게 내 전력을 발휘해야 할 줄이야.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구나."
닿기만 해도 어떤 일을 초래할지 모르는 최악의 능력.
확실히 검은 눈물에 직접 접촉하는 건 아무리 고인물이라고 해도 위험하다.
'예전에도 저거 뒤집어썼다가 이성을 잃어서 드래곤 레어에 맨몸으로 쳐들어갔었지.'
헤츨링을 인질…… 아니, 용질로 잡고 시위를 하다가 죽었던 사망 기록이 있었다.
성녀를 납치해서 마녀 분장을 했다가 화형당한 기록도 있었고.
그 외에도 검은 눈물을 상대하기 위해 별의별 일을 다 겪었었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였어.'
시련의 탑을 플레이했을 당시에는 결계를 이용한 게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했지만, 근본이 되는 뿌리는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그 순간.
[마상결계(魔想結界) 제1절, '검은 파도'가 일어납니다.]
쿠쿠쿠쿠쿠쿠!
거대한 파도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순간, 황도십이궁의 별자리가 검게 물들었다.
"끄아아아!"
"케에엑!"
결계의 표면에 붉은 입과 새하얀 이빨이 빼곡히 돋아나더니,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검은 눈물로 인해 변이가 진행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킥킥킥!"
"히히히! 먹자. 먹어 치우자."
비명 소리는 곧 웃음소리가 되었고 이내 먹잇감을 향한 욕망으로 변질되었다.
게다가 이빨 사이로 기분 나쁘게 생긴 눈동자들도 하나 둘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여간, 더럽게 불길하기는.
이런 기분 나쁜 능력을 쓰는 녀석은 시련의 탑을 통틀어도 몇 놈 되지 않을 거다.
눈동자가 동시에 이쪽으로 향했다.
……온다.
진혁의 어깨에 새겨진 '달의 각인'이 환하게 빛났다.
고대 룬어들이 어지럽게 방어 결계를 강화했다.
"어리석긴! 너도 조금 전에 보지 않았느냐. 그걸로는 어림도 없다!"
콰아아앙!
검은색 운무가 진혁이 만든 결계를 일거에 박살냈다.
푸른빛을 내던 결계들이 검게 물들었다. 새로운 눈과 입들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런데.
회심의 미소를 짓던 통곡의 마녀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뭐지?"
결계 중 몇 개가 오염되지 않았다.
거의 전부라 해도 좋을 방어 결계들이 오염됐지만, 몇몇은 여전히 푸른빛을 띤 채 맹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검은 눈물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너무 많이 다루느라 통제에서 벗어난 게 한두 개 있나 보군.'
게다가 어차피 상관없다.
상대는 전력을 다해 막기에도 급급할 뿐.
그 너절한 저항마저도 몇 번이면 끝날 것이다.
……라고 방심하게 만들 생각이겠지.
통곡의 마녀가 힐끗 진혁을 바라봤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얼굴이다. 아니, 오히려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얼굴이야.'
작은 변수가 커다란 결과로 이어지는 법.
하물며 상대는 지금까지 자신이 만든 사도들을 농락하고 박살내 왔던 놈 아니던가?
궁지에 몰려 검은 눈물까지 꺼낸 마당에 방심해선 안 된다.
이런 것들마저도 놈이 설계하는 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조금 전처럼 내 결계를 빼앗아 버리려는 계획인지도 모르겠어.'
검은 눈물은 기존의 마력보다 3배는 복잡하고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통곡의 마녀는 만에 하나까지도 대비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전력으로 찍어눌러 주마. 허를 찔러 단 한 방으로.'
통곡의 마녀가 진혁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금씩 마력을 긁어모았다.
콰아앙!
콰앙!
"키키키키!"
"먹자……! 먹어 치우자. 먹어 치우자!"
보라색 눈들과 새하얀 이빨들이 진혁이 만든 결계들을 계속해서 갉아먹었다.
푸른색 결계들은 여전히 위태위태하게 주인을 지키고 있었다.
비록, 종이 한 장 차이로 목숨을 이어나가게 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여전히 그 빛을 잃진 않았다.
게다가.
이전보다 변이가 되지 않는 결계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
……바로.
"지금!"
[마상결계(魔想結界) 제2절, '몽상의 꽃'이 발동합니다!]
진혁의 발밑으로.
화르륵!
지금까지 조금씩 따로 모아 뒀던 마력들이 일제히 개화했다.
6장의 검은 꽃잎과 꽃잎 속에서 돋아난 이빨은……. 그 먹잇감이 설령 대형종이라고 해도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날카로웠다.
"무얼 계획했든 내가 더 우위에 있었구나. 이걸로 끝이다!"
몽상의 꽃은 대상에게 최면을 거는 정신 계열의 능력.
검은 눈물로 펼칠 수 있는 스킬 중 가장 빠르고 강력한 효과를 자랑하는 필살기였다.
'차원이 다르다'라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해 존재하는 거겠지.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오싹하고.
차가운 한기가 등줄기를 따라 흘렀다.
최면에 빠져 있어야 할 진혁이 여전히 웃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기의 이유는 단순히 상대가 최면에 걸리지 않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마녀의 발밑에…… 거대한 동공과 새하얀 이빨이 보였다.
"마, 말도 안 돼."
또 하나의 몽상의 꽃이 개화를 막 끝마쳤다.
"어떻게 이것까지……. 그럴 리 없다. 이건 구조를 파악하는 게 불가능한 종류란 말이다. 게다가 내 걸 훔친……."
말을 하던 통곡의 마녀가 무언가를 깨달았다.
결계를 훔친 거라면…… 어째서 이곳에 두 개의 몽상의 꽃이 피어 있단 말인가?
상대의 발밑엔 여전히 자신이 만든 꽃이 최면을 걸기 위해 마력을 쏟아 붓고 있었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견디고. 또 하나의 꽃을 만들었다는 건…….
고작 훔친 것 따위가 아니다.
"거, 검은 눈물에 흐르는 마력. 그 자체를 파악했다는 말이냐?"
아예 근간을 송두리째 꿰뚫어 본 것이지.
그 말에, 진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너처럼 수준 높은 결계와 저주를 배운 것도 아니고. 그걸 완벽하게 다룰 정도로 숙련도도 높지 않아. 사실 비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지."
허를 찌르고 상성과 상황을 이용하는 걸로 이 싸움을 유리하게 끌고 왔을 뿐. 결코 통곡의 마녀가 쌓아온 지식을 넘어설 순 없었다.
그럼에도. 단 하나.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우는 데 있어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11년이란 세월 동안 안주하는 게 아니라 실험하는 걸 선택해 왔다.
남들이 가 보지 않은 길을 걸으며, 그 과정을 즐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라.
각각의 길 끝에 있는 목적지와 그 목적지로 가는 최단 루트를.
"건방진. 마치 자신이 천재라도 되는 듯 말하는구나."
"이런. 내 이야기를 완전히 헛들었네. 내가 천재였으면 뭐든지 한 번에 성공했겠지. 하나의 노력으로 열의 결과를 창출하는 게 그 녀석들이고. 나는 하나의 노력으로 하나의 결과를 만드는 것도 벅찼어."
단지, 그 노력이 무수히 많았다.
몇 만의 노력으로 몇 만의 결과를 창출할 만큼.
"우연히…… 정말 너무나도 우연히 결계사란 직업을 가져서 이렇게 된 거다. 만약 네놈의 직업이 다른 거였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을 거란 말이다."
통곡의 마녀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글쎄……."
이번에도 그 말은 동의하기 힘들 것 같은데.
"원래 내가 주력으로 삼았던 직업을 선택했다면 넌 내 눈도 마주치지 못했을 거다."
흥미를 위해 결계사를 선택했지만, 만약 과거에 탑을 올랐던 직업으로 다시 한 번 도전한다? 그때 했던 실수와 약점들을 모두 보완한 채?
길게 말해 봐야 입만 아프다.
이렇게 이야기를 길게 할 필요도 없이 이미 오래 전에 마녀의 목이 땅에 뒹굴고 있었겠지.
"다른 직업을 선택했던 적이 있다고? 그게 무슨 뜻이냐?"
통곡의 마녀가 되물었지만,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싸움의 끝을 고했다.
"나름대로 새로운 싸움을 하게 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결계사에 대해서 조금 더 애착을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거든."
꽃잎이 한 점을 향해 서서히 모아졌다.
시야가 점점 어둡게 물들었다.
"자, 잠깐! 기다려라. 너는 결계의 진리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은 것이냐? 날 살려 주면 대마녀회에 데리고 가 줄 수 있다. 네가 상상도 하지 못한 이 세계의 진실에 대해 알려 줄 수 있단 말이다!"
통곡의 마녀가 잎 사이로 손을 뻗었다.
메마른 팔이 절박하게 휘적거렸다.
"미안하지만, 거기도 가 봤었는데 별거 없더라고."
입이 완전히 모아졌다.
콰득! 콰드득!
"끄아아아아!"
틈 사이로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뿜어졌다.
투욱하고.
유일하게 밖을 향해 뻗었던 팔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
"역시……."
저벅.
발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통곡의 마녀로는 당신에게 안 되는군요. 그래도 혹시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정말로 아쉽게 됐습니다."
단군 길드를 상대하고 있어야 할 트리스탄이 어느새 옆에 다가와 있었다.
"네가 자리를 비우면 나머지 석상들이 순식간에 무너질 텐데? 아니, 마녀가 죽었으니 어차피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긴 하겠지만."
"후후. 마녀가 죽었다고요?"
트리스탄이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잘려 있는 팔로 다가갔다.
"마녀란 게 생명력이 제법 질기거든요. 잘 보세요. 이렇게 팔 하나만 남아 있어도."
꾸욱.
트리스탄이 팔을 지그시 밟았다.
그러자.
"아아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몸을 복구하기까진 시간이 걸릴 테지만, 어쨌든 목숨은 건질 수 있죠."
"이…… 이런 빌어먹을 마인 놈이! 어째서 잘 숨어 있는 나를 들통 나게 만든 것이냐!"
통곡의 마녀가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이해할 수 없는 아군의 행동에 분노가 치밀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트리스탄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진혁도 마찬가지였다.
"너…… 어째서 마녀를 배신한 거지?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마녀의 도움이 필요할 텐데?"
"흐음.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저도 한 가지 물어봐야겠네요. 진혁 님은 이곳이 어떤 장소라 생각하십니까?"
"선문답은 싫어하는데……. 내가 묻는 말에나 답하지 그래?"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생각해 보세요."
트리스탄의 생긋 웃었다.
새삼 불길한 웃음이다. 일순간 저 환한 미소가 두렵다고 느낄 정도로.
이 여자가 갑자기 통곡의 마녀를 배신한 이유와…… 적그리스도 무덤의 본질, 그리고 그 조건들.
단서와 단서가 취합된다.
"……."
진혁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가벼운 질문이지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성마소."
이곳은.
적그리스도의 무덤은.
마족을 현현시킬 수 있는 장소다.
"바로 맞추셨습니다."
마력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