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검은 염소들 (1)
"살라맨더."
진혁의 부름에.
우우우웅!
아공간이 열렸다.
곧이어, 요한슨이 부른 정령수보다 훨씬 더 커다란 크기의 불도마뱀이 나타났다.
비늘을 따라 좌르르 흐르는 윤기.
뾰족한 이빨과 탐스러운 불꽃.
"카오오오! 주인! 나 왔다! 무슨 일이야?"
화르륵!
선명한 불길이 높게 치솟았다.
"그래그래. 별 건 아니고. 잠깐 좀 불러봤어. 거기, 불길 좀 더 세게 해 봐. 응. 아주 활활 타오르게."
"주, 중급…… 정령수. 아니, 저 정도면 상급에 가깝겠는데?"
요한슨의 동공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무슨 놈의 근접딜러가 상급 정령수를 부린단 말이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현존하는 정령사들 조차 하급 정령수를 유지하는 것도 벅찬 게 현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당황하는 건 잠시뿐이었다.
"큭! 웃기지마라. 내가 다룰 수 있는 정령수는 한 마리가 아니다."
정신을 가다듬은 요한슨이 다시 한 번 마력을 집중했다.
우우웅!
밝은 빛과 함께 이번엔 물의 정령이 나타났다.
"부르셨나요?"
여성체의 모습을 한 정령이 공손하게 양손을 모았다.
무려, 2마리의 정령수를 다룰 수 있는 정령사.
이거라면 충분히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운디네. 너도 잠깐 좀 나와 봐,"
진혁의 말에 상황은 또 다시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요한슨의 정령수가 화들짝 놀라며 물로 만든 치마를 살포시 들었다.
"위, 위대하신 물의 정령을 뵙습니다."
"날 알아?"
"정령계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었어요. 물론, 먼발치에서 구경했던 거라 기억은 못 하고 계실 테지만요. 만나 뵙게 되어 정말로 영광이에요."
"오냐."
운디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왜긴, 끔찍한 악마한테 사로잡혀 있어서 그렇지. 부를 때 안 나오면 지옥이 기다리고 있거든."
운디네가 물로 만든 사탕을 입에 물었다.
입에서 수증기가 길게 뿜어져 나왔다.
"하…… 너는 언니처럼 살지 마라. 좋은 주인 만나서 꽃길만 걸어. 하루하루가 힘들다."
"많이…… 힘드신가 보네요."
"응, 이것이 '인생' 이랄까? 물사탕이 오늘따라 쓰게 느껴지네."
세월의 풍파가 느껴지는 길고긴 한숨이었다.
"아니, 너희들 대체……."
요한슨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정령이 정령에게 예를 갖추는 경우는 훨씬 더 상위등급일 때에만 해당하는 이야기.
다시 말해.
상대의 정령술이 아득히 위라는 뜻이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아아아!"
절규에 가까운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
기고만장했던 요한슨은 완전히 풀이 죽어 버렸다.
이후에 통로를 따라 올라오는 벌레들과의 전투에서 자신의 정령수들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뼈저리게 체험한 탓이었다.
-아 두 마리 정령이 끝이라고요. 그것도 하급으로. 아 그렇구나.
-하하. 당연히 정령사는 취미로 하시는 거죠? 본직업이 아니라?
-저런, 본 직업이라고요. 이야. 요즘 어렵다어렵다 하더니 타이탄 길드에선 백수도 뽑나 보네요. 아무리 정령사가 귀해도 그렇지 이건 좀 심한데.
-혹시 타이탄 길드 마스터의 약점이라도 잡고 있는 건 아니죠? 비디오 같은 거 숨겨 뒀다거나. 비밀 장부를 찍어 뒀다거나.
-농담입니다. 눈 그렇게 뜨지 마세요. 뽑아 버리고 싶으니까. 아무튼 진짜 정령사가 되셔서 정말 너무너무 다행이에요. 다른 직업이었으면 1층 고블린 레이드나 뛰셨어야 했을 테니까요.
진혁이 보란 듯이 정령수 5마리를 모두 꺼냈다.
기존에 합을 맞췄던 정령 특전대 포즈나 합동 연계 기술로 벌레들을 처리하는 장면은 그저 감탄만 나왔다.
얼마나 혹독하게 훈련을 했으면 저런 게 가능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쪽도 뭔가 그럴 듯한 필살기 같은 게 있겠죠? 음 둘이라서 안 되려나?"
"……나, 나도 필살기 하나쯤은……."
"아. 그쪽 정령술이 필살기 그 자체겠네요. 상대는 설마 이게 전부겠어 하면서 방심을 유도하게 하고. 같은 편은 뒷목 잡고 혈압으로 쓰러지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진혁이 생긋 웃었다.
"주인. 저 아저씨 운다."
작은 골렘의 모습을 한 노움이 손가락으로 요한슨을 가리켰다.
"너희도 하루 종일 놀고먹고 뒹굴면, 나중에 커서 저런 사람이랑 계약 맺게 되는 거야."
"싫다. 저런 약해빠진 주인은."
"맞아. 마력이 너무 약해서 우리가 현계에 있는 것도 벅찰 것 같아."
"나는 차라리 혀 깨물고 죽을래."
"앞으로 열심히 수련할게 주인!"
"다들 조용히 해. 머리 아파."
모처럼 정령들이 의기투합해 진혁을 칭찬했다.
성격은 모났어도 마력이 충분한 계약자가 훨씬 든든한 법이다.
반면, 그 모든 걸 면전에서 듣고 있어야 하는 요한슨은 1분1초가 지옥처럼 느껴졌다.
치욕과 굴욕.
그걸 넘어 인간의 존엄성 자체가 바퀴벌레 뒷다리가 된 것마냥 격하되었다.
"짓궂으시군요."
에이단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헛바람이 잔뜩 들어간 신입에게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려 주려 가만히 지켜봤었지만.
참교육이 지나치게 충격적이었다.
아예 살아 가려는 의지마저 꺾어 버릴 정도였으니까.
"하하…… 망할 고인물, 망할 재능충 새끼들. 다 죽어. 제발 다 죽어. 죽어. 죽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공격대 끄트머리에서 걸어오는 걸 보니…….
정신적인 타격이 심하긴 심했던 모양이다.
조금 너무하긴 했나?
……는 개뿔.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아예 뼛속까지 ptsd를 심어 줘야 한다.
'보아하니 저놈이랑 계약한 정령수들도 내 운디네랑 살라맨더를 마음에 드는 것 같아 하니, 이참에 아예 계약까지 파기시키고 새로운 노예들을 모집해야지.'
한 번 이빨을 드러낸 녀석은 감히 다시는 그럴 생각도 들지 못 하도록 찍어 눌러 주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띠링!
평소와는 조금 다른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개인 상태창이 아니다.
진혁은 물론, 통로에 있던 타이탄 길드 플레이어들 전원의 앞에 상태창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시스템에 균열이 '일부' 벌어졌습니다.]
[외부와의 통신이 연결되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현현합니다!]
붉게 물든 상태창은 지금까지 봐 왔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오싹하고.
공기가 얼어붙는다.
"……이건 설마."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아는 건, 이곳에서 진혁 한 명뿐이었다.
동시에.
[플레이어 천유성 님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플레이어 테레사 님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거주자 '안드리아' 님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쏟아지는 메시지들이 시야를 가렸다.
……시작되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가, 강진혁 플레이어님. 이건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에이단이 다급히 물었다.
그 역시도 붉은색 상태창들과 길드의 본대로부터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부, 분명…… 일본의 예언가가 일주일은 남아 있다고 했는데……."
그래. 타케시가 그렇게 말했었지.
하지만, 타케시의 예언은 '검은 염소'의 본신이 일주일 후에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 전에 놈의 선발대격인 하수인들이 오는 것까진 보지 못한 게 틀림없으리라.
'……좀 위험한데. 이번엔.'
진혁의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하루.
어찌 보면 따분하고 무미건조했던 일상이었다.
오히려 자극꺼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게 인간의 본성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건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무너졌다.
우우우웅!
우우웅!
탑의 내부와 외부를 아우르며 동시다발적인 균열이 일어났다.
일렁이는 표면 너머로 검은색 연기가 흘러나왔다.
시련의 탑 5층. '투기장'.
무림과 제국의 접경지역.
미국과 프랑스 중국 호주 그리고 한국까지.
총 일곱 게이트의 입구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무언가가 뛰쳐나올 것만 같이.
"당장 탑에 있는 길드원들 전원. 전부 다 대전으로 모이라고 해. 그래. 대전! 대전이라고!"
싸울아비 길드의 김기태가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한국 각성자 협회장인 한상진을 비롯해 다른 대형 길드의 랭커들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필요한 인원들을 모아 주세요. 경찰과 군대에도 알려 시민들의 대피 절차도 밟아야 합니다. 그리고 해외 쪽 지원은 어떻게 됐죠?"
"그쪽도 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각자 자국에 나타난 게이트 때문에 연락도 닿질 않아요!"
지원은 없다.
그 사실에, 각성자 협회 직원들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직접 가서 측정한 것이 아닌, 광역 스캔을 한 것뿐이었지만.
지금 한국에 나타난 게이트의 마력은 측정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일본이……! 사무라이 길드 쪽에서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통신을 담당하고 있던 직원 한 명이 다급히 고함을 질렀다.
"일본이?"
"예. 이번 일을 예언한 타케시란 랭커가 저희 쪽 강진혁 플레이어님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당장 지원을 갈 테니 조금만 버텨 달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강진혁.
이번에도 그 사람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 나타난 건가.
한상진의 얼굴에 고마움과 자조감이 짙게 배어 나왔다.
한국 각성자 협회를 이끌고 있는 몸이었지만, 한 명의 플레이어보다 영향력이 떨어진다는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이 위급한 때에,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플레이어가 자신들과 함께 해 줄 것이라는 자부심이 뒤섞인 탓이었다.
"지금, 강진혁 플레이어님은 어디에 계시죠?"
"16층에 들어간 것까지 확인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찾으세요. 최우선 사항이니까."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단 한 명뿐이었다.
한상진이 두 손을 모았다. 마주 잡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렇게.
상황이 1분1초를 다투며 흘러갔다.
일본의 사무라이 길드는 한국을 돕기 위해 움직였고.
인도의 간다라 길드는 중국을 돕기 위해 움직였다.
평소에는 각자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였지만, 항거할 수 없는 적이 등장하자 모두가 힘을 하나로 모았다.
인류라는 명목으로.
그리고.
앞전선이 무너진다면 다음 차례가 자신들이 될 것이라는 계산으로.
*현재 한국에 나타난 게이트의 위치는 대전의 중심인 갑천.
천변을 따라 흐르는 물 위로 엄청나게 거대한 게이트가 떠 있었다.
"이거…… 꿈인가?"
"저런 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대체……."
일반 시민들이 멍하니 물 위를 바라봤다.
너무나 현실감 없는 광경에, 시간이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구경하지 마시고 피하십쇼. 거기! 시간 없습니다. 빨리!"
"신속하게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길드 분들이 와야 하니, 차량은 좌우로 빼 두시고 군용버스에 탑승해 주십시오."
경찰들과 군인들이 도로를 통제했다.
길드의 플레이어들 역시 시시각각 모여들었다.
"장 형. 저런 거 봤어?"
무투계 딜러 한 명이 게이트를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빌어먹을. 나도 저런 급은 처음이다. 지난 1년간 시련의 탑에서 나름대로 굴렀다고 생각했는데, 아예 차원이 달라. 게이트의 크기뿐 아니라……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숨이 턱턱 막히는 마력이라니."
"저걸 우리끼리 어떻게 막으라는 거야 하하…… 하……."
"시간이라도 끌어야지. 우리보다 더 강한 랭커들이 올 때까지."
그게 최선이다.
어차피 지금 모인 100여명 남짓만으로는 저기서 뭐가 나오든 상대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우우우우……."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균열 너머에서 터무니없는 무언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오, 온다!"
"젠장. 아직 민간인들 다 대피하지 못했는데……!"
"진형 갖춰! 젠장. 어떻게든 버텨야 해!"
쿠쿠쿠쿠!
잔물결이 서서히 퍼져 나가며 게이트가 완전히 개방되었다.
검은 염소의 모습을 한 거대한 생명체가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끄아아악!"
"아아악!"
플레이어들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