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이상적인 마무리
죽음에 대한 공포는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감정이다.
그것이 지금껏 공을 들여 쌓아올린 노력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상태라면 더욱더.
[고유 능력 '검의 무덤'이 발동됩니다!]
[Lv15 '태초의 불꽃'이 발동됩니다!]
진혁이 은근슬쩍 모아 뒀던 마력을 해방했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앙!
하늘에서 검붉게 물든 창 하나가 떨어졌다.
정확히 트리스탄의 정수리를 노린 공격이었다.
"아……."
트리스탄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지금이다.
"피해!"
진혁이 요란한 동작으로 트리스탄을 밀쳐냈다.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찰나.
콰아앙!
창이 지면을 꿰뚫었다.
종이 한 장 차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트리스탄의 머리통에 근사한 장식 하나가 추가되었을 것이다.
"이, 이건……."
"마족의 창이다. 하르간 녀석. 어지간히 화가 많이 났나 보네. 마계로 돌아갔으면서도 이런 걸 남긴 걸 보면."
덜덜덜!
트리스탄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렇게 고고하고 도도했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 자리엔 절망과 공포로 얼룩진 인간이 남아 있을 뿐이다.
덕분에, 사람 하나 조종하는 게 숨 쉬는 것보다 쉽게 되었다.
"저, 저걸로 날 죽이려 했다는 건가요?"
"그래. 아마 이게 끝이 아닐 거야. 지독한 마족의 성격상 성공할 때까지 계속해서 노리겠지."
진혁이 또다시 마력을 끌어 모았다.
허공 위에 새로운 창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스윽.
진혁이 트리스탄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장이라도 쏘아지려던 창들이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보다시피 하르간은 나를 후원하는 마족을 두려워하고 있어. 그리고 그 마족은 내가 하는 말이라면 껌뻑 죽지. 아마, 내 부탁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도와줄걸?"
진혁이 잔뜩 거드름을 부렸다.
적절하게 기척을 감추는 데다, 트리스탄의 넋이 반쯤 나가 있었기에 연기는 극적인 효과를 여과 없이 연출했다.
[신격 '썩어 가는 심장'이 당신의 발언에 강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베리엘이 다급히 상태창을 띄웠지만, 진혁은 그보다 더 빨리 상태창을 닫아 버렸다.
중요한 순간에 방해하기는.
"결정해. 마인들 편에 붙어서 마족에게 죽을지. 아니면, 나에게 붙어 목숨을 부지할지. 마지막으로 선택권을 주도록 하지."
"당신의 말에 따른다면, 그 마족으로부터 날 지켜 줄 수 있다는 건가요?"
"그럼. 지켜 줄 수 있고말고. 든든한 마족이 굽어 살피고 있는 이상,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아도 돼."
[신격 '썩어 가는 심장'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릅니다.]
[개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봐 봐. 위대하신 존재도 기뻐하시잖아. 아주 불꽃놀이를 하고 계시네."
진혁이 허공을 가리켰다,
그곳엔 분노한 베리엘의 마력으로 인해 형형색색의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정말이네요. 상위 마족의 비호……를 받을 수 있다니."
트리스탄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죽음이냐 삶이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약속. 지켜 주세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
물론, 철저하게 지킬 생각이다.
['염혼의 낙인'이 발동됩니다!]
훌륭한 노예로서 말이지.
붉은 낙인이 트리스탄의 살 속으로 파고들자, 결코 거역할 수 없는 낙인이 생겨났다.
좋아.
'가웨인은 죽었고 트리스탄은 회유됐으니, 이로써 남은 마인들은 텅 빈 쭉정이나 다름없는 셈이 되겠지.'
거기에 마인들의 인프라와 내부 정보까지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꽤나 훌륭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띄면 설명해야 할 게 많아질 테니, 다른 쪽 길을 통해 나가. 이후에 내가 접촉하도록 할게."
"……알겠어요."
트리스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통곡의 마녀가 있는 방에서 나온 진혁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 사람들과 합류했다.
그곳엔 초조한 얼굴로 진혁을 기다리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형! 괜찮아요?"
"오빠!"
가장 먼저 이태민과 유연화가 진혁을 반겨 주었다.
단군 길드를 대피시키느라 체력이 완전히 바닥 난 모습이었지만, 진혁이 무사한 모습을 보자 환한 웃음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진혁 님. 덕분에 저희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의식을 차린 단군 길드의 박정진도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도와드리려 한 거였는데, 오히려 도움만 받게 됐네요."
부족한 실력에 대한 자괴감이 섞인 목소리다.
대형 길드에 소속되어 있단 자부심이 넘쳤던 그들이었지만, 이번 레이드를 통해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자신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던 적을 쓰러뜨린 진혁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리 해도 발끝조차 못 따라가겠어.'
'공격대 전체보다 한 사람이 더 대단하다니.'
'대체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 걸까?'
아마 평생을 걸려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 옆에서 함께 싸우는 것조차도.
그 압도적인 재능과 실력에 불평 불만을 가질 법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이런 플레이어가 인류를 위해 시련의 탑을 오르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완전히 인기 스타시네요. 다음번엔 함께하고 싶어도 제 수준으론 기회 자체가 없겠어요."
올림포스의 마리아 역시 진혁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만약, 진혁이 없었다면, 간다라 길드에게 배신을 당해 전멸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었더라도 통곡의 마녀나 마인들에 의해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겠지.
"유럽 최고의 마도사인 마리아 씨께서 무슨 그런 말씀을……. 다 주위에서 잘 도와주신 덕분이죠."
진혁이 점잖게 공을 돌렸다.
그사이에 철이 들었거나 겸손함을 깨달았기 때문은 아니다.
이제 곧, 착하게 지내 온 일에 대한 보상을 받을 생각에 가식적이 될 수 있던 것뿐이지.
[복사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헬 파이어'를 복사했습니다.]
역시나.
처음부터 끝까지. 마리아의 뒤통수를 때리지 않은 덕에 헬파이어를 복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걸로 검은 눈물과 헬파이어 두 개의 스킬을 모두 확보했다.
15층에 와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전부 끝낸 셈이다.
"유천영 어르신도 감사합니다. 무리한 부탁이었는데도 선선히 승낙해 주셔서 한 시름 놓았어요."
"허허. 나야 뭐 한 게 있었는가? 유적의 보스를 정리한 것도. 공격대를 구한 것도 모두 자네 혼자서 한 일이라고 하던데? 무엇보다 내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의 부탁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들어줘야지."
유천영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과거에는 모든 걸 오롯이 혼자서 해결해야만 했지만, 이제는 함께 길을 걷는 동료들이 생겼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등을 맡길 수 있는 그런 소중한 동료들이.
"우리는 바로 15층 보스 레이드에 갈 것 같은데, 오빠는 지금부터 뭘 할 거야? 생각 있으면 같이 갈래?"
"보스를?"
"응. 유적 공략을 성공했다는 소식에 각종 길드에서 대대적으로 나설 모양이거든. 가장 어려운 걸 오빠가 처리해 줬으니, 남은 건 해 볼 만하다는 계산인 것 같아."
보스라…….
15층을 지키는 보스 몬스터는 따로 있었지만, 그다지 영양가는 없었다.
그 정도는 두 사람과 대형 길드에게 맡겨 둬도 충분하겠지.
"아니, 나는 달리 할 일이 있어서. 우선 며칠 정도 푹 쉬면서 체력을 회복하려고."
새로 얻은 스킬들의 연계를 연습부터 융합을 통해 상위 버전의 능력들을 만드는 것까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게다가 이제 슬슬 제국 쪽도 정비를 끝마쳤을 테니, 또다시 거대한 전운이 드리울 터.
이쪽도 그에 대한 대비를 해 둬야 한다.
'이 참에 무림에도 가서 스승님도 만나야 하긴 할 텐데…….'
진혁이 암황을 떠올리더니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 수련을 다시 받아야 한다는 건가.'
지금껏 온갖 변태 같은 과정을 즐겨 온 진혁이었지만, 암황과 수련할 생각을 하자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일어났다.
***
유적 이후 삼 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탑에서 나온 진혁은 그동안의 피로를 풀며, 느긋하게 휴식을 취했다.
말이 좋아 휴식이지. 거의 뻗어 있던 거였지만.
그렇게 컨디션을 완벽하게 회복하자, 진혁은 엘리스와 함께 각성자 협회에서 마련해 둔 특수 훈련장으로 향했다.
"여기야. 프라이버시가 완전히 보장되어 있는 곳이라 다른 사람들이 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S급 이상들부터 이용할 수 있는 개인 수련실.
엘리스가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호오. 이런 것들까지 가능하다니. 인간들이 만든 것 치고는 제법이구나. 한데, 이건 무엇이냐?"
엘리스가 수련실 중앙에 있는 증강현실 장치에 다가갔다.
그러더니 가운데 있는 붉은색 버튼을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대상의 마력을 스캔합니다.]
푸른빛이 엘리스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무엄한……! 감히 기계 따위가 짐의 마력을 파악하려 하는 것이냐!"
엘리스의 붉은 동공이 크게 팽창했다.
바로 그 순간.
우우우웅!
[Lv??? 측정 불가 판정. 시스템이 구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연습 상대를 구현합니다.]
"크오오오!"
홀로그램으로 만든 30m 크기의 대형종이 나타났다.
블랙 드래곤.
전신이 검은 비닐로 뒤덮인 최강의 생명체다.
"드, 드래곤이라고? 어떻게 탑 밖에 드래곤이 있을 수 있는 거지?"
엘리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갑자기 처음 보는 기묘한 형태의 드래곤을 마주하게 됐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하지만, 아무리 최강의 생명체라고 하더라도 진조의 자존심 상 물러설 순 없었다.
"내가 바로 아타락시아의 가주.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다!"
엘리스가 '블러드 로드'를 개방했다.
흐음.
바보 여왕과 기계의 대결이라…….
이건 꽤나 흥미롭다.
어느 쪽이 이겨도 상처뿐인 전투라는 점이 더욱더 매력적이었다.
"죽어! 죽어! 어라? 왜 공격을 다 피하지? 설마, 공간을 왜곡하는 능력까지 갖고 있다는 건가……? 역시 드래곤. 만만히 볼 수 없는 난적이로구나!"
난적은 개뿔.
확실히 바보다.
보통 저 정도 되면 눈치챌 법도 하지 않나?
엘리스가 마구잡이로 공격을 난사하는 동안, 홀로 남은 진혁은 조용히 상태창을 활성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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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강진혁
성별: 남
나이: 27세
레벨: 100
힘 101 민첩 30 체력 40 마력 233 간극 100 행운 10 적응형 78 정기 51.24
보유한 스탯 포인트: 18
보유한 코인: 5,175,356
직업: 룬의 해석사
고유 능력: '융합(融合)', '검의 무덤', '별의 가호', '아누비스의 심판', '혈마기(血魔氣)', '만다라(曼茶羅)', '1초 무적', '천독(千毒)', '하얀 맹수', '만상공유(萬祥共有)', '태양의 성역', '흑천마황공(黑天魔皇功)', '트리플 매직', '거신의 일격', '화룡의 숨결', '고속검(高速劍)', '툼그레이브의 오른팔', '버서커', '바람의 영역', '음영극살(陰影亟殺)', '혈폭(血爆)', '검은 눈물'
스킬: 배운 스킬의 숫자가 너무 많아 '접어 두기' 상태로 전환되었습니다.
결계: 배운 결계의 숫자가 너무 많아 '접어 두기' 상태로 전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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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100.
드디어 자리수가 바뀌었다.
통곡의 마녀와 사도들을 잡고 오른 경험치가 그만큼 굉장했다는 방증이다.
'진짜 시간이 가긴 가는구나.'
한때는 세 자릿수 레벨의 적들을 보며, 언제 저기까지 도달하나 했었는데, 이젠 그 녀석들과 같은 경지에 도달했다.
아직도 전성기에 비하면 멀긴 했지만 말이다.
[민첩이 30 → 39으로 상승합니다.]
[체력이 40 → 49으로 상승합니다.]
비교적 적게 투자했던 민첩과 체력도 올려 줘야 할 때다.
탑의 저층에서야 감각과 경험만으로 스탯의 격차를 극복할 수 있었지만, 중층을 넘어 상층부로 갈수록 스탯의 밸런스 또한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다음은…….
이번 레이드에서 한 고생을 한 번에 날려 줄 대망의 '보상'을 확인할 차례다.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통곡의 마녀를 잡고 얻은 아이템들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