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일진일퇴(一進一退) (2)
꿀꺽.
소유명의 목구멍을 타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요 며칠간 진혁에게 뼛속까지 당한 탓에, 이제는 소유현보다 진혁을 더 두려워하는 지경에 이른 탓이다.
특히, 천유성이란 만만치 않은 고수가 진혁 앞에서 영혼까지 털리는 걸 보았기에 소유명이 느끼는 공포심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저자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소유명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세상에서 가장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저 악귀라는 것을.
바로 그때.
진혁의 입 모양이 살며시 움직였다.
-쓸데없는 말을 했다간 죽. 는. 다.
오싹!
소유명의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일어났다.
"트, 틀림없습니다. 이상한 수는 결코 쓰지 않았으며, 탑 밖에서 익힌 듯한 무공으로 그 자의 목을 베어버리는 걸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그러니 믿으셔도 됩니다. 예! 그렇고말고요."
소유명이 세상에서 가장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 유명아?"
소유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에 항상 침착하고 차분했던 제자였다.
그런데 이렇게 경박한 모습이라니.
"무당파의 일대 제자가…… 오늘따라 이상하군요."
"소룡들 중에서도 기대가 큰 인재였는데, 천마신교와의 싸움이 치열하긴 치열했나 봅니다."
"겁을 먹었다는 말씀이에요?"
"허허. 아미타불."
다른 문파의 대표들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소유명을 바라봤다.
하지만, 소유명은 그런 시선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저들은 당장 오늘 밤에 칼을 들고 침소에 찾아오진 않을 테니까.
괴상한 음식을 억지로 먹이거나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는 걸 즐기지도 않을 테니까.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저분…… 아니, 저자는 천마신교의 첩자도 거짓으로 저희를 기만하는 것도 아닙니다."
소유명이 다시 한 번 단언했다.
오롯이.
살아야 한다는 일념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 채.
***
소유명의 증언으로 인해 일이 꽤나 수월하게 흘러갔다.
무당의 일대 제자가 진혁을 보증했으니 감히 그 누가 토를 달겠는가?
그의 말을 의심하는 건 곧 무당의 말을 의심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 모습을 고깝지 않게 보는 이들도 많았지만, 적어도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내진 못했다.
"하하. 뭘 이런 걸 다…… 이건 아주 요긴하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미련 그만 갖고 어서 내놓으세요. 거기 그쪽도요."
결국, 무림맹에서 임시로 보관하고 있던 보물창고에서 5개의 보물이 사라졌다.
진혁이 직접 창고가 있는 곳으로 가 원하는 보물들을 고른 것이다.
딱 5개만 받는 게 아쉽긴 했지만, 이 정도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결과다.
'눈 호강 한 번 제대로 하네.'
개방에서 마련해준 개인 숙소로 돌아온 진혁은 곧바로 얻은 보물들을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역시나 5개 중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눈처럼 새하얀 칼날을 가진 장검이었다.
[화무매화검]
공격력: 26,400
내구도: 5,000 / 5,000
내용: 만년한철로 만든 검은 매화검존의 칭호를 받은 이에게만 주어지는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검을 잡은 이의 의지가 꺾이지 않는 한, 이 검은 결코 부서지지 않습니다.
본래라면 화무매화검은 얻을 수 없는 성유물이다.
멸문지화를 겪으면 겪었지, 화산의 자존심 상 이 검을 포기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화산의 운명이 아닌 무림 전체의 미래와 연관되어 있다면?
검 하나가 천마신교 아래 모든 것들이 잿더미가 되는 것보다 과연 중할까?
그 대답은 지금 이 손안에 있다.
스릉!
진혁이 검집에 있던 검을 뽑았다.
눈이 시릴 정도의 검광이 쏟아졌다.
'내공이 없는 자라도 검기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든다는 말이 사실이었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균형 또한 완벽을 넘어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게다가.
무당의 '자소단'과 곤륜의 '운로백의(雲路白衣)'도 흔히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먼저 자소단은 복용 시 마력을 75스탯이나 올려주는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레벨로 치면 25레벨을 올려주는 셈.
무당파에서 왜 이걸 애지중지하는지 알 것 같다.
반면, 운로백의는 이동 속도를 30% 올려주며 어지간한 검기는 튕겨내 버리는 반탄력을 지니고 있었다.
'놈들이 이 모든 걸 순순히 내어줄 리 없지.'
우선 급한 불을 끈 다음 상황이 진정되면 빼앗긴 검과 신물들을 되돌려 받기 위해 이빨을 드러낼 것이다.
이용 가치가 없어진 사냥개는 삶아 죽이는 게 인간의 본성.
이미 하려화와 단목일의 눈에서 살기를 엿봤다.
하지만.
'귀엽네. 안 돌아가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대는 게.'
놈들이 그리는 장밋빛 미래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정사 대전에서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진혁이 개인 상태창을 활성화시켰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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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강진혁
성별: 남
나이: 28세
레벨: 125
힘 109 민첩 58 체력 67 마력 294 간극 100 행운 10 적응형 78 정기 84.91
보유한 스탯 포인트: 9
보유한 코인: 11,315,520
직업: 룬의 지배자
고유 능력: '융합(融合)', '검의 무덤', '별의 가호', '아누비스의 심판', '혈마기(血魔氣)', '만다라(曼茶羅)', '1초 무적', '천독(千毒)', '하얀 맹수', '만상공유(萬祥共有)', '태양의 성역', '흑천마황공(黑天魔皇功)', '트리플 매직', '거신의 일격', '화룡의 숨결', '고속검(高速劍)', '툼그레이브의 오른팔', '버서커', '바람의 영역', '음영극살(陰影亟殺)', '혈폭(血爆)', '검은 눈물', '툼그레이브의 다리', '괴력난신(怪力亂神)', '군단의 핵', '고대 결계'
먼저 심마사령을 처리하고 얻은 스탯을 분배해야 한다.
'레벨이 레벨이라 그런지 이제는 이런 강적을 처리해도 3레벨 정도 오르는 게 한계인 건가.'
확실히 요구되는 경험치 양이 터무니없이 올라가긴 한 모양이다.
[민첩이 58 → 67로 상승합니다!]
진혁이 받은 스탯을 모조리 민첩에 투자했다.
사마자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반응 속도와 이동 속도를 올릴 필요가 있었다.
다음은…….
진혁의 시선이 붉은빛을 띤 단약으로 향했다.
'자소단'
내공을 증진시키는데 뛰어난 효과를 지닌 영약이다.
'소유현이 이걸 준 것도 어차피 내가 이걸 복용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뛰어난 효과를 지닌 영약일수록 복용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그냥 덥석 삼켰다간 내기가 역류해 주화입마에 빠지거나 폐인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은 진혁이 자소단을 입에 넣었다.
단단해 보이는 형태와 달리 자소단은 혀에 닿는 순간 순식간에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향긋한 내음이 입속 가득 퍼져나갔다.
[Lv7 '진태청화랑심법'이 발동됩니다!]
뜨거운 불덩이가 식도를 타고 몸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진혁이 가부좌를 틀고 흡수된 내기를 운용했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섬세한 작업.
심법과 내기가 완벽하게 합일되어야만 비로소 자소단을 온전히 마력으로 변환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자소단보다 더한 극독도 흡수해본 적이 있는데. 고작 이 정도에 겁을 먹을 진혁이 아니었다.
쿠쿠쿠쿠쿠!
정제된 내기가 더욱 거세게 요동쳤다.
목과 등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마력이 75만큼 상승합니다!]
쇳물을 삼킨 듯한 뜨거운 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모든 마력이 완벽하게 흡수된 것이다.
'……호오.'
25레벨에 해당하는 스탯을 한 번에 올려서 그런가?
민첩을 올렸을 때와는 달리, 체감되는 게 확실히 다르다.
뭐랄까.
이제는 기감까지 예민해진 게 느껴진 달까.
날벌레가 웅웅대는 소리.
천장의 쥐가 빠르게 움직이는 기척.
그리고…….
분노에 가득 찬 누군가 문 앞으로 달려오는 소리 또한 들린다.
응? 분노에 찬 누군가?
설마…….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진혁이 황급히 몸을 날렸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문이 산산이 박살났다.
"드디어 찾았다. 이 씹어먹을 놈아! 네놈의 머리를 베어버릴 생각만 하며 버티고 또 버텼다."
천유성이 검을 뽑아든 채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냈다.
상처투성이의 몸이었지만, 그래도 검을 휘두를 힘은 아껴 둔 모양이다.
"유성아! 무사해서 정말…… 정말 다행이야. 혹시라도 잘못됐을까 봐…… 밤에 잠도 못 이뤘는데…… 흑흑."
진혁이 눈시울을 붉혔다.
어느새 꺼냈는지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는 시늉까지 했다.
"되도 않는 연기는…… 집어 치워라! 날 사지로 몰아넣은 네놈의 만행을 잊을 것 같으냐!"
화르륵!
천유성의 검에 푸른 강기가 솟구쳤다.
이건 진심이다. 진심을 담아 죽이려고 하고 있다.
"어허. 사지로 몰아넣다니. 내가 고생한 널 위해서 이런 것까지 준비했는데 그게 무슨 섭한 소리야?"
멈칫하고.
검을 높게 치켜들던 천유성이 굳어버렸다.
"화무……매화검을 준다고? 나에게?"
물욕이 거의 없는 천유성이었으나, 유일하게 딱 하나.
검에 대한 욕심만큼은 남달랐다.
속성검 이후 변변찮은 무기가 없었기에, 좋은 무기를 손에 넣는 게 최우선 목표였던 것이다.
그런데 무림에서 가장 좋은 검 중에 하나를 주겠다고 하니…….
펄펄 끓던 분노에 제동이 걸렸다.
죽든가 죽이든가.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이루겠다는 다짐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진혁이 매화가 새겨진 검을 천유성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갖고 싶어? 응? 너희 집엔 이런 거 없지?"
"……."
부웅!
천유성이 낚아채려는 찰나, 진혁이 반 박자 빠르게 검을 뒤로 뺐다.
슥! 휘릭!
재빨리 다시 한 번 검을 잡으려 했지만, 또 다시 진혁이 조금 더 빨랐다.
"큭! 준다고 했으면서 이게 무슨 짓거리냐!"
"줄게. 준다니까? 대신 그전에 해줘야 할 일이 하나 있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걸 시키려고? 배보다 배꼽이 큰 일 따윈 죽어도 하지 않을 거다."
"넌 사람을 뭘로 보고……."
이번엔 다르다.
"넌 그냥 하룻밤 동안 보디가드 역할만 좀 해 주면 돼."
"보디가드라고? 누구의? 설마, 네놈은 아니겠지?"
"아니. 나 말고. 우리 구마 이야기야."
이불 속에 숨어 있던 고구마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모기!"
"그래그래. 우리 모기. 잘 잤어? 배고프지?"
"모기모기!"
먹이란 말에, 고구마가 두 눈을 반짝였다.
입가에 침이 흥건히 흘러내리는 건 덤이었다.
"금방 맛있는 거 실컷 먹게 해줄게. 여기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재수 없는 놈 보이지? 이 녀석이 네가 식사하는 동안 옆에서 지켜줄 거야."
"잠깐! 먹는 동안 지키라는 게 무슨 뜻이냐? 평범한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보호가 필요할 리는 없을 텐데?"
"평범한 식당은 아니긴 해."
"그럼 어디냐?"
그거야 당연히…….
"무림맹의 보물창고에 있는 마정석들이지."
아까 전에 가 보니 제국과의 전리품으로 보관해 둔 마정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걸 확인했다.
그걸 다 먹어치우면 고구마가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지…….
벌써부터 미친 듯이 기대가 된다.
"……그러니까. 네 애완동물이 무림맹 걸 훔쳐 먹는 동안 나보고 망이나 봐라?"
"응."
"걸리면 모든 책임은 내가 덤탱이를 쓰고?"
"응!"
진혁이 해맑게 웃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거기에 우리 구마가 뭐 하나를 찾아낼 건데, 그것도 함께 가지고 와줬으면 해."
너무나 유명한 화무매화검이나 자소단과 달리 이건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는 성유물이다.
그렇기에 조금 전에도 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
달라고 해 봤자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할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고구마의 후각이라면 숨겨진 밀실에 감춰져 있는 성유물을 찾을 수 있을 거다.
"무전취식에 이어 절도까지…… 하라 이거군."
"기왕 하는 김에 증거 인멸도 부탁해. 방화보다는 다른 창의적인 방식이 좋겠어. 놈들이 충격을 받아 대응할 생각도 하기 힘든, 그런 거 있잖아."
"하아……. 넌 나중에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곳을 배정받을 거다."
"그럼, 내 옆자리엔 네가 있겠네."
"……."
더 이상 말을 해봤자. 혈압만 오른다는 걸 깨달은 걸까.
천유성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검은 선금으로 받겠다."
"얼마든지."
진혁이 화무매화검을 천유성에게 건넸다.
이걸로 공범 섭외 완료다.
* * *
그날 밤.
무림의 각 문파에선 끔찍한 통곡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 세상에나.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곤륜의 단목일이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서, 선조를 어찌 뵐꼬."
"어떤 사악한 놈이 이런 짓을……."
"천벌을 받을 거다! 천벌을!"
"아아아……."
나머지 세가의 대표들도 피눈물을 흘리면서 오열했다.
각 문파의 유구한 업적과 역사를 기록해 둔 서적들이 보관된 장소.
그 성스러운 곳이 누군가에 의해 완전히 버려졌다.
먹물을 잔뜩 머금은 수많은 발자국이 내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경비병들이 기습을 당해 기절한 탓에 범인이 누구인지 추정하는 것마저 불가능했다.
유일한 단서라곤 발자국의 모양이 작은 파충류의 것이라는 것뿐.
그렇기에.
보물창고에 숨겨져 있는 '귀환자의 팔찌'가 없어진 걸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