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일진일퇴(一進一退) (1)
쿠쿠쿠쿠쿠쿠!
천마가 했던 것처럼 층계 전체가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 일대를 뒤흔들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앞으로 뻗은 송곳니와 쌍룡검에 압축된 기가 더더욱 극한으로 치달았다.
"이, 이건……."
심마사령이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저렇게 응집된 상태에서 천마의 성명절기를 맞았다간…….
끝장이다.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강시부대가 일거에 증발해 버릴 것이다.
"피해라! 당장!"
심마사령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파츠츠!
극한까지 압축됐던 마력이 순차적으로 해방되었다.
거대한 빛이 진혁의 주위를 삼켰다.314화. 일진일퇴(一進一退) (1)
가장 먼저.
진혁과 근접해 있던 천한강시의 몸에 균열이 일어났다.
"키에?"
매캐한 냄새와 함께 살이 타들어갔다.
극음지기에서 제련한 몸은 열에 있어서 극도의 내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 단단한 시체조차도 이번만큼은 방패가 되어 주지 못했다.
콰콰콰콰콰콰콰!
상상을 초월하는 기의 폭발.
모든 것들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다시 시야가 돌아왔을 땐…….
눈에 보이는 지형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심마사령이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강시들이 방패막이가 되어준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만은 부지했다.
사령의 권속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강시의 공격력을 방어력으로 변환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
보유한 강시들은 이미 재가 되어 흩어져버렸다.
'대체…… 무슨 낯으로 그분을 봐야 한단…… 말인가.'
임무에 실패한 걸로 모자라 혼자서만 살아 돌아간다고?
그런 치졸한 변명이 통할 리 없다.
적어도 작은 전과라도 올리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음?'
심마사령의 눈에 진혁이 들어왔다.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의 무공을 사용한 탓일까?
눈에 띄게 호흡이 거칠어지고 다리에 힘이 풀린 게 보였다.
기회다.
"그래. 네놈도 한계란 게 있구나!"
저 녀석만 처리할 수 있다면, 이 모든 실책을 만회할 수 있을 터.
심마사령이 자리를 박차고 도약했다.
자신 역시 상처투성이에 지칠 대로 지친 몸이긴 했지만.
상대는 톡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고개를 떨군 채 비틀거리는 걸 보면, 검을 휘두르기는커녕 피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아 보였다.
죽일 수 있다면 오직 지금뿐이다.
부우우웅!
반월검이 수평과 수직을 그리며 동시에 폭사되었다.
그런데.
카아앙!
사각에서 노린 검이 튕겨나갔다.
'툼그레이브의 오른팔'에…….
……'고속검'이 겹쳐진다.
천마신공이 파괴력을 우선시했다면, 두 개의 능력을 통해 발현한 검격은 극한의 속도를 추구했다.
빠르다는 수준이 아니다.
이제는 아예…… 볼 수조차 없다.
퍼퍼퍽!
섬뜩한 파육음이 싸움의 끝을 고했다.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뿜어졌다.
"힘이 다했……을 텐데…… 어떻게 이런 속도의 검을……."
고작 이 정도로 힘이 다하긴.
그저.
"힘든 것처럼 연기를 했을 뿐이야."
마력을 최적화하는 방법이야 이미 오래 전에 마스터했다.
연기를 하는 건 더더욱 오래 전에 마스터했고.
"괴물…… 같은 놈."
쿠웅!
심마사령의 몸이 그대로 무너졌다.
동시에.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상급 강시 제조법'을 습득하셨습니다.]
['반월검(半月劍)' 한 쌍을 습득하셨습니다!]
무수히 많은 상태창이 승리를 대신 알려줬다.
3레벨.
거기에 심마사령이 보유한 것들 중 가장 좋은 2개가 함께 떨어졌다.
***
"끝……난 건가."
소유명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수의 적을 상대로 인질들을 보호하며 싸우느라 입에서 단내가 풀풀 풍겼다.
함께 싸웠던 사제들과 사매는 이미 탈진해 쓰러진 지 오래였고.
"그런 것 같네요. 저희야 진혁 씨를 도운 것뿐이지만요."
테레사 역시 백색 갑주와 방패가 강시들의 피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확실히 애를 먹긴 했어. 숫자가 조금만 더 많았다면 위험했을 거야."
엘리스가 한 마디 덧붙였다.
놈들을 분자 단위로 태워버려서 망정이지.
블러드 스피어로는 백 번을 찔러도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상급 강시들이 가진 재생력은 놀라웠다.
그런데.
카카캉!
숲을 따라 누군가 미친 듯이 싸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아남기 위해.
천유성이 지금 이 순간에도 미친 듯이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는 소리였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엘리스가 진혁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근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우리가 다 있으면 굳이 그 검성 녀석을 미끼로 쓰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야? 아니, 내가 봤을 땐 계약자 혼자서도 충분했을 것 같은데?"
"흠……."
오늘따라 엘리스가 묘하게 총명하다.
머리가 빠릿빠릿 회전하고 호기심이 많은 게 딱 단명할 상이랄까.
"엘리스."
"응?"
"그런 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하……."
엘리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동안 천유성이 은근슬쩍 기어오르던 것들이 생각난 것이다.
저건 아마…… 업보겠지.
지난 일들에 대한 쌓이고 쌓인 업보.
그렇다면 멀리서 응원하는 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힘내!"
아직까지 열심히 도망 다니면서 싸우고 있는 천유성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싸움이 끝나고 정확히 하루가 지난 뒤, 진혁은 일행들과 함께 낙양으로 돌아갔다.
심마사령을 해치웠다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으니…… 당연히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을 거라 확신하면서.
그러나.
무림맹에 도착하고 나서야 현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점창파와 공동파의 정예 3개 분파가 궤멸했습니다."
"거점에 보관 중이던 내단과…… 신물들도 빼앗겼다고 하더군요."
"강시들도 많이 없애긴 했지만, 그 하얀 강시는 격이 달랐소. 나도 간신히 몸만 빠져나온 게 한계였으니까."
회의장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림맹이 승리를 거둔 곳은 겨우 두 곳.
나머지는 오히려 상대에게 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혈강시를 2천기 가량 처리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뒤늦게 회의에 참석한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완전히 머저리들만 모아 놨네.'
가장 까다로운 심마사령을 막아 줬는데도 이 정도라니.
역시 이런 놈들은 일일이 봐줄 필요가 없다.
철저하게 이용만 하다 버리는 수밖에.
그런데.
소림에서 온 혜명 스님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저희가 따로 보관하고 있던 신선초 역시 잃어버렸습니다. 이상한 게 다른 영단은 건드리지 않고 그것 하나만 가져갔더군요."
"신선초라면 내공을 반 갑자 정도 증진시킬 수 있는 약초 아닙니까?"
"희귀하긴 한데, 영단으로 만드는 노력에 비해 내공 증진이 미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죠."
곤륜의 단목일과 화산의 하려화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맞습니다. 자태가 아름다워 소승이 애정을 갖고 키우던 거였는데, 하필이면 그걸 약탈당한 게 아쉽습니다."
신선초…… 신선초라면 설마?
진혁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오랫동안 굳어 버린 몸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효과.
심지어 수백 년간 잠에 빠진 이를 깨울 수도 있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영초다.
물론, 이건 제대로 된 정제 과정을 거쳤을 때의 이야기고.
무림에서는 신선초를 내공 증진을 위한 영단을 만드는 재료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사마자가…… 그걸 노렸다?'
혈강시를 2천 기나 버린 게 의외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제야 사마자가 노리는 게 뭔지 알겠다.
내단이나 만들려는 건 당연히 아닐 테고…….
'사방신을 깨우려는 거였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깊은 잠에 빠진 신수를 이용하려는 거다.
사마자가 가진 고유 능력과 신선초의 효능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아마, 지금 잠들어 있는 사방신 중에서 놈과 계약을 맺을 만한 놈은…….
딱 하나뿐이다.
청룡.
기상을 다루는 동양의 용이 곧 전장에 나타날 것이다.
무림맹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타이밍에.
'조금 전에 무림 놈들이 아예 쓸모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도움이 됐네.'
이 정보는 천금과 같은 가치가 있다.
상대의 히든 카드 중 하나를 미리 본 셈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얼 쓸지 미리 알고 있다면…….
이쪽도 그에 따른 대비를 할 수 있게 된다.
'먼저 받을 것부터 받아야지.'
특히 사마자와 청룡을 상대하려면 무림맹으로부터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게 한 가지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진혁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크흠! 큼! 열심히 떠드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만, 급히 말씀드려야 할 게 있어서요. 다들 집중 좀 해 주시겠습니까?"
"너는……."
"심마사령을 처리했다는 게 저 남자인가요?"
"강진혁……. 맞습니다. 저희 아이가 저놈에게 당했죠."
이전 무림맹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공동과 아미 점창파.
그리고 모용과 제갈, 황보세가에서 온 대표들이었다.
"급히 말해야 할 거라는 게 어떤 거죠?"
하려화가 진혁을 향해 물었다.
"천마신교의 동선을 알려준 대가를 받아야 할 때인 것 같아서요. 약속한 대로 각 문파의 보물들을 넘겨주셨으면 합니다만."
"웃기는 소리!"
콰앙!
대번에 단목일이 책상을 내려쳤다.
나머지 사람들도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진혁을 노려봤다.
"우리가 이번에 잃은 게 대체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하는 거냐? 그런데 여기서 무언가를 더 내놓으라고?"
"적의 위치를 다 알려줬는데 당한 거야 그쪽 분들이 잘못한 거고 제 알바는 아닙니다."
실력이 부족해 당했으면 쪽팔린 줄 알아야지.
여기서 입을 여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그, 그건……."
"게다가 심마사령을 처리해 줬는데, 입만 싹 닫겠다? 이야. 평소에 그리 들먹이던 의와 협은 동네 주루에 팔아먹으셨나 봅니다. 뭐, 낯짝이 두꺼운 거야 그럴 수 있다 치고. 이런 식으로 제 뒤통수를 치시면 앞으로는 어쩌시려고요? 제 정보 없이 무림맹이 천마신교의 다음 수를 막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진심으로?"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에, 단목일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약속을 한 것도 사실이고. 명백한 공을 세운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 암울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선 진혁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정보들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단지. 문파의 보물을 제공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거저 정보를 빼내야만 한다.
그것이 단목일을 비롯한 각 문파 대표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보상은 둘째 치고. 다들 정말로 저 녀석이 심마사령을 제압했다는 걸 믿으시는 겁니까? 수백의 강시를 부리는 그 괴물이 죽었다는 걸 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괜히 공을 부풀리려고 거짓 보고를 하는 게 아닐지. 그 진위부터 가려야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동의하오."
"본녀도요."
"정파의 고수들도 하지 못한 걸 저자가 해냈다고 믿기엔……."
"확실히, 이상한 수를 썼거나 천마신교와 짜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긴 어렵겠군요."
"다들 무슨 말씀이오? 그래도 저 친구 덕분에 저희가 크게 한 숨을 돌리게 된 건 사실인데. 무작정 의심만 하고 있을 겁니까?"
"개방에선 너무 저자를 좋게 보는 것 아닌가요? 전부터 묘하게 편애를 하는 게 수상하네요."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상황이 이쯤 되자 소유현이 소유명을 불렀다.
직접 한 자리에서 싸웠던 제자라면 명쾌하게 해답을 내줄 거라 믿으면서.
"유명아."
"예. 스승님."
"정말로 저자가 심마사령을 처리했느냐?"
"그건……."
소유명이 힐끔 진혁의 눈치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