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천마신교(天磨神敎) (2)
터질 듯한 근육질의 노인.
이자가 바로 천마를 보좌하는 두 호법 중 하나이자, 흑천마황공을 창시한 인물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승님."
진혁이 생긋 웃었다.
"오냐.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혹시라도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허약해졌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기우였던 모양이구나."
암황이 껄껄껄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옆에는 제국에서 만났던 백사와 음영대 소속 고수들의 모습도 보였다.
"하하하. 기우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강시까지 보내셨군요. 하마터면 십만대산이 아니라 북망산으로 떠날 뻔했습니다. 이럴 거면 아예 음양강시라도 보내시지 그랬습니까? 아예 혀 깨물고 죽어버리게."
"뭐, 무사하면 됐지. 너무 불평하지 말거라. 명색이 내 제자라면 이 정도 쯤은 눈 감고도 처리해야 하는 법이다."
"아직 배운 게 없습니다만……."
"험! 험!"
암황이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민망했는지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월영 말고도 손님이 있는 줄 몰랐는데, 저자는 네 동료인 것이냐?"
암황의 시선이 엘리스에게 향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에 있는 본질까지 감출 순 없었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기운이 가면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암황의 기에 호락호락 당해 줄 엘리스가 아니었다.
파츠츠!
스파크가 일어나며, 이질적인 기운이 상쇄되었다.
순간, 땅에 있는 자갈 하나가 퍽 소리를 내며 가루로 변했다.
"호오?"
암황의 입에서 묘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숨 막힐 듯한 신경전.
공기가 급변한다.
"……."
엘리스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걸어 온 시비는 피하지 않겠다는 듯, 여차하면 고유성창이라도 꺼낼 기세다.
젠장. 하여간 자존심만 센 것들이 이래서 문제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다 엎어 버리고 시작했으니까.
바로 그때.
"……요놈. 보아하니 꽤 훌륭한 반려자를 찾은 모양이구나. 실력도 빼어나고 그 안에 담긴 기도 전형적인 마교의 그것과 같아. 흐음. 이런 자라면 당연히 본교 안으로 들어와도 된다. 내가 허락 하마."
"……예?"
"응?"
진혁과 엘리스가 동시에 외쳤다.
"자. 그럼 어서 가자꾸나. 시간이 지체된 탓에 해가 지기 전에 가려면 서둘러야 한다."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암황이 앞장섰다.
"흐응 흥. 흥."
기분이 좋아졌는지, 엘리스가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 전 뿜어냈던 투기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넌 뭐 감정 기복이 그리 심하냐? 스승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그랬는데, 이젠 저 할아버지 마음에 들어. 헤헤."
엘리스가 가벼운 발걸음을 총총거리며 옮겼다.
뱀파이어 특유의 마력과 마교의 마기가 유사하다는 게 그렇게 마음에든 건가?
하여간, 절대자급 되는 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진혁과 암황과의 거리가 제법 멀어졌을 무렵.
선두에 있던 암황의 곁에 백사가 다가갔다.
굳은 얼굴에서 느껴지는 건 분명 걱정과 염려이리라.
"정말로 저자를 제자로 맞이하시려는 생각이십니까? 본교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고 하물며 무림인도 아닌 자를……."
백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염려 말거라."
"……허나, 지존. 지금 본교에는 흩어져 있던 3대 고수들이 모두 돌아와 있습니다. 게다가 10년의 폐관 기간 동안 세 명의 고수가 새로 추가된 상황 아닙니까?"
"좌호법이 직접 뽑았다는 놈들 이야기더냐."
천마와 두 호법 그리고 심마사령을 포함해 총 10명의 고수들이 오늘 모두 한자리에 모인다.
"예. 안 그래도 칼날 위를 걷는 듯 예민한 상황인데 괜히 새로운 자극 거리를 제공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좌호법은…… 속을 알 수 없는 자입니다."
천마라는 거대한 대들보 아래 모인 게 바로 자신들이었으나. 좌호법만은 달랐다.
야망.
겉으로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아도. 그의 속에서는 뜨거운 쇳물과 겁화가 펄펄 끓고 있었다.
그런 살무사들 사이에서 약점을 잡힐 빌미를 준다는 게, 백사로서는 너무도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마교란 본래 누군가를 죽이고 그것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자들이 모인 집단이었으니까.
그러나.
"백사."
암황의 표정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예, 예?"
"본좌는 분명 괜찮다고 하였다."
그저 말할 뿐이다.
오롯이 혼자 결정할 뿐이다.
천마 외에는 그 누구도 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었기에.
그리고 한 번 품에 품기로 결정한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버리지 않았기에.
"분명, 우리 둘이 만난 기간은 길지 않다. 네가 말한 대로 그 뿌리는 무림에 있지도 않지. 그럼에도 나는 저 녀석을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마치, 오랜 세월을 함께한 것만 같은 친숙함과 그리움이 느껴졌을 뿐.
"나는 내 감을 믿고 싶구나."
흐르는 바람 너머, 암황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그 미소는 지금껏 암황이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못한 미소였다.
"존명."
백사가 고개를 숙였다.
***
천마신교의 본당.
천마전(天魔殿).
비어 있는 상석의 좌우로 6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이들이 바로 천마신교의 10대 고수들이다.
"두 호법과 심마사령은 그렇다 치더라도 천마께선 아직도인가? 폐관 이후 좀처럼 뵐 수가 없군. 혹시라도 뭔가 잘못된 건 아니신지 염려가 될 지경이야."
검버섯이 핀 데다 비쩍 곯은 외모를 가진 노인이 입을 열었다.
서열 8위,
독련수(毒蓮手)라는 별호를 가진 독고룡이었다.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것 보다는, 오히려 잘못 되길 바라는 말투다.
"어마나. 다 늙은 분께서 권력에 욕심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천마께선 정정하시니 염려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녀가 보장하죠."
소수환녀(素手幻女) 소호향이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서열은 5위로. 소수마공을 극성한 고수답게 미소만으로도 주위의 공기가 달짝지근하게 변했다.
"큭! 요물 같은 암여우 주제에 누가 권력에 욕심이 있다고 지껄이는 것이냐?"
"제 눈엔 완전히 그렇게 보였는데, 아니면 말고요."
소호향이 생긋 웃었다.
"하여간, 오랜만에 만나서 신경전이나 하다니. 천박하군요."
"크크크. 하긴, 우리가 안부나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시시하긴."
나머지도 한 마다씩 덧붙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콰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내전의 문이 박살났다.
"껄껄껄. 이거 내가 너무 늦었군. 천마께선…… 흠? 아직 내전엔 안 오신 모양이구만."
암황이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거야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었다. 기물을 파손하는 것 또한 모두에게 익숙한 일이었고.
그러나.
그 기행에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특히나 천마를 보좌하는 두 호법 가운데…….
……우호법의 직책을 맡고 있는 자라면 더욱더.
"암황, 아니, 우호법! 그자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독고룡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이곳은 천마전.
허락받은 이들 외엔 들어올 수 없는 금역이다.
그런데 처음 보는 외지인이 떡하니 발을 들였으니 당연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살살 말하게. 다 들리니. 이들은 내 제자와…… 음. 그 정혼자일세."
"제, 제자라고요?"
"……우호법이 제자를 들였다는 말씀입니까?"
"설마……."
암황의 말에 이번엔 여기저기서 믿을 수 없다는 듯 탄성이 흘러나왔다.
터무니없이 강한 무력으로 단숨에 우호법의 자리에 오른 암황이었지만, 정작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명의 제자도 들이지 않았다.
천마신교의 그 누구도 암황의 눈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흑천마황공을?"
"그래. 사용할 수 있다."
흑천마황공(黑天魔皇功).
암황의 독문무공으로 수많은 기재들이 그걸 배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부 실패했다.
기껏해야 그걸 단순화시킨 흑천공이란 무공을 흉내 내는 게 한계였지.
그런데. 그걸 익히다니.
만약 암황이 직접 말하지 않았다면, 결코 믿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우호법께서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요. 혹시, 저자가 몇 성의 경지에 도달한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4성이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에 준하는 무공을 무리 없이 펼치는 걸 본좌가 직접 보았다."
"기, 기본 초식을 쓰는 게 아니라 4성의 경지……에 들어섰다고요?"
"저 나이에 그게 가능할 줄이야."
"……괴물……이라는 뜻인가."
모두의 시선이 진혁에게 향했다.
숨이 턱 막힐 듯한 압박감 속에서도 태연하게 서 있는 걸 보면, 확실히 평범한 놈은 아니다.
그렇다고 4성의 경지라니.
흑풍회의 회주인 양호명조차 흑천마황공이 아닌 흑천공 3성을 이루는 데 1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래서 저자를 본교에 입교시키기 위해 데려왔다는 말씀이군요."
"아니, 내 제자에겐 본좌와 동일한 권한을 줬으면 한다."
"우호법과 동……일한 권한을요? 지금, 소녀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거겠죠?"
"제대로 들었으면서 뭘 또 묻는 건가?"
"그러니까. 우호법의 제자이면서 본교를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지만……. 저희 교리는 따르지 않겠다는. 한 마디로 제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바로 그런 말일세."
암황이 정확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우호법! 지금 제정신인가요?"
"푸하하하! 이거 노친네께서 망령이 드셨나. 10년의 폐관 동안 뇌까지 썩어 문드러지신 게요?"
"조금 쓸 만한 인재라고 해서 그런 특별 대우는 말이 되질 않습니다. 게다가 이 모든 건 우호법의 말 외엔 증명할 길이 없지 않습니까?"
"흐음. 역시 이런 반응이구나."
암황이 진혁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허면, 보여 주거라. 네가 어째서 특별대우를 받아야만 하는지."
그리고.
"본좌가 어째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너를 제자로 받기로 결심했는지."
전부.
"알겠습니다."
진혁이 앞으로 나섰다.
***
천마신교의 10대 고수.
몇몇이 빠지긴 했지만, 이름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오싹해질 정도의 강자들이다.
하나에 특화된 무공을 익힌 데다, 실전 경험 또한 지금껏 상대해 왔던 무림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굉장하긴 하네.'
진혁이 앞에 있는 고수들의 면면을 살폈다.
서열 5위부터 10위까지.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괴물들이다.
하지만, 저들이 모두 한꺼번에 덤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나름대로 높으신 분들이라 체면 때문이라도 함부로 나서지 못할 테니.
"우호법의 제자를 상대로 저희가 직접 나선다면 꼴이 우스워질 터. 저희도 제자를 불러 상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소희."
"예. 단주님."
소호향의 부름에 앳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소호향의 허락을 얻자 천마전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스릉!
칼집에서 나온 검이 눈부신 검광을 흩뿌렸다.
음기가 지독하게 깔리는 걸 보니, 저 소녀도 소수마공을 익힌 모양이다.
하지만, 바로 그때, 독고룡이 끼어들었다.
"아니, 너흰 나서지 마라. 이번 일은 내 쪽에서 매듭짓겠다."
"어머나. 당신이 적극적으로 나서다니. 웬일이시죠?
"내가 나서겠다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후후. 뭐 마음대로 하세요. 우호법에게 쌓인 감정이 많은 분이니 이번만은 특별히 소녀가 양보해드리겠답니다."
쿵! 쿵!
독고룡이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두 번 내리쳤다.
"패각!"
날카로운 음성에, 그림자가 하나가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우호법께서 제자 하나를 맞이하셨다고 한다. 본교의 서열이 얼마나 지엄한지 직접 알려주도록 해라."
"흐흐. 그런 거라면 맡겨만 주십시오."
비릿한 미소와 함께, 패각이 진혁에게 다가갔다.
"모처럼 어린 후배를 어루만져 줄 수 있겠군. 그래. 본교에 온 소감이 어떠하더냐? 병상에 눕기 전에 경치라도 많이 봐 뒀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자연 경치도 좋고 다 좋았습니다. 늙은 선배님이 꼰대 짓을 하기 전까진 아주 완벽한 하루였네요."
"뭐, 뭐라고? 꼬, 꼰대 짓?"
"그리고 어루만지실 거면 애먼 남의 몸 만질 생각 마시고 그 땟국물 흐르는 본인 얼굴이나 좀 어루만지십쇼. 무공 훈련이니 내공 증진이니……도 물론 좋습니다만, 적어도 세수는 좀 하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주 그냥. 이게 개방의 거지인지 천마신교의 고수인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벽곡단만 먹고 검만 휘두르니 오죽하겠느냐마는…….
"명색이 암수라는 사람이 온몸에서 시궁창 냄새를 풀풀 풍겨서야 100리 밖에서 걷고 있는 유성이 녀석도 선배님 숨어 있는 곳을 알 것 같은데요?"
이건 뭐, 거의 걸어 다니는 광고판 수준이다.
"네…… 네놈이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알기나 하는 거냐?"
"에이. 제가 말했는데 설마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습니까? 제가 선배님처럼 덜떨어진 머저리도 아니고."
"우…… 우아아아악!"
참다못한 패각이 자리를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