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용들의 전쟁 (1)
불타는 누각.
죽어 가는 사람들.
화려했던 수도가 몰락하는 덴 채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끄아아악!"
"아아악!"
"사, 사람 살려!"
혼돈에 빠진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이리저리 도망쳤다.
하지만, 완벽하게 봉쇄된 낙양에서 빠져나갈 길 따위는 없다.
이곳은 거대한 무덤이 될 거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무림맹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낙양에는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결계와 진법들이 펼쳐져 있었지만,
지금 하늘에 펼쳐진 대규모 공간 이동 진법은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더더욱 규모를 넓혀 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
낙뢰와 함께 전신이 피로 뒤덮인 강시들이 떨어졌다.
콰콰콰쾅!
"키에에에!"
"케에엑!"
연전연승을 하느라, 무림맹에 소속된 무사와 도사들은 전선을 더더욱 위로 올린 상황.
때문에 낙양은 빈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심장부를 타격당했으니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밖에.
물론, 절정급 이상의 고수들도 상당수 남아 있긴 했지만…….
"뭐야? 저 하얀 강시는?"
"설마……."
"그래. 틀림없소. 보고에 있던 그 강시요!"
백령.
운무관에서 종무량을 일격에 처리해 버린 천마신교 최강의 강시.
하필이면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힘의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적을 만나게 되었다.
사박.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새하얀 손에서 그보다 더 하얀 손톱이 자라났다.
스릉!
각 문파의 대표들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 순간.
츳!
"……어?"
백령의 모습이 사라졌다.
도약하는 동작을 눈으로 쫓을 수 없었다.
"조심하시오!"
고함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기감을 끌어올렸지만,
이미 가장 앞쪽에 있던 공동파 장로의 목이 사라진 뒤였다.
푸슉! 푸슈슉……!
잘린 목에서 긴 핏줄기가 뿜어졌다.
"마, 말도 안 돼."
"허무공!"
이건…… 빠르다는 영역이 아니다.
당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속도다.
"산개하세요!"
하려화가 매화십이검의 초식을 펼쳤다.
허공에서 매화가 흐드러지며, 칼날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카카카카캉!
검과 손톱이 맞부딪치며 눈부신 불꽃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큭!"
하려화의 입에서 날카로운 신음이 새어나왔다.
버겁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 일 격, 일 격에 무시무시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퍼퍼퍼퍽!
"크아악!"
옆에 있던 동료가 또 하나 당했다.
그렇게.
"커억."
"으아악!"
실력이 부족한 순서대로 차례차례 무림맹의 고수들이 목숨을 잃었다.
고작 강시가 이토록 강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거늘.
이대로라면…….
얼마 못 가 당한다.
***
대나무 숲에 있던 모두가 불타는 낙양을 바라봤다.
너무나 충격적인 상황에 다들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제대로 허를 찔린 모양이구나. 그 얼떨떨한 표정을 보니 네놈에게 당하면서 쌓인 체증이 조금은 가시는군. 아!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도우러 가려 해 봤자 이미 늦었으니까."
사마자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래. 이미 늦었다.
수천에 이르는 강시들을 상대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무엇보다 네놈들이 지금 저기 있는 자들을 걱정할 때가 아니야."
[사방신 '청룡'이 '고유성창(固有聖唱)'을 발동합니다!]
"크오오오오!"
거대한 푸른 용의 입을 따라 오색 빛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저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브레스.
서양의 드래곤과는 조금 다른, 대기에 녹아 있는 기운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 궤는 다르지 않았다.
1초. 2초…… 3초.
극한까지 압축되는 마력 덩어리가 점점 더 그 크기를 더했다.
진혁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천마가 내공을 회복했다고 한들, 그걸 정제하기 위해선 운기조식을 해야 한다.'
게다가 천마의 몸은 아직 천마신공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완성되지도 않았다.
스승님과 추혼사영 역시 조금 전의 대련으로 인해 내력을 소진했을 터.
모든 요소들이 사마자를 향해 웃어주고 있었다.
아마 이것도 놈이 안배한 상황인 거겠지.
"여기까지 아등바등 기어오느라 고생 많았다. 그러니 이만 죽어라."
사마자의 손끝이 앞으로 향했다.
그걸로 끝이다.
콰콰콰콰콰콰!
비와 바람으로 만든 기운이 일점을 향해 폭사되었다.
대기로 이루어진 칼날이 주위를 초토화로 만들어버리기 시작했다.
닿는 게 그 무엇이든.
저 브레스 앞에서 무력할 뿐이다.
애초에 천재지변에 해당하는 일에 대항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암황과 추혼사영이 나섰다.
"안 그래도 인간하고만 싸우는 게 지루하긴 했지. 용이라고 했던가? 과연, 얼마나 강할지 궁금하구나!"
"누가 싸움에 미친 사람 아니랄까 봐. 지금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흑천마황공과 추혼검이 극성까지 펼쳐졌다.
동시에.
"진짜 산책 괜히 따라 나왔어! 고기만두나 더 먹고 있을걸!"
엘리스가 피로 만든 거대한 작살을 집어던졌다.
우우우웅!
세 개의 스킬이 하나로 합쳐졌다.
콰콰콰콰콰콰콰콰!
브레스와 충돌하자, 모든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산 전체가 날아가는 듯한 충격이 전신을 집어삼켰다.
* * *
시야가 다시 돌아왔을 땐 꽤나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산이었던 것은 더 이상 산이 아니다.
대나무 숲 뒤편으로 생긴 거대한 크레이터.
브레스가 구름을 가로지르면서 남긴 열화된 흔적.
모든 것들이 방금 전 일격이 얼마나 터무니없었는지를 말해주었다.
"크으으……."
"으윽."
암황과 추혼사영은 비무에 이어 브레스를 막아내느라 내기를 바닥까지 소모해 버렸다.
"아야야……."
엘리스 역시 무리하긴 마찬가지였고.
"호오. 그걸 견뎌내다니. 과연, 천마신교의 우호법다워. 나머지도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든 힘을 지니고 있구나."
사마자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용의 권능을 상대로 살아남는 인간이라니.
이 어찌 칭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한 번의 공격을 막은 것만으로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사마자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여전히 고고하게 서 있는 존재가 있었다.
"크하하하! 위대하신 천마시여. 쾌차하신 모습을 보니 이 좌호법.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보아하니 한 절반 정도는 회복한 듯싶군요."
"반나절만 더 있었어도 그대는 감히 이곳에 올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거다."
반나절 뒤엔 운기조식이 끝나, 내공을 완전히 흡수할 수 있었다.
딱…… 반나절만 더 있었다면.
"물론, 그러셨겠죠. 전성기의 당신이라면 아무리 청룡이 있다고 한들 제가 감히 이런 짓을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허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반나절을 계산한 이 사마자의 계략을 칭찬해주십죠."
쿠쿠쿠쿠쿠!
다시 한 번 기상이 요동쳤다.
청룡의 주위로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뇌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기상을 조종하는 청룡에게 있어 마력이 바닥날 일 따윈 없다.
자연 자체가 그 힘의 근원이었으니까.
다시 말해.
브레스를 무한대로 날려대는 것 역시 가능하다는 뜻이다.
"어디 한 번 무릎을 꿇어 보시죠. 혹시 압니까? 제가 자비의 마음으로 당신을 살려줄지?"
"본좌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목숨이 그깟 자존심보단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못 본 사이에 말이 많이 늘었구나. 그만 나불대고 덤비거라."
천마가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천마신공…….]
설령, 주화입마에 빠진다 한들.
내기가 뒤틀려 피를 토하며 비참하게 죽는다 한들.
상대에게 무릎을 꿇을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
최후의 최후까지 천마로서 살다가 쓰러지겠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창 신났을 텐데, 잠깐 한 마디만 해도 될까?"
진혁이 끼어들었다.
"네 차례는 조금 뒤니 기다리고 있어라. 천마를 죽인 다음에 당연히 너 역시 숨통을 끊어줄 테니."
사마자가 선을 그었다.
진혁은 현재 최우선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한 마디에. 사마자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강시들을 통해 진법을 그릴 거라는 것쯤을 이미 알고 있었어."
"허세로군. 이미 엎질러진 물을 앞에 두고 알고 있었다느니 하는 말은 변명밖에 되질 않는다."
사마자가 보란 듯이 낙양을 가리켰다.
불바다로 변해 가는 거대한 성도를 보자, 사마자의 입꼬리가 더더욱 위로 올라갔다.
"똑똑히 보아라. 이것이 그 결과다. 누구의 전략이 우위에 있는지 저 마경이 증명해 주고 있지."
"아니, 너나 똑똑히 잘 보고 있어."
진혁이 하늘을 향해 오른 손을 치켜들었다.
손끝에서 나온 불꽃이 결계를 뚫고 하늘 높게 솟구쳤다.
퍼엉!
불꽃이 폭발하면서 허공에 약 10m 크기의 룬어를 만들었다.
"어이가 없군. 죽기 전에 불꽃놀이라도 하려는 거냐?"
사마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보아하니 무언가 신호를 보낸 것 같은데.
무림맹에 소속된 정예 분파들이 낙양까지 오기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놈들의 동선은 이미 전부 꿰뚫어 놓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뿌우우우!
무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깊은 뿔나팔 소리.
"이건…… 설마?"
사마자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서쪽이다.
서쪽에서 거대한 기운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부응하듯 낙양의 서쪽 평야를 따라 일제히 횃불이 솟구쳤다.
짙은 안개 속, 하나 둘 보이던 횃불들이 순식간에 수십으로 늘어났고 곧이어 수천에 이르렀다.
두두두두두!
이어진 건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었다.
제국의 깃발이 휘날린다.
전신을 철갑으로 둘러싼 중갑기병들이 빠른 속도로 성도를 향해 거리를 좁혔다.
"일주일 안에 이곳까지 오느라 죽는 줄 알았네요. 그래도 다행히 늦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에브라함이 선두에 보였다.
그 옆에는 펜하이머 역시 함께 있었다.
"언데드 몬스터들이 다수라고 하던데,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많은 수의 기병들을 상대로 은폐 마법을 사용하느라 마법사들의 화력 지원도 기대할 수 없으니까요."
"제가 말입니까?"
"……하긴, 에브라함 경과 소드 마스터로 구성된 기사단이 있는 이상 언데드 따위들은 아무리 많아 봤자 의미가 없겠죠."
그때.
"음?"
에브라함의 감각에 강한 기운이 잡혔다.
하얀 피부를 가진 순백의 강시.
이미 엄청난 사람들을 해한 듯 손톱이 붉다 못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저놈은 제가 맡도록 하죠."
[에브라함이 '오러 블레이드'를 발동합니다!]
검신을 뒤덮고 2m가 넘게 솟구친 청백의 오러.
에브라함이 말을 직선으로 몰았다.
콰앙!
가속도가 중첩되면서 마치 탄환이 전장을 가로지르는 것만 같은 착시를 일으켰다.
***
"이……럴 수가."
사마자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만에 하나 있을 변수까지 전부 계산한 전략이었다.
그런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되는 일이란 말인가.
적대 관계에 있는 제국이 무슨 연유로 무림을 돕기 위해 이곳까지 왔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허나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 봤자.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을 거짓으로 만들 순 없었다.
중갑기병들이 강시들을 쓸어버리며, 성내를 수복하는 장면은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놀라긴 조금 이른데…… 아직 나는 준비한 패를 제대로 까지도 않았거든."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를 개방했다.
파츠츠츠!
균열 너머로 보라색 스파크가 일어났다.
용살검 '발뭉'.
신화 속, 용을 베어버린 지그프리트의 성유물이…….
……마침내 나타났다.
한 눈에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신병이기.
"크아아아!"
청룡이 괴성을 내질렀다.
본능적으로 발뭉이 위협적이라는 걸 깨달은 거겠지.
"큭!"
사마자가 청룡을 하늘 위로 올려 보내려 했다.
아무리 강력한 검이라도 저 먼 상공에서 공격한다면 무용지물일 터.
다시 한 번 브레스로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주마!
부우우웅!
상천에 자리 잡은 청룡이 비와 구름을 끌어 모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사마자가 착각한 게 한 가지 있었다.
용을 보유하고 있는 건…….
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와라."
진혁이 팔찌에 마력을 주입했다.
['귀환자의 팔찌'를 사용하셨습니다!]
[팔찌의 두 번째 능력이 활성화됩니다!]
[차원과 차원이 연결됩니다.]
다른 차원을 갔다 돌아온 귀환자.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긴 차원의 연결.
이것은 그 귀환자가 남긴 유산이다.
우우우웅!
이어진 차원 너머 순백의 기운이 일어났다.
[고대종 '???'가 현현합니다!]
구름이 갈라진다.
게이트 넘어 나타난 것은.
"크오오오오!"
마찬가지로 상식과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천외천의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