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긍지보다 더 중요한 것 (1)
뱀파이어 가주 중 유일하게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존재.
아비가일 폰 레비시타.
그것이 눈앞에 있는 레비시타 가문의 가주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뿌득…….
엘리스가 치아를 부러져라 깨물었다.
"내 앞에 그 면상을 보였다는 건 죽을 각오가 끝났다는 말이겠지?"
두 눈은 살기로 번들거렸고 안면의 홍조는 핏빛처럼 짙어졌다.
"후후. 얼마 만에 보는 언니 얼굴인데 말을 그렇게 험하게 하면 쓰니. 오랜 만에 널 봐서 너무나 즐거운데. 나는."
"개소리…… 집어치워! 지옥 같은 구덩이 속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했어. 너희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그날만을!"
쿠쿠쿠쿠쿠!
엘리스의 몸 주위로 붉은색 핏방울들이 떠올랐다.
['블라디미르의 작살'이 발동됩니다!]
혈액으로 만든 작살과 수많은 꼬챙이들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검은 염소와 싸울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흉흉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싸우는 건 찬성이지만, 내 이야기부터 들어보는 게 어때? 분명 흥미가 당기는 주제일 텐데?"
"필요 없어."
엘리스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하늘에 있던 작살들이 일제히 아비가일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명령만 떨어진다면 그 즉시 루마니아의 참극이 되풀이될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묘하게 생긴 게이트로 들어간 네 계약자. 이대로라면 목숨을 잃을 거야."
"……뭐?"
엘리스의 몸이 처음으로 움찔했다.
묘한 게이트라면 분명…… 진혁이 떠나기 전 말했던 '경계를 허무는 거울'이다.
그리고 그걸 알고 있다는 건, 지금 아비가일이 하는 말이 단순히 허언이 아니라는 뜻.
다른 건 몰라도 진혁과 관련된 것이라면 쉽게 넘겨들을 수 없었다.
작살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말해 봐."
"보고에 따르면 네 계약자는 너 외에도 다수의 소환수를 부리고 있더라고. 고대종과 정령수는 물론 언데드 몬스터들까지…… 정말 많기도 하네. 가주들도 저렇게 강력한 소환수들을 전부 부리긴 힘들 텐데 말이야. 만약 저들이 모두 전력을 다해 싸우기라도 한다면 정말로 곤란해지겠어."
여기까지 말하자 엘리스도 아비가일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한 개인의 마력 공급에 의존해야 하는 치명적인 약점.
"마력 과부하…… 너 설마……!"
"맞아. 지금까지는 딱 수준에 맞는 전투를 했으니 위험한 상황까진 안 갔을 거야. 뭐, 네 계약자의 성격을 봤을 때 그것마저도 계산한 것 같지만."
그러나.
과연 지금도 그럴 수 있을까?
천마신교의 사마자와 뱀파이어 가문 그리고 50층의 사념체들까지.
전력은 과하다 못해 넘쳐흐를 정도였다.
그런 그들이 모든 힘을 소환수들에게만 집중한다면, 아무리 진혁이 마력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또 모두가 무리하는 싸움을 피한다고 한들…….
결국엔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네 계약자 쪽엔 엑센시온이 직접 갔어. 다른 누구도 아닌 너라면. 그 남자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겠지."
아비가일이 생긋 웃었다.
아타락시아를 이끄는 새로운 가주.
엑센시온 오브 아타락시아.
현 가주들 사이에서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엘리스 또한 그 괴물의 능력 때문에 회랑에 갇히게 되었다.
'아무리…… 계약자라고 해도 무리야.'
설마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계획을 준비했을 줄이야.
1:1로도 만만치 않은 가주를 상대로 기습까지 허용당한다면…… 리스크가 너무 높아진다.
'……절대 잃을 순 없어. 절대로 죽게 내버려두진 않을 거야.'
복수도 중요했지만 소중한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한 건 아니었다.
결국, 엘리스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원하는 게 뭐야?"
"후후. 이야기가 빨라서 좋네. 조건은 아주 간단해. 네 스스로 금제를 걸어 고유 성창을 봉인해."
"고유…… 성창을?"
"그래. 개벽의 계시록. 그 능력은 상대하기 정말 성가시거든."
가주끼리의 전투에 있어 고유 성창은 곧 생명줄.
서로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필살의 수단이다.
그걸 포기하라는 건…… 곧 죽어 달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그렇게 하면…… 계약자의 목숨은 보장해 주겠다는 거야?"
"물론이야.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너 하나니까. 피와 피로 이루어진 약속은 일족의 금술에 의해 보장될 거야."
자신의 목숨과 진혁의 목숨.
선택할 수 있는 게 하나라면…….
"……좋아. 그렇게 할게."
엘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
우우웅!
두 뱀파이어의 주위로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사신이 나타났다.
천칭의 한 쪽엔 엘리스의 붉은 영혼이.
다른 한쪽엔 아비가일의 검은 영혼이 자리 잡았다.
[피의 금제(禁制)가 맺어졌습니다.]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의 고유 성창이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봉인됩니다. 대신 아비가일 폰 레비시타를 포함한 뱀파이어 가주들은 플레이어 강진혁에 대한 공격을 즉각 중지하며 선제 공격을 받지 않은 한, 대상의 목숨을 위협할 수 없습니다.]
피로 맺어진 맹약은 목숨으로서 지켜질 것이다.
'……이걸로 됐어.'
엘리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동시에.
스스슥…….
그림자 속에서 수십이 훌쩍 넘는 뱀파이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붉은 눈이 사방에서 빛났다.
레비시타 가문에 소속된 혈족들이 저마다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무기를 꺼냈다.
"킥킥!"
"전대 가주 사냥이라니. 이거 영광입니다."
"아주 찢어 죽여주지."
"드디어 일전의 수모를 갚을 수 있게 됐군."
레이피어와 단검 그리고 혈계 마법이 한자리에 모였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인간 하나 때문에 목숨을 버릴 줄이야. 천하의 엘리스가 이런 멍청한 짓을 할 거라고 그 누가 예상을 했겠어?"
아비가일도 자신의 키를 훌쩍 넘은 낫을 꺼내들었다.
거대한 눈동자가 박혀 있는 낫이 미미하게 진동했다.
'망령나무의 낫'.
'절대 판정' 효과를 지닌 낫은 아비가일의 무기인 동시에 '고유 성창' 그 자체였다.
같은 고유 성창이나 최상급 성유물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한 상대가 되질 않는다.
그러나 그 모든 걸 눈앞에 두고도…….
엘리스는 그 자리에서 꼿꼿하게 서 있었다.
선택에 후회는 없다.
제약이 걸렸다고 한들 긍지를 위한 싸움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자신에게 희망을 보여준 사람을 위해서 쓰러지는 거라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최후였다.
물론, 놈들이 원하는 대로 곱게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엘리스가 고유 능력 '블러드 로드'를 해방합니다!]
공기가 급변했다.
꺼지기 전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엘리스가 마력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
고고하게 서 있는 진조가 모든 것을 관조하고 멸시했다.
"내가 곧 아타락시아 그 자체이며, 아타락시아의 모든 것들은 짐을 위해 존재한다."
고유 성창이 없어도 지금 하는 언변엔 틀림없는 절대자의 무게가 깃들어 있었다.
"오너라. 너희들 중 그 위업에 도전할 자가 있다면 지금이 그 적기니라."
엘리스가 자세를 잡았다.
단지 그것뿐.
그런데도.
"……큭!"
"흐읍."
기세등등했던 혈족들이 순간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과거의 악몽이 잊고 있던 기억을 자극한다.
단 한 명의 진조에게 위대한 가문의 뱀파이어들이 쓸려나갔던 그 끔찍한 트라우마를.
그때.
서걱!
가장 뒤에 있던 뱀파이어의 머리가 날아갔다.
횡으로 가로지른 낫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내 일족 중에 겁쟁이는 필요 없어."
도망치면 죽음뿐.
아비가일이 차갑게 내뱉었다.
"고유 성창이 봉인된 이상 제아무리 엘리스라고 해도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해. 충분히 몰이사냥을 할 수 있으니 포위해서 말려 죽여. 다들 알아들었어?"
"아, 알겠습니다."
"그렇지. 저 위압감에 깜빡 속았군."
"죽여라!"
"크아아아!"
혈족들이 일제히 도약했다.
'……절대 여기론 오지 마. 함정이니까.'
엘리스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짧게 중얼거렸다.
***
우우우웅!
벨토르의 머리 위로 새하얀 룬어들이 나타났다.
7겹으로 구성된 다중 술식이다.
'세상에나…….'
벨토르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에는 그저 제정신이 아닌 머저리가 찾아 왔다고 생각했다.
결계사란 직업은 그 정도로 괴짜에 바보들만 선택하는 길이었으니까.
게다가 3시간 안에 전직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땐. 조금이나마 갖고 있던 기대마저 깨끗하게 버려버렸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크크…… 크하하하! 이거 완전 골 때리는 놈이로구만."
벨토르가 참다못해 광소를 터뜨렸다.
살아생전 수석 제자조차 6중 결계의 편린을 구사한 게 고작이었는데.
사후, 그것도 탑 밖에 있는 플레이어가 7중 결계를 사용하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이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직 멀었습니다."
진혁이 또 다른 스킬을 사용했다.
'전장 선택'으로 인해 일대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바뀐 풍경.
이곳은 서고다.
정확히는 과거 벨토르가 결계술을 배우던 장소였다.
훤히 뚫린 천장 너머로 칠흑같은 밤하늘과 그보다 더 밝은 별들이 보였다.
결계사의 시작이자 마지막을 보여 주는 것처럼.
"아……."
벨토르의 입에서 복잡한 감정이 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별의 가호'의 특성 효과로 인해 모든 능력치가 5%만큼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한순간에 폭발했다.
파츠츠……!
지금까지 발동시킨 결계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하나의 대결계가 구축되었다.
독학으로 한 거라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그럴 듯한 형태를 갖추는 덴 성공했다.
[11성급 대결계 '황혼의 늪'이 발동됩니다!]
넘실거리는 금빛 물결 속.
벨토르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하지 않았다.
대신 순순하게 속에 있는 감상을 내뱉었다.
"너…… 재밌는 놈이구나."
저건 나름대로 칭찬을 해 준 거겠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만, 처음에 제가 만든 결계를 파훼할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빌어먹을. 이걸 단순 파훼법으로 어떻게 뚫냐? 시험은 당연히 통과했다. 너 같은 실력자를 통과시키지 않으면 결계사 중에 2차 전직할 수 있는 놈은 하나도 없겠지."
11성급 대결계를 파훼하려면 아무리 벨토르라고 하더라도 본 실력을 발휘해야 할 거다.
다시 말해.
시험은 끝났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 어딜 급하게 가려고? 너 정도 되는 원석은 시간과 공을 잔뜩 들여 연마해야 진짜 가치를 발휘하는 법인 거 몰라? 아 물론, 나도 지금 바깥 상황이 장난 아닌 건 알아. 그래서 하는 말이야. 괜히 나갔다가 개죽음 당하느니 차라리 여기서 차근차근 수련을 해 나가는 게 낫지 않겠어? 너라면 내가 이번에 새로 개발한 차원 결계를……!"
불평불만에 가득 차 있던 어른은 어디 가고 잔뜩 흥분하고 신난 어린아이가 있는 것 같다.
그래.
사실 알고 있었다.
계속해서 부정하고 있었지만, 이 남자가 그 누구보다 결계술이란 분야를 사랑했다는 걸.
그 누구보다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에, 미워하고 증오할 자격이 있던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 제안은 거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엘리스도 천유성도 테레사도 월영과 스승님도…….
유연화와 이태민 고구마 그리고 그밖에 전 세계 길드와 모든 이들이.
인류를 위해.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있다.
상태창을 통해 외부의 모습이 전달되었다.
-버텨라! 조금만…… 조금만 더!
-반드시 오실 거다. 포기하지 말고 맞서 싸워!
-사무라이 길드도 한국에 상륙했습니다. 바로 가세하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을 버려 가며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제가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습니다."
목적을 이룬 이상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짧지만,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이 직업에 더 애착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생긋 웃은 진혁이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했다.
[잃어버린 언어를 습득하셨습니다.]
[결계사의 2차 전직이 완료되었습니다.]
[룬어을 해석하는 자에서 룬어를 창조하는 자로 그 역할이 개변됩니다.]
걸음을 따라…….
……처음 보는 상형 문자들이 나타났다.
잃어버린 언어를 탐구하며 그 세계를 창조해나가는 자.
"하아. 왜 항상 가장 갖고 싶은 건 손에 넣을 수가 없는 거야 대체."
벨토르가 아쉽다는 듯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렸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 방 먹여 줘라. 어린 결계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