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배필 쟁탈전 (2)
쿠쿠쿠쿠쿠!
테레사가 마력을 끌어 올렸다.
무시무시한 기운이다.
평소에도 막강한 테레사였는데, 마력이 봉인당한 지금은 그 강함이 더욱더 돋보였다.
꿀꺽!
진혁이 마른침을 삼켰다.
마력 봉인을 해제하는 데는 100만 코인이나 그에 준하는 아이템이 필요하다.
'보아하니 최소한 3번째 단계까지 해방시킨 것 같은데…….'
테레사 방에 있는 시청자들 중 엄청나게 큰손이 있는 게 틀림없다.
아니면, 테레사가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마력을 해방시켜 주는 아이템을 구매했거나.
뭐가 됐든 이건 위험하다.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괜히 반항하다가 팔 다리가 하나 없는 신랑이 될지도 모르거든. 뭐, 그건 그것대로 매력 있을 것 같긴 하지만."
테레사가 묘한 웃음을 흘렸다.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모습에 더 소름이 돋는다.
동시에.
콰앙!
테레사가 지면을 박차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검끝이 향한 곳은 왼쪽 가슴.
'영원의 장미꽃'이 있는 곳이다.
부우웅!
'이 정도면 장미만 빼 가려는 게 아니라, 어깻죽지를 잘라버릴 기세잖아.'
진혁이 본능적으로 왼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능력을 봉인당한 상태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반사 신경만으로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테레사의 왼쪽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간신히 포위망을 빠져나가기 직전, 하얀 팔이 진혁의 턱시도를 붙잡았다.
"잡.았.다."
테레사의 입꼬리가 빙그레 올라갔다.
"큭!"
저렇게 가녀린 팔에서 이토록 무시무시한 힘이 나오다니.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
능력뿐 아니라, 스탯까지 너프를 당한 모양이다.
"후후후. 반항하지 마. 솔직히 나 정도면 괜찮은 신붓감이잖아? 집안 좋지,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지도 좋지. 아름답지. 게다가 매일매일이 재밌을걸?"
"잘도 그런 말을 하네. 나중에 타락이 풀리면 얼마나 쪽팔려 하려고 그러냐? 원래 인격의 존엄성도 좀 지켜주는 걸 적극 추천할게."
"흐응. 뭐, 그 순딩이라면 이불킥 좀 하겠지만, 어차피 상관없어. 난 먼저 저지르고 나중에 후회하자는 주의거든."
테레사가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너. 너너너너. 그 손! 그 더러운 손 당장 치우지 못하겠느냐!"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분노한 엘리스가 나타났다.
목소리가 덜덜 떨린다.
붉게 물든 동공과 쭈뼛쭈뼛 선 은발이 꽤나 인상적이다.
"그 힘은……. 너. 봉인을 대체 몇 단계나 푼 거야?"
테레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능력을 제한하는 건 총 10단계.
테레사는 신성 계열 반지를 판매해 3단계까지 봉인을 해제했다.
하지만, 지금 엘리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고작 3단계 수준이 아니었다.
엘리스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입을 열었다.
"전부 다 질렀느니라."
-보상마스터: 전부?
-박종훈: 10단계 봉인을 풀었다는 거야?
-ftd: 아니, 10단계면…… ㅁㅊ. 3천만 코인이 넘게 필요한데? 그걸 다 질렀다고?
지켜보던 시청자들 사이에서 거대한 동요가 일어났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이벤트에 판매되는 각종 아이템들의 가격은 하나같이 괴랄했으니까.
모두가 단순히 이벤트의 화제성을 위해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올려둔 것일 뿐. 실제로 구매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npu3: 코인 복사라도 한 거 아니냐? 저게 말이 되냐? 보니까 제국이랑 무림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 줘서 간신히 7단계 뚫었던데?
-liron3333: 아니, 잠깐. 마력만 해제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저거. 저것 봐. 손에 들고 있는 지도. 저거 보임?
누군가의 말에, 모든 시선이 엘리스의 손으로 향했다.
-최강타장: 헉! 나 뭔지 알겠다. 아이템 중에 제일 비싼 가격에 올린 그거잖아. 1억 코인짜리인데. 저걸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cjm1: 아니, 진혁이랑 데이트 좀 하겠다고…… 1억을 태워? 실화임?
-FP: 판매 기록 살펴보니까. 20층에 있는 고대 유물이랑 교환해 버렸는데? 방어력이 30만짜리 방패잖아.
-실딱이: 현재 시련의 탑 경매장에 등록되어 있는 가장 좋은 방어구의 방어력이 7만인데. 미쳤네. 진짜 미쳤다.
-크리스: 탑 미드 바텀이 전부 웅장해진다.
채팅창이 미친 듯이 폭주했다.
'저 바보 뱀파이어는 성유물까지 사버린 건가.'
엘리스의 손에 쥐어져 있는 지도에서 은은한 파랑색 기운이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등급이 낮은 지도는 대상이 남긴 잔향을 뒤늦게 추적한다면…….
엘리스가 구매한 지도는 아예 대상이 있는 위치를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게 가능했다.
이벤트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특수 아이템에 저런 말도 안 되는 거금을 쏟아 부어버리다니. 진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저 녀석, 설마 진짜로 날 좋아하는 건가?'
진혁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에이 설마.
그냥 소유욕이랑 집착이 남달라서 그런 거겠지.
이벤트에 걸린 보상 중엔 엘리스의 컬렉션에 없는 것도 있었으니까.
"꼬맹이 주제에 어른들 노는 곳에 끼지 말고 저리 가서 네가 좋아하는 만두나 실컷 먹으렴."
"누, 누구 보고 꼬맹이래 이 바보 성녀가!"
꼬맹이란 말에, 엘리스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히 재앙이라 부를 만한 참사로 이어졌다.
[엘리스가 고유 성창 '개벽의 계시록'을 발동합니다!]
등 뒤로 드러나는 붉은 고리.
심판을 자행하는 절대 보구가 개방됐다.
"야…… 넌 여기서 그걸 꺼내면……!"
진혁이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공기 중의 수분이 모조리 타들어 가고, 구름들이 그 형체를 잃어버렸다.
완전히 개화한 한 쌍의 날개에서 거센 돌풍이 일어났다.
"내가 다른 건 다 참아도…… 정말, 진짜로 다 참아도……."
쿠쿠쿠쿠쿠!
상상을 초월하는 겁화가 몰아쳤다.
주위가 온통 붉게 물든 탓에, 시청자들까지 현재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지 못할 정도다.
"이것만큼은 죽어도 양보 못 해!"
확고한 의지가 느껴지는 음성.
이에 질세라 테레사 역시 본신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테레사가 '별의 가호'를 발동합니다!]
"양보 못 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화르륵!
검은 별빛이 테레사의 몸을 감쌌다.
이건 완전히 광기다.
정신 나간 두 괴물이 뿜어내는 마력으로 인해, 누각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진혁이 전투에 휘말리기 직전.
쏘옥!
허리춤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는 게 느껴졌다.
"진혁 님!"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안드리아가 진혁을 단단히 붙잡았다.
"안드리아?"
"탈출할게요. 꽉 잡으세요!"
수인화를 한 안드리아가 여우구슬의 능력을 발동했다.
***
벗어난 곳은 누각으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오는 길에 맹수의 눈을 한 제국의 영애들과, 사생결단의 의지가 느껴지는 무림의 규수들을 만났다.
-어머나. 가슴에 달린 꽃이 매우 예뻐 보이네요. 저희 으슥하고 인적 없는 곳으로 가서 잠시 이야기 좀 나눌까요?
-호호호. 제가 설마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요? 그냥 순수하게 강 공자님이 궁금할 뿐이에요.
이래서 코인이 무섭긴 하다.
연약했던 이들마저도 아이템을 통해 대폭 강화해 줬으니까.
그나마 안드리아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제대로 당할 뻔했다.
"하아.하아.하아."
진혁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순수하게 체력만 사용해 달리는 건 오랜만이었다.
"잡아!"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위치 추적 마법은 왜 이렇게 느려 터진 거래? 아아악! 답답해!"
"아버지는 이럴 때나 돈을 팍팍 좀 써 주시지. 이래서야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길 텐데."
아직까지 골목 너머에서 수많은 여인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키기라도 했다간 장미고 뭐고 간에 뼈도 못 추릴 거다.
"고마워. 안드리아. 덕분에 한 숨 돌릴 수 있게 됐어."
"헤헤. 칭찬받았다."
안드리아가 해맑게 웃었다.
그래. 이렇게 순수한 녀석도 있어야지.
사심 없이 돕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 인생을 완전히 잘못 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려고 했는데.
음?
근데 왜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 같지?
안드리아가 생긋 웃으며 유일한 출구를 가로막았다.
"진혁 님. 그때 기억나요?"
"안……드리아?"
"처음 정신 병동에서 절 구해 주셨을 때요. 전 정말 백마탄 왕자님이 와준 줄 알았어요. 그 전까진 제물로 바쳐지든가. 소모품으로 버려지든가. 둘 중에 하나뿐인 인생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래. 좋은 추억으로 기억해 줘서 정말 고마운데, 좀 비켜주면 안 될까?"
"그래서요. 이번엔 저도 언니들에게 양보만 하지 말고 욕심 좀 부리려고요."
[안드리아가 Lv11 '구미호의 유혹'을 발동합니다!]
아홉 개의 꼬리가 살랑거렸다.
메두사를 정면에서 보기라도 한 것처럼. 전신의 감각이 물러졌다.
'정신……계 공격.'
큰일이다.
방벽이나 다른 스탯들이 막힌 상황에서 이거에 당하면…….
진혁이 온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맨 몸으로는 스킬에 저항할 순 없었다.
"헤헤. 아무리 진혁 님이라도 이 제약 속에선 무리일걸요?"
안드리아가 한 걸음씩 앞으로 다가왔다.
꼬리 중 하나가 볼을 스쳤다.
안드리아의 손이 장미를 향했다.
'끝인 건가.'
라고 생각한 순간.
퍽!
"아……?"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안드리아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뒤쪽에서 나타난 건…….
"주군. 늦어서 죄송합니다."
월영과.
"네놈 뒤치다꺼리는 대체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천유성이었다.
"너희가 여긴 어떻게?"
진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천유성이 역겹다는 듯. 진혁을 노려봤다.
"모른 척 시치미 떼지 마라. 네놈이 스승님께 부탁해 이 쟁탈전에 참가하게 시키지 않았더냐! 대체 무슨 수로 협박을 했길래 스승님께서 강제로 날 이곳에 밀어 넣은 건지. 그 이유를 당장 말해라!"
어허. 협박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흉하게 하냐.
"나는 그냥 네 방 안에 설치해 둔 카메라. 그걸 넘기는 대신, 너를 호위무사로 좀 쓰겠다고 말한 것 밖에 없어."
의학 공부하는 천유성.
검술 훈련을 하는 천유성.
곰돌이 잠옷을 입고 잠자는 천유성.
열심히 찍어 둔 걸 넘기겠다고 한 이야기 밖에 없다.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냐, 이 빌어먹을 자식아!"
스릉!
천유성이 검을 반쯤 뽑으려 했다.
하지만, 추혼사영에게 들은 당부가 생각났는지. 차마 검을 끝까지 뽑진 못했다.
"옳지, 착하다. 착해. 아무리 너라도 스승의 말을 거스르진 않는구나."
쟁탈전이 개최된 직후 추혼사영에게 전음을 보낸 것이 주효했다.
든든한 아군이 둘이나 생겼으니, 이제 중반부는 버틸 만할 거다.
적어도 이 둘이 장미를 빼앗으려고 할 리는 없었으니까.
"주군, 일단 자리부터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지. 그렇지 않아도 몇 개 생각해 둔 장소가 있어."
엘리스나 테레사를 비롯해 위치 추적 아이템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한 곳에 계속해서 머무르는 건 위험하다.
계속해서 움직이며 시간을 끄는 수밖에.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한 가지 조건만 더 갖춰진다면 그때부터는 이쪽에서 전체적인 판을 쥐고 흔들 수 있게 될 테니.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저벅.
골목에서 새로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