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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285화 (286/653)

285화. 야차(夜叉) (5)

파앙!

카카카캉!

공중에서 창과 창이 격돌했다.

'블러드 로드'를 발현시킨 엘리스가 창을 자유자재로 다뤘다.

정확히는 손으로 휘두른다기보단 마력을 이용해 조종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툭.

가볍게 착지한 엘리스가 블러드 스피어를 바람개비처럼 회전했다.

"레이피어보다는 단연 이쪽이 더 취향에 맞지."

길게 묶은 은발이 허공 위를 흩날렸다.

동시에, 창끝이 채홍아의 심장을 향해 폭사되었다.

피할 엄두조차 내기 힘들 만큼 빠른 일격.

콰아앙!

"큭!"

불꽃이 일어나며, 채홍아의 몸이 튕겨나갔다.

"헤헤."

엘리스가 힐끗 진혁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귀를 쫑긋 세운 채 주먹까지 꼭 쥔 게, 아주 칭찬해 달라고 안달이 난 강아지 같다.

물론.

진혁의 정신은 온통 야차에게 향한 상태였다.

엘리스가 발끈했다.

"이래도 안 봐? 이래도? 이래도?"

창 놀림이 더더욱 거세졌다.

잔영을 지우는 찌르기는 일품이라는 말 외엔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걸리라는 물고기는 안 걸리고 엉뚱한 쪽이 반응했다.

"제법이네요. 무림은 물론, 제국의 기사들 중에서도 이 창을 십 합 이상 받아낸 이가 손에 꼽는데 말입니다."

창술에 관해서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닳고 닳은 채홍아였다.

그런 그녀의 눈엔 확실히 보였다.

지금 엘리스가 간격을 조절하는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아마 수많은 사선을 넘고 그보다 더 많은 전투를 치러 왔겠죠. 어쩌면 당신이 저 남자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더 강하다고? 계약자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노련함만큼은요. 천마전에서 가면을 쓰고 있을 땐 몰랐는데, 이렇게 어린 분이었다니. 더더욱 놀랍네요."

"더 더 해 줘."

"네?"

"훨씬 많이. 더 많이 많이 칭찬해 달라고."

엘리스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어느새 목소리까지 근엄하게 가라앉은 건 덤이다.

"빨리. 하나부터 찬찬히 말해 봐. 이 몸이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밤새도록 들려달란 말이야!"

엘리스의 콧대가 하늘 위로 승천했다.

지켜보던 진혁이 혀를 찼다.

으음.

그동안 쌓인 게 많았긴 한 모양이다.

하긴, 고고한 아타락시아의 가주인데, 매일 구박받고 멸시받느라 맘고생을 많이 하긴 했지.

뼛속까지 여왕님일 텐데 현실은 불가촉천민 대우를 받고 있으니 누군가의 인정이 목마를 수밖에 없다.

엘리스와 채홍아의 싸움이 멈칫한 사이.

월영은 독고룡을 상대했다.

"크윽. 월영! 네놈 따위가 감히 나에게 칼을 들이대? 눈도 못 마주쳤던 주제에 아주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왔구나!"

"한땐 그랬었지. 서열 10위권에 있는 당신은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위치에 있었으니까."

"한땐? 그렇다면, 지금은 아니란 말이냐?"

"보다시피."

월영이 칼을 앞으로 뻗었다.

"어이가 없군. 그동안 실력이 일취월장했을 리는 없고. 무슨 이유 때문에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게 된 거지?"

이유라.

별거 없다.

그저…….

"당신보다 강한 분 밑에서 있었거든."

함께 싸웠고. 어떻게 싸우는지. 그리고 어떻게 싸워야하는지 지켜봤다.

치가 떨리는 강함이야 당연한 거였고.

적아군을 가리지 않고 철저하게 찍어눌러 버리는 냉혹함은 솔직히 같은 편이라고 해도 두려울 정도였다.

칼로 찌른 뒤에 소금을 뿌리고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격이랄까?

차라리 깔끔하게 죽여 주는 게 자비롭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겪다 보니…….

"당신쯤은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호랑이처럼 보이던 독고룡이 이제는 고양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크크…… 크하하!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까먹은 모양이로군. 너 혼자서 나한테 덤빌 정도면 정말 세월이라는 게 망각의 지름길이긴 한 모양이다."

스르륵!

독고룡의 팔이 녹색으로 물들었다.

독련수.

피부에 닿기만 해도 일각을 버티지 못하고 살이 썩어 들어가는 맹독이다.

하지만, 뿜어진 운무가 월영에게 닿기 직전.

뒤에서 있던 고구마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모기! 모기! 모오오기!"

[고구마가 '에시드 브레스'를 사용합니다!]

콰콰콰콰콰콰!

녹색 구름 위로 그보다 더 짙은 녹색 섬광이 가로질렀다.

"내, 내 독보다 더 수준이 높은 독이라고?"

독고룡의 입이 벌어졌다.

그러나 놀랄 새도 없이 '음영극살'을 통해 등 뒤에서 나타난 월영의 기습을 막아내야만 했다.

***

진혁이 전체적인 전투를 살폈다.

'뇌령단도 제법이긴 하지만, 정령수들한테는 안 되지.'

그동안 혹독하게 굴려댄 탓에 5마리의 정령수들은 한 몸 같은 호흡을 구사했다.

고구마와 월영도 훌륭하게 상대를 밀어붙이고 있는 상태. 혼자 여왕님 놀이를 하고 있는 엘리스만 빼면 커다란 변수는 없어 보였다.

이제 남은 건 포악하게 어금니를 드러내고 있는 맹수뿐.

바로 그때.

저벅.

진혁의 곁으로 암황이 다가왔다.

복잡한 심경이 담긴 얼굴이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바닥에 남아 있는 흔적을 보아하니, 흑천마황공의 1식과 3식을 쓴 모양이더구나."

"……예."

"처음부터 궁금했다. 탑의 외인이 알 수 없는 본좌의 독문무공을 어째서 너는 이토록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지."

연륜마저 느껴지는 그 기운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분명, 무수히 많은 노력과 수련이 뒷받침되어 있을 테지.

"그건……."

진혁이 말끝을 흐렸다.

"괜찮다. 캐물으려고 한 말은 아니니까. 말할 수 없다면 그걸로 족하다."

암황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설령 거짓말을 하더라도 상관없다. 그렇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본좌는 이미 너를 받아드리기로 결정했다."

그래…….

스승님은 항상 이러셨지.

플레이어들이 모두 떠나버린 세계 속에서도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

그때는 스승님을 인격이 없는 탑의 거주자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정을 주지 않고 싶었다.

어차피 프로그램의 일부일 뿐인 NPC에게 정을 주는 행위 따윈 상처만 남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탑을 오를수록. 탑의 정상에 다가갈수록. 그렇게 생각하며 거리를 두었던 자신이 미친 듯이 후회스러웠다.

'……후회는 한 번으로 족하겠지.'

"정식으로 이름을 묻겠다."

"강진혁."

암황의 질문에, 진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강진혁입니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배사지례는 권을 나누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무림에서 타인을 배신하고 속이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말로는 함께한다 했으면서도 뒤에서 칼을 찌르는 게 약육강식의 세계인 것이다.

허나.

스승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제자를 배신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버릴 수 없고 자식이 부모를 버릴 수 없듯.

스승과 제자 역시 서로에게 등을 돌리지 않는다.

"진혁아. 너는 본좌가 받는 첫 번째 제자일 것이며, 동시에 본좌가 받는 마지막 제자일 것이다."

그렇기에.

제자를 해하려는 놈은 용서할 수 없다.

"보고 느끼거라. 너라면 그것만으로도 많은 공부가 될 터이니."

암황이 야차 앞에 섰다.

"크으으……."

흰자를 드리운 야차가 낮게 포효했다.

이성은 사라졌지만, 본능적으로 눈앞에 있는 상대가 위협적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몸에 있는 탁기는 기존에 있던 게 아니구나. 멍청한 놈들이 도깨비 불을 넣은 탓인가……. 허허. 그것도 누군가 장난질을 해 둔 걸 넣었군. 몸속이 아주 엉망이야."

암황이 착잡한 눈으로 야차를 바라봤다.

그 말대로 야차의 상태가 눈에 띄게 이상해지고 있었다.

과부하가 걸린 힘은 절정을 넘다 못해 폭주했고. 이내 몸을 붕괴시켰다.

맞지 않은 연료를 몸에 넣은 것처럼. 야차는 스스로를 불태우며 자멸하고 있는 중이었다.

"크아아아!"

"언젠가 너와 다시 싸우게 될 날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이제 그만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마."

쿠쿠쿠쿠쿠!

암황의 몸 주위로 검은 기운이 솟구쳤다.

흑천마황공.

12식.

일극지합(一極支合).

흑천마황공의 12식이자 암황이 보유하고 있는 최강의 초식.

알고 있다.

저 움직임. 저 동작.

하나하나를…….

본래라면, 족히 1년을 수련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이론상으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공과 수련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초식은 그저 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진혁의 몸이 반사적으로 꿈틀거렸다.

바로 그때.

야차와 암황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아앙!

무지막지한 내공이 격돌했다.

기교 따위는 없는 순수한 무력의 대결.

퇴로를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모든 공격 하나하나가 상대의 생명을 빼앗기 위한 절초였다.

괴력난신으로 전신을 감싼 야차가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둘렀고.

암황은 그에 맞서 흑천마황공의 12식을 사용했다.

단전에서 흘러나온 기를 상체로 모조리 끌어올리는 게 보였다.

분명 이 다음은…….

'려원(攦圓)'

암황과 야차 사이에 검은 원이 생겼다.

저것이 바로 극을 맺기 위한 시작이다.

그리고 진혁은 자신도 모르게…….

그 동작을 따라했다.

'해원(垓圓)'

야차의 등 뒤로 하얀 원이 새롭게 나타났다.

***

암황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이럴…… 수가."

무언가에 오염되어 고통에 겨워하는 야차의 숨통을 끊기 위해 보인 12식이다.

제자에게 앞으로 가야 할 흑천마황공이 무엇인지를 견식하게 해 주기 위한 12식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그걸 한 번 보고 따라했다고?

재능이나 노력의 영역 따위가 아니다.

불가능의 영역.

'……진짜 괴물은 따로 있었군.'

암황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진혁이 그린 원을 바라봤다.

그렇게.

일극으로 발현되어야 할 12식의 방점은.

[12 초월식(超越式), '쌍극지합(雙極支合)'이 발현됩니다!]

두 개의 극을 잇는 선이 되어 이어졌다.

백과 흑.

빛과 어둠이 야차의 심장을 꿰뚫었다.

퍼퍽!

최후의 순간, 야차는 공격을 막지 않았다.

재생 또한 하려 하지 않았다.

흐릿했던 눈동자가 초점을 되찾았을 땐. 녀석은 분명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

이 빌어먹을 악몽에서 벗어나게 해 줘서 고맙다면서.

쿠웅!

야차의 몸이 좌로 쓰러졌다.

바로 그 순간.

진혁의 눈앞에 무수히 많은 상태창들이 나타났다.

띠링! 띠링!…….

[기여도 70%를 인정받았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야차의 죽음으로 인해 복사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고유 능력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복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괴력난신(怪力亂神)]

입수 난이도: 측정 불가

내용: 근접계 고유 능력으로 시전자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현이 가능합니다. 상대에 대한 공포내성이 생기며, 물리 방어력과 마법 방어력이 30%씩 상승합니다.

['야차의 손목보호대'를 얻으셨습니다.]

[특수 아이템 '태산검'을 얻으셨습니다.]

['야차의 단약'을 얻으셨습니다.]

['야차의 비급서'를 얻으셨습니다.]

무려 8레벨.

거기에 새로운 능력과 심상치 않아 보이는 아이템들까지 손에 넣었다.

하지만, 승리를 알리는 문구에도 불구하고…….

진혁의 얼굴에선 기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탐식의 눈'이 본 건 아이템이나 보상에 관한 상태창만이 아니었다.

야차가 도깨비 불에 잠식되었을 때부터 느꼈던 위화감.

그 정체가 무엇 때문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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