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한국대 의대생은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얻은 아이템은 총 3개.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종류다.
[마녀의 비술서]
[비명을 지르는 사과]
[상급 마정석]
마녀의 비술서는 각종 결계와 저주들이 적혀 있는 고서다.
주로 암속성 계열의 능력들이 주를 이뤘지만, 확실히 대마녀회에 소속된 마녀답게 희귀한 결계와 저주들이 잔뜩 적혀 있었다.
최소한 4성급, 6성급이나 7성급 결계들도 보인다.
그러나 진혁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비술서가 아니었다.
'비명을 지르는 사과'.
이게 나올 줄이야.
망령목(亡靈木)에서 자라는 사과는 마력을 흡수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무리 강력한 마력이라고 하더라도 완전히 먹어치울 수 있다는 뜻이다.
진혁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상급 마정석에서 마력을 추출하면…… 비명을 지르는 사과의 마력 흡수 능력을 증폭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두 개를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얼어붙은 눈물'의 마지막 해동 또한 가능하게 될 거다.
무려 40의 마력을 올려 주는 마지막 단계.
워낙 냉기가 지독해 그동안 아공간 인벤토리 한구석에 처박아 뒀었는데, 드디어 그걸 해치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상급 마정석이 아깝긴 하지만, 마력 스탯과는 비교할 건덕지조차 없다.
진혁이 해골 모양의 보라색 사과를 땅에 던졌다.
"끼야야야야야!"
사과의 입이 위아래로 길게 찢어졌다.
곧, 끔찍한 비명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지금이다!
['비명을 지르는 사과'가 '얼어붙은 눈물의 냉기'를 흡수합니다!]
"꺄아아아아아악!"
'태초의 불꽃'을 통해 녹인 상급 마정석이 사과에 닿자, 비명 소리가 한층 더 거세졌다.
비명 소리는 내상을 입힐 정도로 날카로웠기에, 양 손으로 귀를 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확한 마력과 능숙한 완급 조절이 필요한 영역.
그러나 진혁은 모든 과정을 한 치의 실수 없이 끝마쳤다.
[마력이 233 → 273으로 상승합니다!]
얼어붙은 눈물이 산산이 부서졌다.
4단계의 해동을 통해 모든 마력이 사라진 탓이다.
'진짜 일이 잘 풀려도 너무 잘 풀리네.'
솔직히 말해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아무리 꼼꼼하게 상황을 설계한 덕분이라곤 하나, 모든 과정과 결과들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니까.
아니, 그 정도 수준이 아니지.
이건 예상한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다.
바로 그때였다.
"야! 이거 가짜잖아!"
엘리스의 뾰족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치심과 부끄러움 때문인지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긴, 나 같아도 창피해서 죽고 싶을 것 같긴 하다.
지금까지 홀로그램 드래곤과 영혼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었으니까.
"아니, 너도 알고 있으면 말해 주지. 내가 니네 문명에 대해 잘 모르는 거 알면서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진짜 더럽고 치사하고 서러워서……."
으음. 그렇게 말하니 살짝 미안한 것 같기도 하다.
"알겠어. 사과의 의미로 어디 데려가 줄 테니까 울려고 하지 마. 명색이 진조인데 왜 닭똥 같은 눈물은 흘리고 그래?"
"……놀러 간다고? 어디로?"
엘리스의 목소리가 180도 바뀌었다.
워낙 오랫동안 1층에 유적에 갇혀 있었기에, 새로운 놀 거리라고 한다면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움직였다.
"대학교."
마침, 그쪽에 볼 일이 있다.
안 그래도 지난 며칠간 개인 방송 채널에 댓글들이 폭주하고 있었으니…….
……이번 기회에 그것까지 끝내 버리는 게 좋겠지.
***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대학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모두가 한국대학교를 꼽을 것이다.
선택받은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꿈의 명문대.
그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경쟁률을 자랑하는 과가 바로 '의예과'였다.
"저거 봐. 유성 선배야."
"한국대 의예과 수석 입학에…… 생긴 것도 잘 생겼지. 운동도 잘 하지. 진짜 못 하는 게 뭘까?"
"시련의 탑에서도 상위권 랭커잖아. 올린 영상은 몇 없지만, 올린 것마다 조회수가 전부 장난 아니던데?"
"그 와중에 과 수석은 한 번도 놓치지 않다니. 하. 나는 하루 종일 도서관에 처박혀서 공부만 하고 있는데, 자괴감 든다. 진짜로."
부러움과 감탄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유성.
워낙 얼음같이 차가운 성격 탓에 함부로 다가서지 못했지만, 천유성은 한국대의 그 누구보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녔다.
오죽하면 2회차를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주위의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유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캠퍼스를 거닐었다.
길을 따라 제법 오랫동안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한적한 공터였다.
바스락. 바스락.
수풀이 좌우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린 고양이들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경계심이 심하기로 유명한 새끼 고양이들이었지만, 익숙한 듯 천유성에게 다가갔다.
"먹어라."
천유성이 묵묵히 새끼 고양이용 습식 사료와 기름기를 뺀 닭가슴살을 그릇에 담아 주었다.
담겨 있던 물을 털어내고 깨끗한 물도 새로 부었다.
"냐앙. 냐앙."
"냐아아……!"
고양이들이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다.
골골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그런데.
"……!"
천유성의 기감에 무언가 불길한 게 잡혔다.
교묘하게 숨어 있지만, 예리하게 갈무리된 감각은 상대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네놈……!"
천유성이 단숨에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으악 잠깐. 잠깐만! 나쁜 생각이 있던 게 아니야."
진혁이 다급히 손을 휘저었다.
"나쁜 생각이 있던 게 아니라고? 그럼, 이건 대체 뭐냐?"
천유성이 허공에 떠 있는 수많은 상태창을 가리켰다.
방송 시스템은 이미 수많은 시청자들이 치는 채팅이 가득 늘어져 있었다.
-김진우: 엌ㅋㅋㅋㅋ 들켰다.
-소설중독자: 살인마한테 들킨 줄 알았네. 어우 놀래라.
-큐렘: 눈빛 살벌한 거 보소. 살기 5만 퍼센트!
-JeLuce: 검성형 하이. 하이.
-믐마: 팬이에요! ㅎㅎ!
-Lch: 와 진짜. 예리하다. 이걸 봤다고?
-신명근: 괜히 강하다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구나.
-그렇구나: 그 와중에 새끼 냥이 챙겨주는 거 심쿵사하겠네.
"다른 사람을 도촬이나 하면서 지금 순진한 척 연기를 했던 거냐?"
천유성이 경멸에 가득 찬 얼굴로 혀를 찼다.
"도찰이라니. 이건 그냥 생방송을 켜고 처음부터 끝까지 몰래 촬영한 것뿐이야. 어디서 나를 그런 파렴치한으로 모는 거냐?"
-소윤맘: 그게 그 말 아님?
-Ggo: 술은 마셨지만, 음주 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건가?
-Jackdaw: 판사님 여기 비트 주세요.
-잠충이: 판결 사형.
"……."
천유성이 아공간 인벤토리를 열었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검의 손잡이가 반쯤 튀어나왔다.
"아니, 칼 꺼내려고 하지 말고. 야. 여기 캠퍼스야. 도검류 소지 안 되는 곳이라고."
-qet: 그냥 베어 버리려고 하네. ㅋㅋㅋㅋ.
-피카츄: 이런 짓 했으면 사실 베어도 무죄이긴 함.
-구원의마왕: ㅇㅈ. 지금까지 당한 것만 해도 인간극장 5부작은 그냥 제작 가능하지.
-백설월: 나도 그거 개념글 정독했는데, 심하긴 하더라.
-qpw: 비질란테 식으로 정의 구현이 필요하긴 해.
여론이 급변했다.
다음부터는 간신들로만 채우든가 해야지. 이래서야 위험하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 정말로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변명 정도는 들어주지. 여긴 어쩐 일로 온 거냐?"
"사실, 네 의대 생활을 궁금해 하는 시청자들이 많았거든. 그런데 그 중에서 엄청나게 큰손이 미션 코인을 걸더라고."
처음엔 만 단위의 코인을 미션비로 걸었는데, 그게 판이 커지고 커지다 보니 어느새 30만 코인까지 치솟았다.
"그래서. 방송을 켰다?"
"응."
"내 허락 따윈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응!"
진혁이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장: 타협하기엔 너무 큰 코인이었다.
-꺅: 30만 코인은 킹정이지.
-젼: 영혼까지 팔아 버릴 수 있을 양이긴 함.
-Skskdksdkj: 방금 [30만 코인 입금됐다는 메시지] 올라옴. 미션 성공 ㅊㅋㅊㅋ
'완전히 거저먹기네.'
성공이다. 진혁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냐옹!"
갑자기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깡총 뛰어오르더니 진혁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주인에게 함부로 대하는 게 꽤나 불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귀엽네. 저런 녀석도 주인이라고 따르고.'
그런데.
"……어?"
진혁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어지러움이 전신을 지배했다.
-다: 솔직히 오버하는 거 아니냐? 저 송곳니가 뭐가 아프다고?
-공백: 데미지 1은 박힘?
-한수영사랑해: 오히려 새끼 고양이 이빨이 괜찮을까 걱정해야지.
-dkdjdn: 저 표정. 저 얼굴. 저 동작. 완벽하게 방종각 잡는 거다.
-황규정: 내가 이쪽 바닥 10년 차인데, 저거 연기 100%임.
-플펑: 방종각을 이렇게 잡는 BJ가 있다?
설마…….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고양이 중에 하나가……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다.
정령수.
그것도 독기를 다루는 종류다.
***
눈을 떠 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어떻게 된 건진 모르지만, 의식이 몽롱한 게 제법 오랜 시간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 같다.
어디지? 라는 생각이든 순간.
철컹! 철컹!
온몸이 단단하게 구속되어 있는 게 느껴졌다.
환한 불빛과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리고…….
흰색 가운을 입고 있는 천유성의 모습도 보였다.
설마, 여기는 수술실인가?
"고양이 중에 정령수가 한 마리 섞여 있다. 탑에서 상처 입고 쓰러져 있던 걸 구해 줬더니 계속해서 따라오더군. 마땅히 데리고 있을 데가 없어서 이곳에서 키우고 있었지."
그런 거였나.
"우리 유성이가 인성도 좋아서 그런지 정령수들도 따르나 봐. 근데, 난 왜 묶어 놓은 거야?"
철컹! 철컹!
단단하게 묶어 놨다.
아예 꼼짝도 하질 않네.
"좀 풀어 주고 이야기하면 안 될까? 몸도 정신도 또렷한 게 바로 퇴원해도 될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이런 걸 가볍게 보다가 파상풍으로 팔을 절단해야 할 수도 있다. 방치하다가 패혈증으로 사망할 수도 있지."
아니, 무슨 가정을 해도 최악의 상황만 가정하냐.
"그럼, 병원으로 보내 주면 안 돼? 레지던트까지 다 끝마친 의사 선생님에게 치료받고 싶거든. 아니면 길드의 힐러들도 좋아. 돈이라면 내가 낼 테니까…… 제발."
"섭섭한 말 하지 마라. 의사라면 지금 네 눈앞에 있지 않나? 적어도 동맥하고 정맥을 구분하는 것쯤은 배웠으니까. 왼쪽…… 흠. 어쩌면 아래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아. 너무 걱정 마라. 어차피 확률은 반반이다. 아니, 4분의 1이었던가? 조수. 메스."
천유성이 차갑게 내뱉었다.
"유, 유성아?"
진혁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미친.
잘못하다간 미친 의대생한테 죽을지도 모른다.
본능이 최고조의 위험 경고를 보냈다.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한다며.
"엘리스! 안드리아! 보고만 있지 말고 이것 좀 어떻게 해 줘."
진혁이 옆에 있던 엘리스와 안드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언제 안드리아가 이곳에 왔는지 모르겠지만, 상황을 보건대 엘리스가 연락을 취한 게 분명했다.
"언니. 수혈을 해야 하는 거지. 피를 빨면 안 되지 않아요?"
안드리아가 열심히 빨대를 준비하는 엘리스를 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응? 아…… 이거? 맛만 보려고 하는 거야. 맛만."
엘리스가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낸 채 입맛을 다셨다.
야. 너희가 그러면 안 되지.
간호사복까지 갖춰 입어 놓고 지금 환자의 생명을 빼앗으려 하는 게 말이 되냐?
안드리아야. 너라도 정신 좀 차려라. 넌 뱀파이어도 아니면서 왜 수긍을 하고 있는 건데?
어서 빨리 막아. 막으라고!
진혁이 미친 듯이 몸을 버둥거리고 있을 바로 그때였다.
"모오오기……!"
고구마가 주인을 구하기 위해 한 걸음에 달려왔다.
[고구마가 Lv12 '피어'를 발동합니다!]
쿠쿠쿠쿠쿠!
수술실 전체가 격동했다.
위풍당당 날개를 펼치는 게 영락없이 고대종의 위엄이 느껴졌다.
거기에, 5대 원소의 정령수들과 티본까지 나타났다.
"그래, 잘한다. 나는 너희를 믿고 있었어."
"모기! 모기!"
"전부 해치워 버려. 브레스로 저 은혜도 모르는 놈들을 다 쓸어 버리란 말이야!"
진혁이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이어지는 천유성의 말에.
"듣자 하니…… 고대종은 마정석을 좋아한다고 하더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