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속사(速射)의 랭커 (2)
"다, 당신은……!?"
에이단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설마 그 당사자를 직접 만나게 될 줄이야.
그것도 자신이 공대장으로 있는 레이드에서 말이다.
"강진혁이라고 합니다. 타이탄 길드의 공격대 분들 맞으시죠?"
진혁이 짧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렇습니다. 공대장인 에이단이라고 합니다."
"와. 와……! 세상에나. 저는 메, 메이링이라고 해요. 공격대의 메인 딜러를 맡고 있어요."
메이링 역시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유명한 연예인이라도 만난 것 마냥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강진혁이라면……."
"한국의 그 랭커잖아? 봐. 잭. 저 플레이어가 강진혁이라고."
"나도 알아. 지금 각종 매스컴에서도 완전 난리가 났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거대 길드의 마스터들도 한 수 접어 둔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었어. 에이단 씨가 저렇게 주눅 든 건 처음 보는데?"
공격대 사이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분명, 유적 입구에 저희 길드가 공략 중이라는 표시를 남겨 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깃발이라면 저도 봤습니다. 하지만, 유적 내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어 부득이하게 개입하게 됐습니다."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요?"
"에이단 씨도 느끼지 않았습니까? 유적에 있는 마수들이 굉장히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걸요."
"그, 그렇습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긴 했는데……."
걸렸다.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아마, 누군가 개입한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돼요."
"설마, 마인 놈들이 수작을 부렸다는 말씀입니까?"
에이단이 대번에 범인을 특정 지었다.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있는 놈들은 그 녀석들뿐이었으니까.
"맞습니다."
-아니, 상급 관리자가 테스트를 위해 올린 거다.
"누군지 몰라도 아주 사악하고 이기적인 놈이겠죠. 본인의 이득을 위해서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는 층계 보스 공략의 난이도를 올렸으니까요."
-원흉은 나고.
그건 사실대로 말할 수 없으니, 적당히 박살난 채 탑 어딘가에 숨어 있는 마인들을 팔도록 해야지.
"유적에 마인들까지 개입됐다니. 그래서 심상치 않다고 하신 거군요."
"예. 잘못하다간 전멸할지도 모릅니다."
정확히는, 무리기도 했지만 혼자 보스를 잡아야 한다는 이유가 더 컸다.
모두의 시선이 에이단에게 향했다.
전멸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낳게 될지도 모르는 결정.
잠시 고민하던 에이단이 결정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실제로 저희가 알고 있던 것보다 유적 내부의 난이도가 비정상적으로 올라갔고. 강진혁 플레이어님 또한 위험성을 경고하시니, 제가 더 이상 객기를 부릴 순 없겠죠."
호오.
이것 봐라.
생각보다 의외로 쉽게 포기하는데?
"현명하신 선택……."
"대신."
에이단이 한 마디 덧붙였다.
"보스는 몰라도 네임드 몬스터 하나는 사냥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지금 에이단은 명분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최상위 랭커인 진혁이 위험하다고 한 유적에서 네임드 하나를 타이탄 길드가 처리하는 데 일조했다면…….
그건 실패한 레이드가 아니다.
오히려 극악의 상황 속에서도 유의미한 성과를 낸 것이지.
그것까지 계산한 에이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거래를 제안한 것이다.
'나야 내 마음대로 이곳저곳 다니고 있긴 하지만, 남의 영업장에 밥숟가락을 얹어버린 꼴이긴 해.'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유적이나 던전의 소유권도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각 길드는 층계에 있는 수많은 던전들을 먼저 선점했고. 그 권리를 사고팔았으니까.
"알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상관없을 것 같네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만 아니라면 괜찮다.
대형 길드 중 하나 정도는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두고 싶기도 했고.
***
진혁이 합류함에 따라 공격대의 배치가 새롭게 조정되었다.
"네임드가 있는 곳까진 저희가 뚫어 보겠습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은 마력을 보존해 두셨다가 중요할 때 사용해 주세요."
"예? 아니 그럴 필요까진……."
"아닙니다. 저희도 밥값은 해야죠."
에이단이 완고하게 말했다.
무임승차나 하려고 하지 않는 모습은 꽤나 마음에 든다.
책임감이 있는 것도 그렇고.
반면.
"하. 아니, 에이단 형씨. 뭘 그리 굽신대는 겁니까? 우리끼리도 충분한데."
얼굴에 붉은 문신을 한 남자가 불편한 기색을 잔뜩 드러낸 채 빈정거렸다.
느껴지는 기운이 결코 에이단이나 메이링의 아래가 아니다.
또 다른 S급.
그것도 굉장히 생소한 종류의 마력을 지닌 남자였다.
"입조심해라. 공대장인 내가 결정한 일이다."
"예이, 예이. 저는 단지 같은 S급끼리 뭘 그렇게 저자세로 나가는지 그게 이해가 좀 안 됐던 것뿐입니다."
남자가 끝까지 이죽거렸다.
"죄송합니다. 저 친구가 이번에 S급이 됐는데, 아직 바람이 덜 빠져서요. 제가 나중에 단단히 주의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뭐, S급의 반열에 올라왔으니 자신감이 넘칠 만도 하겠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공격대가 동굴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말을 걸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던 메이링이 쪼르르 다가왔다.
"강진혁 플레이어님에 비하면 한참 아래이긴 하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이래봬도 저희가 유적 레이드에 투입되는 타이탄 길드의 메인 공격대 중 하나거든요."
"공격대 중 하나라는 건, 뒤에 다른 공격대가 또 올 거라는 뜻인가요?"
"네. 만약 저희 선발대가 중간 지점까지 가서 베이스캠프를 만들었다면, 본대와 후발대로 3개 공격대가 더 투입될 예정이었어요……. 이번엔 네임드까지만 잡고 빠지게 됐지만요."
에이단과 메이링 그리고 저 뒤에서 재수 없는 말을 내뱉었던. 얼굴에 붉은 문신을 한 남자까지.
S급이 세 명이나 있으니 선발대로선 충분하다 못해 과한 전력이었다.
여기에 3개 공격대가 더 투입된다라…….
새삼스레 대형 길드가 보유하고 있는 랭커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바로 그때.
조잘조잘 떠들던 메이링의 얼굴이 180도 달라졌다.
"다들 준비하세요! 옵니다!"
몸이 먼저 반응한 것처럼 메이링이 지팡이를 앞으로 뻗은 채 마력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쿠!
"키에에에!"
"케에엑!"
어두운 통로를 따라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강력한 마력이 피부에 닿았다.
[메이링이 Lv17 '체인 라이트닝'을 발동합니다!]
메이링이 전격 마법을 캐스팅했다.
동시에.
사사삭!
츠츳!
통로의 벽을 타고 붉은색 외피를 가진 벌레들이 기어왔다.
숫자는 열일곱 마리.
하지만, 하나같이 우습게 볼 수 없는 종류다.
파츠츠츠!
수인이 맺히며, 노란색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퍼어엉!
번개가 벌레 한 마리를 꿰뚫고 다음 벌레까지 이어졌다.
내부를 새카맣게 태워 버릴 만큼 위력적인 전격 마법이었지만…….
"키에에에!"
"케에엑!"
잠시 속도를 늦췄을 뿐.
벌레들은 여전히 건재했다.
"어떻게……!?"
메이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탐식의 눈'을 가지고 있는 진혁의 눈엔 분명 보였다.
타 버린 속살이 급속도로 재생되는 모습이.
"바로 다음 캐스팅 준비해! 그동안은 우리가 막는다!"
그렇다면 이제 탱커들의 차례다.
[에이단이 고유 능력 '벵가드의 약속'을 발동합니다!]
[물리 방어력과 마법 방어력이 3분간 100%만큼 상승합니다!]
[몬스터의 어그로가 탱커진에게 집중됩니다!]
에이단이 높게 치켜든 전투 도끼로 지면을 내리쳤다.
콰아앙!
메이링과 딜러들을 노리려던 벌레들이 곧장, 방향을 선회해 에이단과 탱커들에게 향했다.
날카로운 발톱과 거대한 방패, 육중한 둔기들이 정면에서 충돌했다.
"어그로 튀지 않게 관리해!"
"힐! 사이클 쉬지 않게 계속해서 넣어 줘. 빨리!"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한순간의 방심이 죽음으로 연결되는 접전.
자로 잰 듯한 연계 동작과 화려한 광역 딜링이 펼쳐졌다.
특히나, 메이링이 10마리가 넘는 벌레들을 묶고 에이단이 전투 도끼로 박살내 버리는 광경은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래서야 하루 종일 걸리겠네.'
진혁의 눈엔 이 모든 게 느려 보였다.
타이탄 길드의 랭커들이 S급의 실력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효율성이란 측면에서 볼 때, 이들이 하는 방식은 너무 안 좋았다.
재생 능력이 있는 벌레들을 상대하려면 광역 딜링이 아닌 정밀 타격이 요구됐으니까.
무엇보다 너무 강한 적들을 만나서 그런가?
S급이라고 해도 수준이 너무 낮아 보인다.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진혁이 움직였다.
"저, 저희끼리도 충분히……."
에이단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이미 승기는 잡았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충분히 뚫어낼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시간이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요."
아직, 공격대 중에선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통로를 따라 더 많은 수의 벌레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엔 네임드 몬스터인 나비 녀석이 있었고.
진혁이 일렁이는 공간 너머에서 크루거를 꺼냈다.
은빛을 머금은 두 자루의 권총이 부드럽게 뽑혔다.
"총? 강진혁 플레이어님 무기가 총이었어요?"
메이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검을 사용할 줄 알았는데, 전혀 엉뚱한 무기가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것도 시련의 탑에서 최악이라 평가받는 총기류가 아닌가?
"하하! 역시, 저런 거나 쓰면서 무슨 최강의 랭커라고 하는 거야. 최강은 개뿔!"
붉은 문신의 남자가 실소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 비웃음은.
"헉? 허억?"
이어지는 광경에 경악으로 뒤바뀌었다.
콰콰콰콰콰!
총탄이 빗발친다.
체내 속성 변화를 통해 탄환을 만들고.
'별의 가호'와 '데이라이트'를 주입해 탄환을 강화시킨다.
새하얀 빛줄기가 허공을 가득 수놓았다.
1초에 한 마리씩.
그토록 딜을 쏟아 부어도 순식간에 회복되던 벌레들이 찍소리도 못 하고 박살나기 시작했다.
"총……이라는 게 저렇게 근접전도 가능한 거였어?"
완벽하다……라는 말 외엔 할 말이 없었다.
파괴력과 정확성.
거기다가 눈으로 따라잡기 힘든 속도로 벌레들 사이를 누비며 총에 달린 칼날을 이용하는 근접전까지.
벌레들이 전멸하는 덴 채 30초가 걸리지 않았다.
공격대 전체가 5분을 넘게 고전한 걸 생각하면 믿기 힘든 전과였다.
"세상에나……."
"S급끼리도 급이 있다는 건가."
"차이가 있는 수준이 아니야. 완전히 괴물이잖아?"
"고작 한 명이 합류한 것뿐인데, 사냥이 이렇게 쉬워지다니."
"이거…… 진짜 대박인데?"
공격대의 사기가 전체적으로 올라갔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빌어먹을. 근접 전투 계열 직업이니 당연히 저 정도는 해 줘야지. 뭘 그리 다들 호들갑이야? 야. 가서 마정석이나 수거해. 짐꾼들은 이곳까지 오기 힘드니까 빨리 하라고!"
문신남이 애먼 데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예? 예. 예! 알겠어요."
가장 등급이 낮은 여성 플레이어가 쩔쩔매며, 시체들 사이를 뒤지기 시작했다.
하여간, 스무 명 정도 모이면 꼭 한 명씩은 이상한 놈이 섞여 있다는 누군가의 말은 틀린 게 아니다.
"그만두세요. 마정석 일일이 수거할 시간 없습니다."
"예?"
진혁의 만류에, 시체에서 마정석을 뽑으려고 낑낑대던 여자가 멈칫했다.
"잠시 뒤, 또 다른 벌레들이 몰려올 겁니다. 지금보다 더 많고 더 강한 종류로요."
"그럴 수가……."
"호들갑떨지 말고 수거나 해. 만약 벌레들이 온다고 해도 귀족 클래스인 내가 혼자 막아 줄 테니."
"혼자서 막는다고요? 당신이?"
"그래. 똑똑히 들어 둬라. 타이탄 길드에 두 명뿐인 정령사 요한슨. 그게 바로 이 몸의 이름이니까."
"호오."
자신감이 넘치는 게 이해는 된다.
전 세계에서도 손에 꼽는 히든 클래스로 전직했으니 당연히 콧대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자!, 이것이 이 몸의 정령수다."
요한슨이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작은 불도마뱀의 형태를 한 정령수가 나타났다.
"캬오!"
혓바닥에서 작은 불꽃이 낼름낼름 타올랐다.
"불의 정령이네요."
"하하하. 그래도 눈이 단춧구멍은 아닌가보군."
불의 정령이라.
피식.
……귀엽네.
"살라맨더."
진혁이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