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배필 쟁탈전 (3)
골목을 따라 나타난 건 두 명의 여성이었다.
긴 금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청초한 미녀 그리고 그 옆엔 꽤나 어리고 개구쟁이처럼 생긴 소녀가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리스 드 라인하르트라고 해요."
금발의 미녀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라인하르트…….
그러고 보니.
확실히 제국에서 만났던 다른 라인하르트들과 닮았다.
황자들 쪽도 굉장히 미남들만 모여 있었는데, 황녀들도 엄청나긴 엄청나구나.
진혁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난 마유라고 불러줘. 아빠가 오라버니랑 같이 돌아오라고 신신당부를 했거든. 고민하지 말고 나랑 가자. 우리 아빠 엄청나게 세고 돈도 많아!"
구릿빛 피부에 단발머리를 한 소녀가 생긋 웃었다.
그렇다면 이 소녀가 무림맹주의 막내딸이겠군.
참가 명단을 보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중층부 최고의 거물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주군. 그냥 등을 보이기엔…… 둘 다 만만치 않은 실력자들입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원한다면 시간 벌이 정도는 해 줄 수 있다."
월영과 천유성이 진혁의 의견을 물었다.
기본 실력도 어느 정도 있는 아이리스와 마유인데, 각 세력의 후원으로 인해 봉인까지 해제했으니, 천유성과 월영으로서도 발목을 붙잡는 정도가 한계겠지.
하지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진혁은 여유롭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아이리스와 마유가 든든한 뒷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소용없다.
이번 쟁탈전에서 가장 부유한 녀석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제 슬슬 올 때가 되긴 했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콰아앙!
굉음과 함께.
"이 녀석들은 또 뭔데! 그 망할 바보 성녀를 간신히 떼어 놓고 왔더니. 왜 이렇게 경쟁자들이 많은 거야!"
분노한 엘리스가 수십 개의 피로 만든 작살을 꺼내들었다.
[엘리스가 고유 능력 '블러드 로드'를 발동합니다!]
"저 사람은……."
"오오! 뭐야 뭐야. 강해 보이는 연적 등장!"
아이리스와 마유도 각자의 무기를 뽑았다.
곧이어, 영원의 장미를 얻기 위한 처절한 사투가 펼쳐졌다.
***
엘리스의 난입으로 인해 생긴 틈.
진혁은 유유히 골목을 벗어났다.
서로 치고받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다른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위치 추적 아이템이 있는 그녀들에게 있어 진혁이야 언제든지 다시 잡을 수 있었지만, 같은 경쟁자끼리는 방심했다간 탈락을 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그 대전제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사이.
마침내 진혁이 준비하던 계획들이 모두 준비를 끝마쳤다.
"……응?"
"어?"
제국에서 온 한 무리의 여성들이 옹기종기 모여 걷다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딱딱했던 땅이 순간, 폭신해지는 것 같더니.
쑤욱!
순식간에 발목을 집어삼키고 밑으로 빨아들였다.
정령수들을 시켜 만든 함정들이 본격적으로 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꺄아아악!"
"뭐, 뭐야?"
노움이 만든 진흙탕에 다섯 명이 당했다.
뻘판에 쑥쑥 빨려들어간 덕에 드레스와 옷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다른 한편에선 살라맨더가 열심히 불꽃을 뿜어내는 중이었다.
화르륵!
이글거리는 열기에 공들여 한 화장이 녹고. 한껏 멋을 낸 머리카락이 까슬까슬 타들어갔다.
"으아아아!"
"어, 어떡해!"
"내…… 머리! 이거 3시간 동안 한 건데. 망했어. 다 망했다고!"
여기저기서 펼쳐지는 지옥.
허나, 대망을 장식할 재난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우르릉!
콰쾅!
저 멀리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림 전체가 화창한 날씨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낙양에만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여의주의 효과로 인해 '뇌우(雷雨)'가 발동되고 있습니다.]
"난 고귀한 용이다…… 지고하고. 신성한…… 신수라고 할까. 후후. 사방신들 사이에서도 가장 명예롭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있지. 그게 바로 이 몸이다."
청룡, 아니 말랑흑두루미가 자조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모기!"
"아, 알겠다. 열심히 비를 내리고 있지 않느냐. 내가 시키는 건 또 잘하는 편이다."
"모기모기."
고구마의 서슬 퍼런 감시 하에, 말랑흑두루미가 폭우를 퍼부었다.
-래플: 와. 참가자들 완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는데?
-착한용용친구: ㄹㅇ. 악마가 따로 없네. 내가 배팅한 후작가 셋째 딸 쪽은 아예 가망이 없는 듯. 드레스가 검은색이 되어버림.
-jus: 나도임. 배팅한 코인 전부 다 날렸다. 하 3개월을 모은 건데ㅠㅠ
-장지오: 높은 배당 노릴 바엔 우량주 엘리스 코인이나 타지 그랬음? 배당은 낮아도 뜨끈뜨끈한 국밥같이 든든한데.
-jxh: ㅇㅈ. 솔직히 엘리스 피로 만든 죽창 한 방이면 모두가 조용해질 듯.
당황스러워 하는 시청자들의 반응이 쏟아졌다.
설마, 이렇게 빨리 탈락자가 속출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탓이었다.
연회장에서 지켜보던 귀빈들 사이에서도 기가 막히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어……."
"우, 우리 딸내미가……."
제국의 귀족들이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다.
"금지옥엽처럼 키웠건만…… 이렇게 탈락이란 말인가."
"허허. 우리 아이는 아예 강 공자를 만나보지도 못 했습니다."
무림 쪽, 문파의 수장과 장로들도 쓰디쓴 입맛을 다셨다.
"푸하하하! 이거 가관이구만. 솔직히 많이 당황할 줄 알았는데, 역시 물건은 물건이야. 이래서야 전부다 탈락이겠어."
무림맹주, 마태봉이 광소를 터뜨렸다.
자신의 딸 역시 참여한 상태였지만, 마태봉은 오히려 이렇게 흘러가는 게 더욱 즐거운 듯 보였다.
마지막으로 가장 멀찍이서 진혁의 활약상을 지켜보던 천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암황."
"예. 지존."
"저 녀석은…… 잘해 주거라. 조금 칭얼대거나 제멋대로 행동하더라도 건들이지 말고."
"그래야죠. 암요. 적으로 만들었다간 솔직히 사마자나 심마사령보다 골치 아플 것 같습니다."
"10년 전 싸웠던 혈마보다도 더 무서운 놈이다. 본능적으로 어떻게 해야 사람이 가장 괴로워하는지를 알고 있는 느낌이 드는구나."
"……제 눈에도 그리 보입니다."
두 사람이 말없이 화면을 바라봤다.
***
쟁탈전이 시작된 지 얼마나 흘렀을까?
영원의 장미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이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279명 중 남은 건 단 여덟뿐.
제국 측에선 황녀 아이리스와 멜모른 백작가의 차녀가 살아남았고.
무림 측에선 무림맹주의 막내딸인 마유와 화산의 백설린, 그리고 소유명의 여동생인 소청아의 이름이 푸른색으로 표시됐다.
마지막으로 플레이어와 다른 층계의 거주자로 구성된 측에선 당연히 엘리스와 테레사 그리고 안드리아가 남았다.
"정말 지독하네. 이렇게 해도 포기하질 않는다니. 얼마나 더 괴롭혀야 포기를 할 생각인 거지? 흠. 이번엔 취두부를 마파두부로 속여서 먹여 봐야 하나."
진혁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대부분 궂은 함정들에 당해 울면서 백기를 들었는데.
지금 남은 사람들은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계속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그냥 못 이기는 척 장미를 넘겨도 되지 않나? 어차피 다들 네놈에게 관심이 있어 해서 모인 거일 텐데. 한 명 정도는 선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가만히 지켜보던 천유성이 한 마디 거들었다.
물론, 진혁은 그 말을 귓등으로도 넘기지 않았다.
"나한테가 아니라. 이 장미의 능력과 본인이 속한 세력의 이익을 위해서겠지. 게다가 이건 일종의 이벤트성 퀘스트야. 그걸 유도리 있게 받아들여야지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어떡하냐?"
"……됐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아예 감정이 메마른 거였군."
"으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서 그런 말을 들으니 굉장히 기분이 나쁜데?"
진혁과 천유성이 티격태격했다.
"주군. 그래도 남은 사람이 여덟 명뿐이라서 다행입니다. 시간도 1분 남짓밖에 안 남았으니, 사실상 주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 것 아닙니까?"
"맞아. 아마 서로 견제하느라 여기까지 오지도 못할 거야."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이번 이벤트에 출품된 아이템 중에선 단 1분만으로도 상황을 역전시킬 성유물이 있다는 사실을.
[이 지역을 대상으로 '절대 판정' 효과를 지닌 성유물이 사용되었습니다!]
갑자기 급변하는 시야.
쿠쿠쿠쿠쿠쿠!
세 사람이 있는 지역을 주위로 강력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이건……!?"
"주군!"
천유성과 월영이 즉각 자리를 이탈하려 했다.
하지만, 일대를 집어삼킨 붉은 기둥들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후후후후!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헤헤! 아직 1분이나 남았어요!"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긴 금발을 늘어뜨린 테레사와 수인화를 절정까지 발현시킨 안드리아가 보였다.
게다가.
저벅.
좌와 우. 그리고 후방에서도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호위 둘을 붙였다고 짐을 너무 우습게 본 것 아니냐?"
"제국도 쉽게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제 순순하게 포기해."
이대로 가면,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8명이 서로 힘을 합친 것이다.
우선 진혁이 도망가지 못하게 단단하게 포위한 뒤.
그 다음에 누가 영원의 장미를 얻을지 각자의 역량에 맡기자고.
그 계획은 정확하게 먹혀들었다.
모으고 모은 코인들을 통해 최강의 능력을 발동하는 것에 의해서.
[8명의 참가자들이 절대 판정 '속박의 영역'을 요청합니다.]
심상치 않은 마력이 일렁였다.
"절대…… 판정. 젠장. 저거 위험한 것 아니냐?"
천유성이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괜찮아. 이 이벤트에서 쓸 수 있는 절대 판정 아이템은 발동 조건이 더럽게 까다롭거든. 저 녀석들 그냥 코인과 성유물만 날린 거야."
"정말이냐?"
"속고만 살았어? 저 조건은 쟤들이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수준이라니까?"
진혁이 생긋 웃었다.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듯.
띠링!
푸른빛을 띤 상태창이 나타났다.
[이벤트성 조건을 발동하기 위해선 대상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요구됩니다.]
[대상 '강진혁'이 시련의 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과 그것을 조리하는 방법, 최근 3개월간 먹은 횟수 등에 대해 서술하시오.]
[상세하게 설명할수록 능력의 효과가 상승합니다.]
"봐 봐. 이걸 무슨 수로 맞히냐? 아무리 정신 나간 놈이라도……."
그런데, 진혁이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나나나나나!"
엘리스가 정답을 알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댔기 때문이다.
응?
설마……?
"텡콩강 애벌레를 이용해 잡은 레인보우 슈림프를 약불에 1시간 15분 13초 동안 천천히 구운 다음에 5층에서 나오는 아슘트라 소금 13.5g을 7번에 걸쳐 나눠서 뿌려먹는 걸 좋아해. 3달간 26번을 먹었고. 가장 최근에 먹은 건 정확히 62시간 15분 33초 전이야."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
엘리스가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분명, 절대 못 맞힐 거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 인간적으로 저걸 아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 뭔 스토커도 아니고 저걸 알고 있어."
억울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쳤다.
허나, 지금 중요한 건 저걸 어떻게 다 외웠는지 여부가 아니다.
엘리스의 말이 사실이라는 점이지.
[속박의 영역(최상 등급)이 발동됩니다!]
콰콰콰콱!
"큭!"
속박으로 인해 전신이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됐다.
남은 시간은 단 10초.
콰앙!
탁!
8명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내가……!"
"웃기지 마시죠!"
"아아악!"
서로 물고 뜯으며, 각기 다른 방향에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승자는…….
"잡았……!"
엘리스의 손끝이 진혁의 오른쪽 가슴에 있는 영원의 장미에 닿았다.
그리고 손으로 단단히 장미를 움켜쥐었다.
[이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제한 시간: 0h:0m:0s]
"됐어! 내가 이겼어! 이겼다고!"
엘리스가 환호성을 터뜨렸다.
동시에.
[도전자 측의 승자는 없습니다.]
[승자는 술래 '강진혁' 플레이어입니다!]
"……어?"
엘리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