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새로운 노예는 언제나 환영이야
"드래곤 하트. 그걸 넘겨줬으면 좋겠는데."
"드래곤…… 하트라고? 그게 뭐지?"
청룡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 맞다.
이 녀석 동양 출신 용이었지.
하도 서양 쪽 녀석들하고만 접점이 있어서 그만 깜빡하고 말았다.
무림에서는 그에 걸맞은 적절한 단어로 대체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음. 용들의 몸속에서 기가 응집되어 있는 곳. 쉽게 말해 심장이라고 할 수 있지."
"내 심장을 내놓으라는 소리인가?"
"그런 뜻이야."
진혁의 말에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심장을 내놓으라는 건 곧 목숨을 달라는 뜻.
"앞으로 할 말은 조심해서 선택하는 게 좋을 거다. 인간이여. 그대에게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다만, 그렇다 해서 내 목숨을 내어주겠다는 말은 아니니까."
"이런, 용은 은원 관계 청산에 확실하다고 들었는데, 내가 착각한 건가?"
"억지스러운 선문답은 하지 말거라. 말장난을 받아 줄 정도로 내 인내심이 그리 깊지 못하니."
청룡의 손톱이 움찔했다.
슬슬 열이 뻗치는 모양이다.
"아니면 다른 걸로도 좋아. 원래 이러면 내가 한참 손해 보는 거긴 한데, 가볍게 문신 하나만 해주는 걸로 퉁 치지 뭐."
화르륵!
진혁의 손가락 끝에 불꽃이 일렁였다.
굴종을 강제하는 능력.
바로 '염혼의 낙인'이다.
"내 영혼에 금제를 가하겠다는 건가?"
눈치 한 번 빠르기는.
신수라서 그런지 마력만 봐도 어떤 종류인지 파악이 가능한가 보다.
"심장을 내놓는 것보단 낫잖아?"
"거부한다. 인간 따위의 수족이 될 생각은 없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거부한다라…….
좋게좋게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오면 할 수 없지.
우우우웅!
진혁이 아공간에서 검은색 무언가를 꺼냈다.
"호오. 무기를 꺼내 나와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그거 재밌…… 응?"
청룡의 말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모기!"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음성이 울려 퍼졌으니까.
고구마가 진혁의 품 안에 안겨 날개를 파닥였다.
"그래. 우리 구마. 잘 잤어?"
"모기! 모기모기!"
"응? 나는 잘 지냈냐고? 아니. 나는 잘 못 지냈어. 누군가 내 간절한 부탁을 아주 짓뭉개버렸거든. 목숨까지 구해줬는데, 오히려 죽이려고 한다니까? 믿어져?"
"모오오오기……."
고구마가 낮게 포효했다.
주인의 마음에 상처 입힌 존재를 찾기 위해 앙증맞은 호박색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갔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청룡에게 향했다.
두 용이 정면으로 서로를 마주봤다.
"헉!?"
청룡의 입에서 헛바람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찔하더니 공중으로 날아오르려고 했다.
고대종에게 덤볐다간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이성보다는 본능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여기서 도망쳤다간 정말로 후회할 거야. 내가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걸 정말 싫어하거든."
"도, 도망가려던 게 아니다."
"그럼?"
"그 불꽃.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구나. 제법 멋진 흉터가 생길 것 같기도 하고. 기왕이면 비늘이 두꺼운 어깻죽지에 찍어 줬으면 좋겠다."
청룡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미안하지만, 이미 열차는 떠났어."
처음에 고분고분 낙인을 받아들였으면, 염혼의 낙인만 찍고 끝내려 했다.
진심으로.
하지만.
굳이 고구마까지 꺼내게 만들었으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지.
"수, 순순히 네 말에 따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건가?"
"낙인은 네가 순수하게 은혜를 갚은 의미에서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거고. 벌을 받는 건 추가적으로 해줘야 하는 거지."
"뭘…… 원하는 거냐?"
"여의주."
사마자에게서 '백염의 여의주'를 챙기는 걸 봤다.
용족의 긍지니 뭐니 하면서 날름 챙겨 가는 걸 말이다.
"그건 안 된다. 일족의 긍지가 담긴 신물을…… 넘길 수는……!"
"긍지보다 목숨이 중요하다는 걸 알려줄까? 구마야. 신입 사원분이 회사 분위기를 아직 덜 파악한 것 같은데. 가볍게 허리를 반만 접어 드리렴."
"모기!"
고구마가 손마디를 오도독 꺾었다.
"……그러고 보니 여의주를 4개나 지니고 다니기엔 내 손이 부족한 것 같군. 크흠! 가져…… 후우……. 가져가라. 아주 다 가져가."
청룡이 피눈물을 흘리며 하얀 여의주를 건넸다.
[백염의 여의주]
입수 난이도: SS
내용: 비와 구름을 다룰 수 있는 여의주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한 여의주. 소룡(小龍)들을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백염의 여의주는 그 자체로도 강력한 마력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다양한 곳에 사용 가능한 다중형 아이템입니다.
강력한 마력이 깃든 용족의 신물.
기상을 다루는 능력이나 소룡들을 만들 수 있는 능력도 나쁘지 않았지만, 이 여의주를 쓸 때는 따로 있었다.
'나중에 새로운 무기를 강화할 때 재료로 쓰는 게…… 베스트지.'
대검인 발뭉 외에도 근접전에 특화된 단검을 하나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백염의 여의주는 또 다른 보라색 등급 성유물을 만드는 데 톡톡히 제 역할을 다할 것이다.
좋아.
그럼 다음은…….
"엄살 부리지 마. 보기만큼 아픈 건 아니니까."
진혁이 청룡의 비늘에 '염혼의 낙인'을 찍었다.
치이이익!
모든 걸 체념한 청룡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청룡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지.
"으음. 그럼, 우리 청룡이는 이름을 뭘로 할까?"
"이, 이름이라고?"
"응. 고인물 코퍼레이션에 입사한 신수들은 부르기도 편하고 멋있는 이름 한 개씩을 가지고 있거든. 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이래봬도 작명에는 제법 조예가 있으니까."
고구마나 티본처럼 아주 훌륭한 이름을 붙여 줄 생각이다.
잠시 고민하던 진혁이 무언가 생각났는지 생긋 웃었다.
"말랑흑두루미."
언제나 잘못된 선택을 하며, 대세가 지나간 다음 뒤늦게 막차를 타려는 자.
그것이 말랑말랑한 흑두루미다.
"흑두루미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이 몸은 푸른빛을 띠고 있단 말이다!"
그것도 그렇네.
상관없다.
"오룬에게 부탁해 검은색 갑주라도 하나 만들어서 입히지 뭐."
주로 원거리 공격에 특화되어 있는 탓에, 서양의 드래곤에 비해 비늘이 상대적으로 무르다.
앞으로 근접전을 할 일이 많을 텐데 국밥처럼 든든한 갑주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말랑흑두루미야."
"……."
청룡, 아니 말랑흑두루미가 그 자리에서 게거품을 물었다.
고고하게 무림과 자연을 수호하며, 세상의 균형을 맞추던 삶.
그 긍지 높은 일생은 오늘로서 끝났다.
'어머니…….'
청룡이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
수많은 책들이 놓여 있는 도서관.
릭의 개인 집무실을 찾은 진혁이 갓 우려낸 커피를 홀짝였다.
그윽한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오랜만에 뵈니 정말 반갑군요. 그렇지 않아도 요 며칠간 진혁 님에 관한 이야기로 온통 시끌시끌했습니다."
릭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기대하고 있는 플레이어의 성장과 활약에 잔뜩 신이 난 듯 보였다.
"조금 바쁘긴 했죠."
"그래서 이곳까지 와서 하실 말씀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무림과 제국이 천마신교를 상대로 싸우면서 묘한 유대감이 생긴 것 같더라고요. 무림 쪽에서야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제국의 도움을 받았으니 더욱 고마웠겠죠."
서로 송곳니를 드러내며 치고받고 싸우던 두 세력이 화친을 맺었다.
각자의 영역에서 새로운 번영을 하기로 약속하면서.
"저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대대적인 이벤트 한 개를 공동으로 개최한다고 하더군요."
"예. 그래서 말인데……."
진혁이 본론을 꺼냈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그 이벤트를 방송으로 송출할 수 있는 권한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탑 밖에 있는 사람들이 직접 참여해 우승자에게 배팅을 하는 방식으로요. 수수료의 일부를 저희가 나눠먹을 수 있을 테니, 서로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됐지. 손해가 날 일은 없을 겁니다."
슈브 니구라스로 인해 불안에 떠는 세계.
사람들을 안심시키면서 동시에 참여를 통한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게 바로 이 방법이다.
원래 전쟁이나 위기의 순간에야말로 모두의 긴장을 풀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가 중요한 법이었으니까.
'1분 1초도 허투루 보낼 수 없지.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건 모조리 확보해 둬야 해.'
사마자가 먼저 움직여 둔 덕분에 무림에서의 일이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슈브니구라스가 완전히 현현할 때까지 예측보다 이틀이란 시간이 더 만들어진 셈이다.
유연화와 이태민을 통해 준비하고 있는 게 끝나려면 어차피 최소 하루는 더 필요할 터.
진혁은 이 기회를 살릴 생각이었다.
"흐음. 나쁘지 않은 생각이시군요. 그런데 진혁 님은 이게 어떤 대회인 줄은 알고 계시는 겁니까?"
"네? 대회라면 당연히 일대일로 싸우는 무도회 같은 거 아니었나요?"
진혁이 토끼눈을 떴다.
"역시 모르셨군요. 그러니 이렇게 태연하실 수 있는 거겠죠."
"그게 무슨 말씀인지……."
진혁이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분명, 펜하이머를 통해 우승자가 한 명뿐인 대회라고는 들었는데.
정확히 그게 어떤 종류인지까지는 전해 듣지 못했다.
극비 사항인지 뭔지 되도 않는 이유를 대면서.
그런데.
'뭐지 이 느낌은…….'
오싹하고.
진혁의 등줄기를 따라 한기가 흘렀다.
분명, 릭의 입가에 걸린 음흉한 미소에서 어젯밤 펜하이머에게서 봤던 미소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마…… 기우겠지.
"복이 많으신 겁니다, 진혁 님은…… 아니, 어쩌면 복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릭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아무튼 그럼, 제 제안은 승낙해 주신다는 뜻입니까?"
"좋습니다. 저 역시 재밌는 구경도 할 수 있고 코인도 벌 수 있는 기회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죠. 진혁 님께선 탑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분이시니 그 정도는 제 재량껏 허가해 드릴 수 있습니다."
릭이 여전히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
연회가 개최되는 저녁.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던 진혁은 미처 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했다.
[현재 레벨: 126]
레벨이 하나 올랐다.
사마자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지 못해서 레벨업을 할 수 있는 경험치까진 인정받기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기분 좋은 변수는 언제나 환영이다.
[마력이 369 → 372로 상승합니다.]
투자한 곳은 마력.
'이것도 꽤나 달달하네.'
진혁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띠링!
눈앞에 나타난 상태창으로 인해 모든 게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두 세력의 권한으로 인해 '배필 정하기' 대결이 시작됩니다.]
……응?
지금 뭐라고?
진혁이 천천히 상태창에 나타난 글자를 곱씹었다.
[난이도: 측정 불가]
내용: 플레이어 강진혁의 가슴에 '영원의 장미꽃'이 나타납니다. 그 장미꽃을 얻는 사람이 이번 이벤트의 우승자입니다.
보상1: 우승자에겐 '매혹의 반지(1쌍)'가 주어집니다. 매혹의 반지는 대상의 호감도를 올리는 효과를 지녔으며, 제국과 무림 두 세력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받습니다.
보상2: 탑의 각종 명소에 입장할 수 있는 커플 아이템이 주어집니다.(구름 정원 입장권, 바다 호수 호텔 숙박권, 관리자 '메텔'이 운영하는 최고급 식당 식사권)
상태창이 어쩐지 붉은 것 같다.
'내가 잘못 본 거겠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 중이거나…….'
아니다.
분명 아닐 거다.
진혁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방송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시청자들이 입장합니다.]
[현재 시련의 탑 내부에 있는 자들 중 참여를 희망하는 분은 등록을 시작해 주십시오.]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띠링!
띠링!
띠링!
참가 신청서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