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해방 (3)
한국 각성자 협회.
이곳은 현재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로 인해 패닉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게이트가 해방되기 전 막으려고 했던 노력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으니까.
웅성웅성!
내부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보고와 각종 상황들을 정리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전장치들이 모두 파훼됐습니다. 게, 게이트가…… 해방됩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중앙에 있는 거대한 스크린으로 향했다.
"이럴 수가……."
협회장인 한상진 역시 멍하니 개방되는 게이트를 바라봤다.
전 세계에 걸친 동시 다발적인 아웃브레이크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키에에에에!"
수많은 입이 달린 가지들이 완전히 게이트 밖으로 나오자…….
……지옥과도 같은 천재지변이 시작되었다.
"으아아아악!"
"아아아악!"
"내, 눈! 내…… 내 눈이!"
"끄으으으아아아!"
게이트 밖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비명을 질렀다.
눈과 입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이들.
수십 개의 정신 계열 방어 마법과 최상급 방어구들조차도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랭커들도 있었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콰콰콰콰콰콰!
가지가 주변을 휩쓸자 붉은색 피 운무가 일어났다.
한 번의 가벼운 움직임.
그것에 산전수전을 다 겪은 랭커들이 전멸해 버렸다.
철통같이 게이트 일대를 포위하고 있던 군부대 역시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재가 되어 흩어졌다.
참혹한 결과에, 각국에 있는 각성자 협회 통제실이 더더욱 분주하게 변했다.
"파리 C-15 게이트로 갔던 올림포스 길드 공격대 3팀의 생체 반응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미국 워싱턴의 A-01 게이트 주변…… 1km가 소멸되었습니다. 생존자는 없습니다."
"중국으로 지원을 갔던 간다라 길드 쪽에서도 긴급 SOS 신호가 포착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보고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넘어온 것들은 모두 가지들이었을 뿐.
본체는 여전히 어느 게이트를 통해 나올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
"바, 방금 새로운 마력 반응이 포착되었습니다."
또 다른 보고가 올라왔다.
가지들이 아닌, 가장 강력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는 곳.
"B-00. 갑천 게이트입니다……."
최악의 상황이 일어났다.
본체가 현현하는 곳은 한국이다.
"……."
한상진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남은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
심해와 같이 무거운 침묵이 실내에 맴돌았다.
"공간 이동 마법 통해…… 전원 대피시켜. 군 부대도 철수시키고."
"예? 하, 하지만…."
"어차피 아무리 수가 많아도 소용없어. 시체만 늘릴 뿐이야."
처음엔,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인류가 싸워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 정도로 많은 랭커들과 플레이어들이 만반의 준비를 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슈브 니구라스의 몸에서 나온 마력의 편린을 맛봤을 땐.
그 모든 희망들이 완전히 헛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건 싸워서 어떻게 해볼 수준이 아니다.
아무리 대형 길드의 공격대라고 해도. 내로라하는 랭커라 해도…….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딱 하나.
실낱같은 기회가 남아 있다면…….'강진혁 플레이어님.'
그건 아마 단 한 명의 손에 달려 있었다.
한상진의 시선이 다시 한 번 화면으로 향했다.
분명, 모든 플레이어들은 현재 동해에 나타난 섬에 가 있을 거다.
이 짧은 시간 내에 돌아올 여유 따위는 없을 터.
그런데도 왜일까?
한상진은 여전히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 화면 속에서 나타나 줄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
[게이트가 개방되었습니다!]
게이트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쇠사슬이 모조리 박살났다.
완전히 열린 공간 너머.
"……."
슈브 니구라스가 세상을 바라봤다.
푸른 하늘과 강.
끝없이 늘어져 있는 도심.
이곳이 탑 밖에 있는 인간들의 세상이다.
그리고 이곳에 온 이유는…….
심심함.
그렇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하찮은 미물들이 검은 염소를 격퇴시킨 곳이 바로 여기였으니까.
쿠쿠쿠쿠쿠쿠!
게이트 밖으로 무시무시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닿는 것만으로도 풀이 검게 타들어가고 강물이 메마른다.
상상을 할 수 없는 심연.
저주의 끝이 있다면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거다.
그런데.
"……?"
슈브 니구라스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이미 모두가 도망쳐 텅 비어 있는 도심 속. 몇몇 이들이 무기를 뽑아든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웃기는 일이다.
아무리 시스템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다 한들, 가볍게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터뜨려 죽일 수 있는 미물이었으니까.
하지만, 하찮은 호기심 때문에 상대를 죽이는 것에 잠시 유예가 생겼다.
"인간들이여. 너희는 내가 두렵지. 않은가?"
끼이이이익!
입을 여는 것만으로도 건물의 철근들이 엿가락처럼 휘어나갔다.
박살난 창문 사이로 붉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확실히…… 엄청나긴 하네. 규격 외라는 말이 과장된 게 아니야."
"내 음성을 듣고도. 정신을. 유지하다니. 제법이구나."
보통이라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미치거나 기절하는 게 정상이다.
심할 땐 죽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그걸 견뎌 낸 것만으로도 상당히 뛰어난 플레이어라는 뜻이다.
게다가.
그 옆에 있는 놈들도 정신을 유지하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흥미가 조금 더 커졌다.
이들이라면 억겁의 시간 동안 느껴온 무료함을 달랠 가치가 있다.
"너희들의. 이름을. 묻겠다."
슈브 니구라스의 시선이 각각의 사람들에게 향했다.
"강진혁."
"천유성이다."
"테레사예요."
"주군을 모시는 검. 월영이다."
"안드리아입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아타락시아의 가주이자 순혈의 혈통인…… 엘리스 폰! 읍읍!"
"본좌는 암황. 천마신교의 우호법이다."
슈브 니구라스의 앞에선 이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총 일곱.
숫자는 적지만, 하나같이 최강의 전력들이다.
적어도 인간들 치곤 말이다.
"재.밌구나. 짧은 유희 치고. 나쁘지 않겠어."
킥킥킥킥!
키에에에에!
수많은 가지들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슈브 니구라스가 '태고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붉게 물든 상태창과 함께. 순간 기억에 공백이 생겼다.
고작 0.1초 남짓한 시간 동안이지만,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 것이다.
'정신 방벽'과 '만다라' 그리고 7성급 결계까지 사용했음에도 이렇다니.
"끝판왕은 끝판왕이라 이건가……."
진혁이 떨리는 팔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솔직히 말해 헛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하지만…….
여기서 흔들려선 안 된다.
지금부터는 상식을 깨 버린 싸움이 시작될 테니까.
"최대한 놈의 시선을 끄는 것 위주로 부탁드려요. 여기선 특히 테레사 씨와 스승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맡겨 주세요. 진혁 씨."
"이런 괴물과 싸울 생각을 하다니. 과연, 본좌가 찍은 제자답구나. 뭐, 재수 없어 봐야 북망산 밖에 더 가겠느냐? 이 기회에 마음껏 날뛰어보마."
테레사와 암황이 앞으로 나섰다.
우우우웅!
'별의 가호'와.
파츠츠!
'흑천마황공'이 발현되었다.
동시에.
콰앙!
쾅!
테레사와 암황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좌와 우.
양 측면에서 거대한 마력이 폭발했다.
신성력을 가미한 테레사의 검이 횡으로 가로질렀고. 무시무시한 투기를 응축시킨 암황의 정권이 앞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콰아아앙!
대형종을 일격에 죽일 수 있는 공격조차 슈브 니구라스에겐 통하지 않았다.
마치,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검과 주먹이 허공에 우뚝 멈췄다.
"고작. 이 정도인가."
슈브 니구라스가 따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기대감에서 실망으로.
감정이 변했다.
그때였다. 주위의 공기가 달라진 것은.
"온다!"
암황이 다급히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그 경고를 끝으로.
촤촤촤촤촤촤촤!
날카로운 바람이 공간을 베어 버렸다.
치이익!
절단된 공기로부터 붉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반응하는 게 늦었다면, 차원과 함께 반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쳐다본 것만으로…… 아니, 생각한 것만으로 저런 위력의 공격을 했다는 거야?"
엘리스가 질렸다는 듯, 한 마디 덧붙였다.
심상의 구현화.
최상위 절대자답게, 슈브 니구라스는 상상을 현실화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모두가 절망적으로 보고 있지만, 진혁만은 오히려 이 상황에서 희망을 엿봤다.
가장 까다롭고 날카로운 초격을 피했다.
그 말은 앞으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엘리스."
"응."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을 준비해줘. 내가 신호 보내면 그때를 노릴 거야."
"……진짜로 해보려고?"
"다들, 목숨 걸고 하는 건데, 우리도 외나무다리 정도는 건너 줘야지. 이번 기회에 놈의 안면에 잊지 못할 한 방을 선사해 줄 거야."
"……알겠어. 해 볼게."
엘리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유 성창 '개벽의 계시록'이 발동됩니다!]
엘리스의 등 너머 붉은 고리가 나타났다.
우우우웅!
주위에 있는 수분이 모조리 붉은 핏방울들로 변했고.
곧이어 가늘고 긴 꼬챙이로 변하기 시작했다.
모든 마력을 쏟아 부은 최강의 일격.
이거라면…….
진혁이 크루거와 사복검을 꺼냈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몇 초라도 더 버틸 수 있는지. 그것이 모두의 생존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가 될 것이다.
***
시간을 벌어야 한다.
틈을 만들어야 한다.
그 일념만으로 최전방에 나선 암황이 배수진을 쳤다.
콰앙!
콰아아아앙!
7성 공력의 흑천마황공이 천지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키에에에!"
"킥킥킥!"
너무 많다.
아무리 내공이 깊고. 현란한 보법과 신법을 사용한들…….
압도적인 숫자 앞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빛을 바랠 뿐이었다.
"크……으으……!"
묵직한 충격과 함께 호흡이 어긋났다.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테레사가 2차 각성 스킬 '별들의 부름'을 발동합니다!]
하늘에서 눈부신 유성우가 쏟아졌다.
별의 힘을 담아 내려치는 일격이 슈브 니구라스의 몸 위로 떨어졌다.
콰콰콰콰콰콰!
융단 폭격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광경.
무수히 많은 빛들이 한 자리에 어우러졌다.
"지원할게요!"
테레사가 백색 갑주를 입은 채 모든 마력을 쏟아 부었다.
이미 한계 따위는 진즉에 넘어선 터라, 얼굴에선 핏기까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고맙군."
한숨을 돌린 암황이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즉시 슈브 니구라스의 본체를 향해 파고들었다.
쿠웅!
일보(一步).
내공이 실린 걸음이 지면을 따라 흩어졌다.
쿠웅!
이보(二步).
좁혀진 거리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럼에도 갈라지기 시작한 지면은 다음번 걸음이 얼마나 무거울지 말해주는 듯 보였다.
쿵!
그렇게 이어진 제삼보(第三步).
암황의 몸에서 느껴지던 투기가 모조리 사라졌다.
실수를 한 게 아니다.
초식이 끝난 건 더더욱 아니었고.
그저.
극한까지 압축된 투기가 전부 내부로 스며들었을 뿐.
테레사의 유성우로 인해 슈브 니구라스의 외피에 조금이라도 타격을 입었을 터.
"이게 본좌의 전부다."
암황의 정권이 허공을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