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패도의 왕관 (1)
백금색 모래 사이로 보이는 검은 물체.
바로 천마가 가지고 있던 '패도의 왕관'이다.
50층에 도달하기 위한 핵심 열쇠이자, 그 자체 스펙만으로도 기타 성유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을 보유하고 있는 최상위 아티팩트.
드디어 그걸 손에 넣을 시간이 왔다.
'탐식의 눈'이 대상을 꿰뚫어봤다.
띠링!
[패도의 왕관]
입수 난이도: 측정 불가
내용: 탑에 존재하는 7개의 왕관 중 하나이며 압도적인 '무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보유한 모든 스탯 능력치 +30
……'탐식의 눈'의 레벨이 낮아 세부정보의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좋아.'
의심할 필요 없는 진품이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보유한 모든 스탯을 올려준다는 옵션은 단순히 힘, 민첩, 마력, 체력 기본 4 스탯을 올려준다는 말이 아니다.
'간극과 적응형…… 행운 관련 스탯까지 올려준다는 뜻이지.'
그야말로 사기적인 특성.
특히, 간극은 1층에 있는 '미노타우르스'의 공격을 회피하는 것 외엔 추가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걸 우회적으로나마 올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이것이다.
'게다가…… 50층으로 가기 위한 열쇠이기도 해.'
50층에 입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핵심 아이템.
이후 상층부의 신격들과 상위 거대 세력들과의 위치를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서라도…….
이건 무조건 손에 넣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가서 잡고 싶지만,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놈이 아니겠지.'
어설프게 행동했다가는 오히려 당한다.
최소한, 시선을 분산시키거나……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혀 그 틈을 만들어야 할 터.
순간.
우우우웅!
진혁의 몸에서 나오는 기운이 완전히 달라졌다.
모처럼, 진심으로 가지고 싶은 걸 봤을 때 나오는 소유욕이었다.
"……정말로 나와 경쟁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운드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너야말로 고작, 50층의 사냥개 노릇이나 하면서 나와 싸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였어?"
진혁이 환한 미소로 답했다.
"사냥개라…… 하긴, 그분들을 잘 모르니 우리가 고작 사냥개로 보일 수밖에 없겠군."
"아니, 그 녀석들이라면 이미 겪을 대로 겪었어. 뼈에 사무칠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말이지."
"고작 한 번뿐인 승리를 갖고 지긋지긋하다는 표현을 쓰는 건가? 그것도 편법을 써서 목숨을 연장시킨 걸?"
흠…….
하운드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긴 하겠다.
슈브 니구라스와 단 한 번만 싸웠다고.
그리고 실제로 그 한 번의 전투는… 제대로 된 승리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뭐, 맞는 말이야. 아직은 그 녀석들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하긴 무리겠지."
"아직은?"
"그래. 아직은."
지금이야 몸을 웅크린 채 있지만.
앞으로, 더욱더 강해질 거다.
과거, 전성기의 모습을 따라 잡기 위해서.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탑의 정상을 보기 위해서.
그렇게.
50층의 존재들도. 각 신화를 주름잡는 신격들조차도 범접할 수 없는 곳에 다시 한 번 도달할 생각이다.
스릉.
진혁이 쌍룡검과 송곳니를 꺼냈다.
길이가 다른 한 쌍의 검이 예기를 띠었다.
"다른 친구들도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우리라고 놀고만 있을 순 없지. 그럼, 신명나게 한 판 놀아보자고."
"……후회할 시간은 매우 짧을 거다. 나와 맞선 놈 중에 살아 있는 플레이어 따윈 존재하지 않으니까."
진혁과 하운드가 동시에 움직였다.
탓!
콰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우측 하단에서 오는 공격.
부우웅!
바람 소리가 고막을 파고든다.
동시에, 진혁이 송곳니를 이용해 대검의 궤적을 비틀었다.
퍼퍼퍽!
곧바로 모래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무식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일격이다.
하지만, 눈을 깜빡일 사이도 없이 두 번째 검격이 몸통을 향해 쇄도했다.
"……!"
이건 못 피한다.
진혁이 쌍룡검을 정면으로 내세워 충격에 대비했다.
콰앙!
묵직한 충격이 손끝에서 정수리까지 관통했다.
영웅급에 해당하는 랭커.
역시, 대단하긴 하다.
단순히 파괴력만 놓고 본다면, 거신족들에 비견될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나.
"힘 싸움이라…."
파츠츠……!
이쪽도 그에 걸맞은 거라면 갖고 있다.
[고유 능력 '툼그레이브의 오른팔'이 발동됩니다!]
오른팔에 거신족의 힘이 깃들었다.
근육이 팽창하며, 혈관에 흐르는 마력의 질 또한 달라졌다.
콰아앙!
쾅! 콰앙!
대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눈부신 불꽃이 흐드러졌다.
스치기라도 하면 이마가 그대로 깨질 듯한 검격의 연속이었다.
콰콰콰콰콰콰!
진혁의 모래 뒤편으로 10m 가량의 긴 상처가 생겨났다.
마찬가지로 하운드가 서 있는 반대편에도 비슷한 길이의 상처가 만들어졌다.
회전력을 살린 삼격이 목덜미로 향했다.
한 합. 두 합…… 스무 합.
"흐음…."
공방전이 지속될수록, 하운드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연한 이야기다.
지금껏 니알라토텝의 명령 하에, 수많은 임무를 수행해 왔지만, 자신의 공격을 이 정도로 받아낸 놈은 없었다.
'절대…… 힘이나 속도가 뛰어난 게 아니야.'
오히려 그 부분은 함께 온 나머지 올드 가드들보다도 밀렸다.
허나, 그 모든 단점을 메우고도 남게 해주는 게 한 가지 있었으니.
타이밍.
정확히는 최대의 파괴력이 발휘되기 바로 직전, 바로 그 순간에 끼어듦으로써 위력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콰아앙!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검이 미묘하게 옆으로 흔들렸다.
시간으로 치면, 0.1초도 안 되는 찰나였지만, 하운드는 자신의 호흡을 빼앗겼다.
'우연이 아니었단 말인가.'
한 번이나 두 번이었으면, 몰라도.
처음 3번을 제외한다면, 모든 공격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합을 주고받을수록 이쪽의 호흡을 읽는 정확도가 소름 끼치도록 정확해지고 있었다.
마치, 이제야 좀 감이 온다는 것처럼.
서른아홉 합 째에도 결판이 나질 않자, 두 사람이 잠시나마 거리를 벌렸다.
"이거…… 놀랍군."
하운드가 순수하게 감탄에 찬 음성을 내뱉었다.
이쯤 되면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개개인이 보유한 '호흡'을 읽는 힘 하나만큼은.
상대가 자신보다 위라는 사실을.
"그래서 그토록 자신감이 넘쳤던 거였나? 이런 식으로 내 헛손질을 유도하면서 체력이 떨어지길 기다리면 자연스레 왕관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판단한 거겠지."
실제로 지금 이 순간에도 진혁은 조금씩 왕관이 있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었다.
겉으로는 싸움에 집중하는 척하면서도 모든 신경이 왕관에게 향해 있던 것이다.
탑 내에서 가장 쟁쟁한 괴물들을 모아 둔 올드 가드 중…… 네 번째 위치에 있는 자신을 상대로.
그런 여유를 부렸다라.
"큭큭…… 크하하하!"
하운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이들의 싸움이 잠시나마 멈출 정도로 커다란 광소였다.
"그 알량한 계산이 짜증나는구나. 세포 하나까지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한 눈을 팔던 거였다니."
타이밍이나 호흡은 아무래도 좋다.
압도적인 힘 앞에선 잔재주 따윈 소용없는 법.
지금부터 그 생각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를 알려주겠다.
꾸구국!
묵빛 대검을 따라 붉은색 룬어들이 드러났다.
[올드 가드의 봉인이 해제됩니다.]
[고유 성창 '역천(逆天)의 륜'이 발동됩니다!]
대검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쌍룡검과 송곳니가 이에 반응했다.
그런데.
"끝이다. 애송이."
콰득.
검과 검이 맞닿는 순간.
결코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큭!?"
진혁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환수종 펜타그리스의 송곳니로 만든 단검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상식을 무너뜨려버린 일에,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건 착각이 아니다.
빌어먹을 꿈도 아니었고.
우두둑…….
조금씩 커져 가는 균열을 끝으로.
송곳니의 날이 완전히 쪼개졌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무기가 그 빛을 잃어버린 것이다.
[절대 판정 '붕괴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붉은 상태창이 연이어 나타났다.
"어떠냐. 이래도 왕관에 눈길이 가는 건가?"
하운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맴돌았다.
가지고 있는 애병기를 잃고 나서도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없기에, 지금 진혁이 패닉에 빠져 있을 거라 확신하면서.
하지만.
* * *
'역천의 륜…… 드디어 그 잘난 고유 성창을 다시 보게 됐네.'
진혁은 이미 이런 상황이 펼쳐질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송곳니를 잃은 건 아쉽게 됐지만, 어쩔 수 없지.'
시선이 '탐식의 눈'에 나타나 있는 하운드의 상태창으로 향했다.
이름: 크렉서스 드 아카시우스
별칭: 하운드
레벨: 315
스탯: 힘 533 민첩 215 체력 305 마력 255 외신의 의지 644
고유 능력: 역천(逆天)
고유 성창: 역천(逆天)의 륜
스킬: 스킬의 내용이 너무 많아서 접어두기 상태로 전환되어 있습니다.
상세 내용: 약 1300년 전, 20층의 거주자였던 아카시우스는 '잃어버린 제국'에 소속된 귀족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탑의 세력 다툼에 의해 가문 전체가 멸문했고 그로 인해 세상을 환멸하며 목숨을 끊으려 했습니다. 바로 그때, 그의 재능을 알아본 니알라토텝은 그를 자신의 올드 가드로 삼았습니다.
[복사 조건]
대상의 능력을 복사하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희생해야만 합니다. 희생하는 대상에 따라 능력의 복사 성공 여부가 결정되며, 그 대상이 값진 것일수록 복사된 능력의 완성도가 올라가게 됩니다.
무기를 포기한 건…….
바로 이 능력 복사를 위해서다.
놈의 말대로 왕관이 최우선 목표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쟁쟁한 무리들이 모였는데.
능력을 복사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질 않는다.
마음 같아선 전부 복사하고 싶으나, 주어진 여건상 한 개나…… 운이 좋으면 두 개를 복사하는 게 한계이리라.
그리고 그 첫 번째를 장식할 능력이 바로 우두머리인 하운드의 고유 능력이다.
'제발…….'
진혁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끼고 아끼던 송곳니를 버린 만큼 이 정도면 인정해줬으면 하는데…….
[능력 복사를 위한 요구 조건에 미달되었습니다.]
[추가적인 희생이 요구됩니다.]
터무니없는 능력인 만큼 이걸로도 부족하다.
더 크고 값진 걸 지불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양이라도 많이 때려 박아야 한다.
젠장.
그렇다고 '발뭉'까지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잃어버린 송곳니는 태양의 사구 내에서 새롭게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이 이상은 곤란해.'
드래곤족을 사냥하는 데 최적화된 발뭉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건.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진혁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왕관을 확보하면서 능력까지 복사하고…… 동시에 골칫거리인 올드 가드들을 모조리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위험 부담은 매우 높겠지만, 몇 가지 상황만 잘 맞춰진다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
일단은 해 보는 수밖에.
툭.
진혁이 그대로 등을 보였다.
패도의 왕관이 있는 유사를 향해서.
"푸하하! 역시, 생각 하나는 단순하구나. 기껏 고민한 것이 기도나 하면서 왕관을 잡으러 달려가는 건가!"
승리를 확신한 하운드가 그 뒤를 바짝 추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