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패도의 왕관 (2)
진혁과 하운드가 대치하고 있던 시각.
우우우우웅!
……콰콰콰콰콰!
붉은 선혈의 파도가 일대를 휩쓸었다.
거대한 모래언덕이 일격에 무너지면서 핏방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큭!"
블랙록이 혀를 깨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리하게 흘러가던 전황.
하지만, 새로운 변수의 개입으로 인해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 다른 가주들에 의해 쫓겨난 전대 가주인가.'
전성기 땐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던 절대자.
'그때 왔다면 대장을 포함한 올드 가드 전원이 여기서 뼈를 묻었어야 했겠지.'
아무리 올드 가드들이 탑 내의 영웅들을 사냥하는 사냥개라고 한들, 주신 격의 랭커를 사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건 모두 과거를 가정했을 때의 이야기.
지금 눈앞에 있는 건 그 파편에 불과하다.
쿠쿠쿠쿠쿠!
또다시 붉은 선혈이 몰아쳤다.
동시에 유아시스의 화살이 허공을 꿰뚫었다.
콰앙!
콰아앙!
까다롭기 짝이 없는 공격.
물론, 이런 거에 일일이 대응해 줄 필요는 없다.
시간을 끌기만 하면, 어차피 승기는 이쪽으로 기울 테니까.
그 말을 증명하듯.
"이제 됐어!"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유 성창 '페테롭스의 학살자'가 발동됩니다!]
[기어가는 어둠의 숨결이 사용되었습니다!]
천유성을 상대하고 있는 셀리 쪽에서 새로운 고유 성창이 발동되었다.
니알라토텝으로부터 받은 성유물이 합쳐지자 지면을 따라 흐릿한 그림자들이 일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크르르…."
"키에엑!"
그림자들이 곧 하나의 형을 이뤘다.
다리가 8개가 달린, 붉은 눈의 마수들이다.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마력을 보유한 것도 까다로웠지만, 정작 문제가 되는 건 그 숫자였다.
눈으로 어림잡아도 백 마리가 넘는다.
고구마나 정령수들이 아무리 분전하고 있다고 한들, 이 숫자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이, 이건 좀 너무 많은데?"
"응. 맞아. 도망쳐야 돼."
"그래도 명령 불복종으로 주인한테 죽는 것보단 저 녀석들한테 죽는 게 낫지 않을까?"
"다들 조용히 해. 머리 아파."
정령수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모오오기이이!"
그나마 고대종인 고구마만은 기세에서 밀리지 않았지만, 감정이 척출당한 마수들 역시 고대종의 피어에도 주눅 들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균형을 깬 건 마수들 쪽이었다.
긴 다리를 이용해 단숨에 거리를 좁힌 마수들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닥치는 대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
노움이 흙으로 만든 벽을 방패처럼 둘렀다.
운디네와 실피드가 물과 바람으로 만든 마법을 펼쳐, 방호벽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키에에에!"
"크오오오!"
마수들이 그 벽에 몸을 박으며, 기어올랐다.
물과 바람으로 만든 칼날이 손톱을 난도질했지만, 그 정도로는 놈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
벽 꼭대기에 도달한 마수들이 아래를 향해 도약할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때였다.
"천한 것들이 감히 누구 앞에서 이빨을 드러내며, 덤벼?"
엘리스의 작살이 폭우가 되어 쏟아졌다.
퍼억!
퍼퍼퍽!
수백 개의 작살들이 마수들의 몸에 바람구멍을 만들었다.
"켁!"
"깨갱!"
운디네와 실피드의 마법에도 곧잘 버티던 마수들조차 이런 무지막지한 위력의 폭격은 견뎌낼 수 없었다.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마수들이 벽에서 떨어져 바닥에 뒹굴었다.
그렇게.
모두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바로 그때.
'……지금!'
쾅!
진혁이 자리를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패도의 왕관이 있는 곳을 향해서.
"멍청하긴!"
하운드가 즉각 뒤를 추격했다.
무기를 잃어버린 상대가 이성을 잃고 등을 보였으니….
이제 승부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은 건 저 멍청한 놈이 왕관을 손에 넣을 때를 노려 등을 찌르는 것뿐이겠지.
하운드가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했다.
'결계라…….'
하운드는 진혁의 뒤를 쫓는 와중에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시선이 모래 주위를 훑었다.
약 6성급.
분명, 위력을 축소시키는 형태의 결계다.
먼저 이곳에 도착해 있던 동료들을 시켜 매개물을 만들어둔 게 틀림없다.
'무슨 수작인진 모르겠지만, 이런 결계로 내 마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그야말로 웃음밖에 나오질 않는다.
아니, 이런 게 마지막 비장의 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안쓰러워질 지경이었다.
탓!
하운드가 조금 더 속도를 올렸다.
진혁의 손이 왕관에게 닿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 틈을 노려.
부웅!
대검이 정확하게 척수를 노렸다.
일격에 숨통을 끊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앞으로만 질주하던 진혁의 몸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일어났다.
'다른 무기라도 꺼낸 건가?'
혹여,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상대가 가진 마력의 한계란 정해져 있는 법.
조금 전의 단검이 아닌 더 강력한 성유물을 꺼낸다고 한들 변수로 작용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싹하고.
"무, 무슨……!?"
하운드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무시무시한 마력이다.
감히, 그 끝을 가늠하기 힘들 만큼.
* * *
'자기 희생(sacrifice)'.
송곳니를 자의적으로 파괴할 경우 공격력이 100배만큼 상승하는 특수 효과다.
'능력 복사를 위해서 쓰게 될 줄 몰랐지만…… 그래도 히든카드로서 역할은 톡톡히 할 수 있어.'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를 개방했다.
릭에게서 구입한 마지막 아이템.
'청개구리 초콜릿'
옵션: 아이템에 붙은 능력을 전이시켜 줍니다.
단, 무기의 특성에 따라 전이되는 능력의 완성도가 달라집니다.
오독.
초콜릿을 입에 물자, 뜨거운 기운이 핏줄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통상, 청개구리 초콜릿을 복용했다고 한들, 능력 전이의 효율은 높지 않다.
오룬 정도 되는 대장장이가 일주일 정도 밤낮으로 붙는다면 모를까.
이질적인 능력을 다른 아이템에 고착시킨다는 건 애초에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완벽한 전이'를 가능하게 하는 경우가 한 가지 있다.
아이템의 근본이 하나의 뿌리로부터 나온 것일 경우.
다시 말해.
펜타그리스라는 환수로부터 만들어진 무기일 때, 전이는 온전히 그 위력을 다할 수 있게 된다.
우우웅!
진혁의 손에 긴 장궁이 나타났다.
펜타그리스의 또 다른 상징인 '어금니'.
'별의 가호'로 만든 화살과 청개구리 초콜릿으로 전이시킨 효과가 중첩됐다.
"내가 마력을 약화시키는 결계를 편 건 너를 견제하기 위함이 아니야."
오히려 자기 희생을 통한 터무니없는 파괴력을 축소시키기 위함이었지.
이걸로 테레사나 천유성이 말려들 염려 없이 마음껏 힘을 쓸 수 있게 됐다.
"먹어라."
진혁의 손끝에 걸린 시위가 흔들렸다.
한 점으로 응축된 하얀 빛.
이글거리는 백염(白炎)은 주위의 공기마저 갉아먹었다.
지근거리에서 모든 마력을 끌어 모아 날리는 일격이다.
피할 수 있을 리 없다.
츠츳.
한 줄기 빛이 긴 선을 그렸다.
뒤이어 굉음이 소리를 따라 메아리쳤다.
곧이어.
콰콰콰콰콰쾅!
상상을 초월한 폭풍이 몰아쳤다.
"크아아아!"
하운드의 입에서 긴 비명이 터져 나왔다.
* * *
치이이익…!
화살이 가로지른 곳을 따라 긴 연기가 솟구쳤다.
모래들이 타들어가면서 만들어진 크레이터는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위력적인 일격인지를 방증해주는 듯, 아직까지 천둥소리가 고막을 먹먹하게 짓눌렀다.
"허억. 허억. 허억……."
진혁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무려 100배의 위력.
송곳니의 특수 능력을 발동한 여파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나갈 것만 같다.
'별의 가호'와 결계로 전신을 겹겹이 보호했음에도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당연히.
이 공격을 받은 상대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확신했건만.
젠장.
"그쪽 고유 성창도…… 완전히 규격 외긴 하네. 어떻게 그걸 맞고도 숨통이 붙어 있는 거지?"
진혁이 쓴 입맛을 다셨다.
"크으으…."
크레이터 한가운데서 하운드가 천천히 기어 올라왔다.
사라진 한쪽 팔과 너덜너덜해진 전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죽진 않았다.
정말이지 더럽게도 단단한 몸뚱어리다.
환수들도 즉사시킬 수 있는 위력을 정통으로 직격당한 거니까.
"이… 찢어…죽일 놈이…."
하운드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무리하지 마. 그러다가 진짜로 죽어. 지금 상태로는 유치원생한테도 얻어터질걸?"
아니, 진짜로.
운디네가 이슬로 패도 쓰러질지도 모른다.
"웃…기지 마라. 네놈도 방금 걸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보이는데,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 이 순간에도 하운드의 상처는 빠르게 회복되는 중이었다.
앞으로 10분.
그 정도만 있다면 다시 원래의 컨디션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10분이나 걸릴 바엔…….
분노로 일그러진 하운드가 모래 사이에 있는 걸 집어들었다.
패도의 왕관.
조금 전 공격으로 인해 튕겨져 나간 왕관이 바로 하운드의 근처로 떨어졌던 것이다.
"이것……만 있다면, 네놈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닐 터. 그분께 왕관을 드리는 건…… 그 이후에 하면 될 일이다."
왕관은 50층의 존재들에게도 통하는 최강의 성유물.
이걸 쓴 자는 절대자의 경지에 범접할 수 있게 된다.
"멍청……하게 이걸 내가 손에 쥘 수 있게…… 한 게 네놈의…… 패인이다."
하운드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왕관을 썼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키키키킥!
생전 처음 듣는 불협화음이 신경을 찔렀다.
"크윽… 크아아아아악!"
하운드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쏟아졌다.
막대한 힘을 주어야 할 성유물이 오히려 자신의 몸을 불태우려 하고 있는 것이다.
"크아아아아… 끄아아아아!"
하운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연신 고함을 질러댔다.
어떻게든 왕관을 다시 벗으려 했으나, 왕관은 이미 머리에 달라붙은 듯 도무지 떨어지질 않았다.
"어… 어째서. 대체… 이게 무슨…."
어째서긴,
"패도의 왕관은 주인이 될 만한 자격이 없는 자가 쓸 경우, 성유물이 아닌 독으로 변하거든."
진혁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완전히 온전한 상태의 당신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죽기 직전의 상태라면, 왕관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지."
아무렴, 최상위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겠냐?
"설마…… 부상을 입힌 것도. 일부러 왕관을 내 앞에 둔 것도. 이걸 위해서였나?"
"냉정함을 잃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장치를 좀 해 뒀어. 회수를 맡은 거니. 당연히 왕관의 특성에 대해 일부만 알고 있을 거라는 것도 생각했었고."
니알라토텝이 왕관에 대해 모든 걸 알려줬을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자신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걸 부하들에게 말해 줬을 리가 없겠지.
그리고 어떠한 의구심도 품지 않고 충실하게 니알라토텝의 명령을 수행한 것.
"그게 네가 이 싸움에서 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