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새로운 무기 (5)
촤촤촤촤촤촤…….
유사들이 빠르게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당연히 왕관 역시 모래와 함께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젠장! 그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제정신인 거냐 네놈!"
"글쎄. 정말로 실수였다니까. 정 급하면 저 안으로 들어가서 찾아보든가."
으득!
"이번 일은 기억해 두겠다."
키자키엘이 즉각 구덩이 속으로 몸을 날렸다.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대로 왕관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한다.
또 다시 몇 년이고 왕관이 사라지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으니까.
콰앙!
거대한 빛무리가 구덩이를 따라 아래로 향했다.
"흐음."
진혁이 사라진 키자키엘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걸로 골칫덩어리 하나를 제거했다.
이제 가브리엘 쪽에서도 이번 일에 대해 눈치를 챌 테니, 적어도 오늘 당장만큼은 근육질 천사 놈에게 뒤통수를 맞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남은 건 왕관을 회수하는 건데…….'
당연한 말이지만, 죽기 살기로 얻은 최상위 성유물을 고작 키자키엘 하나 쫓아내자고 버릴 생각은 없다.
문제는…….
이 유사가 어디로 향할지 키자키엘은 물론 자신도 알 수 없다는 점.
심지어 하스팅조차도 유사의 정확한 흐름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 거다.
그러나 딱 하나.
유사의 흐름을 완벽하게 읽어낼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
진혁의 시선이 옆에 있던 하벨리안에게 향했다.
"안방을 들쑤셔 놓은 건 미안한데, 한 번만 도와줄 수 있을까?"
"캬옹?"
하벨리안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금 아래로 던진 물건. 내게 꼭 필요한 거거든. 게다가 널 죽이려고 했던 놈도 그걸 간절하게 찾고 싶어 하는데, 어때? 그 멍청한 놈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는 기회를 잡아 볼래?"
"캬오오!"
하벨리안이 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하겠다는 듯, 꼬리를 좌우로 격하게 흔들었다.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
역시, '프리드웬'을 이용해 이 녀석까지 보호해준 가치가 있었어.
바로 이걸 위해서 '패도의 왕관'을 순순히 포기했었다.
두 가지 토끼를 한 번에 잡기 위해서 말이지.
탓!
하벨리안이 구덩이를 향해 폴짝 뛰었다.
키자키엘이 훨씬 먼저 안으로 들어갔긴 했지만, 누가 웃게 될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아무리 빠르게 날아다닌다 한들, 내부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하벨리안보다 먼저 왕관을 손에 넣을 순 없을 것이다.
'기다리는 동안 이것부터 완벽하게 습득해야겠네.'
진혁이 손에 쥔 기다란 얼음 결정에 정신을 집중했다.
차가운 기운이 손끝으로부터 심장까지 이어진다.
섬세한 컨트롤이 요구되는 탓에,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결정이 완전한 형태를 갖췄습니다!]
파츠츠!
'하벨리안의 혼'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냉기가 완벽하게 갈무리되었다.
동시에.
띠링!
[19층이 공략되었습니다!]
[최대 공훈자: 플레이어 강진혁]
[최초 공략의 대가로 3개의 보상 중 하나를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놀라운 일을 달성하셨습니다.]
[이번 일은 내일 하루 '명예의 전당'에 등재됩니다!]
1. 코인 - 기존 보상보다 4배 많은 코인이 주어집니다.
2. 특수 아이템 - 20층을 공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아이템 중 하나가 랜덤으로 지급됩니다.
3. 거점 관련 -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거점을 보강하거나 새로운 거점을 공략하기 위한 아이템 중 하나가 랜덤으로 지급됩니다.
선택할 수 있는 보상은 총 셋.
"흠……."
진혁이 신중하게 보상들을 확인했다.
먼저 첫 번째.
'코인 4배는 확실히 매력적이긴 해.'
절대치가 보장된 이상, 코인을 이용해 아이템을 구매하든, 다른 곳에 쓰든 할 수 있다.
기본적인 총알이 많다는 건 최소한 평균은 친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머지 2개를 놓고 봤을 때를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메리트가 떨어진다.
진혁이 두 번째 선택지를 바라봤다.
20층이라면, 물량과 점령전이 메인인 곳인데. 거기서 유용하게 쓸 거라…….
이것도 크게 도움이 된다.
키자키엘이나 나머지 세력들을 고려한다면, 거점을 강화할 수 있는 보상도 포기하기 힘들었다.
"……."
이번엔 고민이 꽤나 길어졌다.
둘 다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기에 어느 걸 선택하는 게 옳았는지는 미래의 결과가 말해줄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두 번째를 선택할게."
진혁이 결정을 내렸다.
[히든 보상이 주어집니다.]
[개봉까지 남은 시간 1D : 23H : 59M : 59S]
확인할 수 있는 건 이틀 후다.
20층으로 가는 것도 최소한 그 이후가 되겠지.
바로 그때.
"캬오오오!"
구덩이 속에서 득의양양한 하벨리안의 포효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서의 볼일도 전부 끝마쳤으니, 우선 밖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탑에서 나온 지 하루가 흘렀다.
정신없이 달려온 만큼 몸과 마음에 피로는 누적된 상태.
때문에 진혁은 모처럼의 휴식을 즐길 생각이었다.
그렇게 찾은 곳은 홍대에 위치한 방탈출 카페였다.
엘리스가 두 눈을 반짝였다.
"오오오! 이곳이 바로 인간들 사이에서 그토록 유명하다는 명소이더냐?"
"응. 연화랑 태민이가 예약을 해줬다고 하더라고. 무조건 너랑 가야 한다면서 신신당부를 하던데?"
"정말 생각이 깊은 아이인 것 같더구나. 나도 그 둘과 개인적으로 만난 건 처음이었다만, 매우 만족스러운 대화를 나눴다."
"아, 맞다. 어제 너 두 사람 만나고 왔었댔지?"
갑자기 밤에 나가 봐야 한다고 했던가.
엘리스가 늦은 밤 후다닥 호텔 밖으로 뛰쳐나갔던 게 생각난다.
"그, 그렇다. 그냥 계약자의 지인들이기도 하고 나도 이 시대에 궁금한 점들이 많아 조언을 좀 구했느니라. 그게 뭐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
엘리스가 황급하게 이유를 늘어놓았다.
"맞아. 뭐, 마음껏 쉬라고 했으니, 뭘 하든 네 자유긴 하지."
"흐유."
작게 내쉰 안도의 한숨.
이미 엘리스의 머릿속에선 어제 있던 장황한 작전이 스쳐 지나가는 중이었다.
-언니. 진혁 오빠 좋아하지?
유연화가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폭탄 같은 발언을 툭 하고 내던졌다.
당연히 엘리스는 즉각 부정했지만, 애초에 이런 분야에 있어 현대에 닳고 닳은 유연화의 눈을 피해낼 순 없었다.
하루 종일 가문이니 명예니. 치고받고 싸우거나 자존심 줄다리기나 할 줄 알았지.
연애 감정에 관해선 뉴비 중의 뉴비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렇지 말고. 내 말 들어 봐. 내가 어떻게 하면 그 철벽을 뚫을 수 있을지 알려줄게.
-맞아요. 진혁이 형한테 잘 보이려면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을 쓰는 게 좋거든요.
유연화와 이태민.
두 사람의 조언이 이어졌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확 잡을 수 있는지, '공포'라는 테마의 방탈출 예약을 한 이유에 대해서 세세하게 이유를 나열했다.
그리고 그 제안은.
엘리스로선 꽤나 그럴 듯하게 들렸다.
-최대한 무서운 척을 해. 언니는 엄청나게 강하니까 괜히 귀신같은 거 나왔을 때 다 때려 부수지 말고.
-고전적이긴 한데, 원래 기본이 제일 중요한 거예요. 엘리스 누나는 이런 것조차 모르는 거 같으니까.
엘리스가 열심히 모든 내용들을 메모장에 꼼꼼히 기입했다.
그래.
계획은 완벽하다.
평소와는 다르게 연약하고 가녀린 이미지로 무장한 상태.
아타락시아에 대대로 내려오는 장식품과 그동안 뷰튜브의 각종 인기 채널을 통해 단기 속성 과외까지 섭렵해 두었다.
그런데.
그토록 열심히 준비해 뒀었는데!
"……."
진혁의 옆에 웬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가 서 있었다.
태양의 사구에서도 만났던 프레인지 나발인지 하는 호문쿨루스였다.
"이 녀석은 또 무엇이냐?"
"응? 누구냐니. 너도 알잖아. 프레……."
"나도 누군지는 알아!"
엘리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일어났다.
"그, 근데 왜 화를 내고 그래?"
"나는 너와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는 줄 알았단 말이다!"
아. 둘이서만?
그게 중요한 포인트였나.
이제야 엘리스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알겠다.
하긴, 있다가 먹을 '요괴 빙수'를 여럿이서 나눠먹기엔 양이 좀 적지.
워낙 맛있는 데다 하루 50그릇 한정이라더니.
욕심이 날 수밖에 없긴 하다.
끄덕끄덕.
진혁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빠직.
엘리스의 머릿속에 있던 끈 하나가 끊어졌다.
"이 바보가아아아!"
엘리스의 주먹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
[달이 사라져 버린 산장]
난이도 별 5개, 공포도 별 5개짜리 테마다.
공포 영화 뺨치게 무서운 방과 협동력을 요구하는 미션들에, 호감이 있는 남녀가 함께 들어간다면 반드시 이루진다는 속설이 생겼다.
때문에 유연화는 이걸 강력 추천했었다.
'좋아. 침착해. 아직 끝나지 않았어.'
엘리스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미, 이 방의 함정과 숨겨진 통로들에 대해선 전부 숙지해 두었다.
괜히 어제 하루를 통째로 들여가며 미리 동선을 파악해 둔 게 아니란 말이다.
거미줄이 잔뜩 쳐진 음산한 방.
끼이이익…….
기괴한 소리가 고막을 파고든다.
산장 안으로 톱을 든 괴한이라도 들어올 것처럼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계, 계약자……."
엘리스가 어색한 말투와 표정으로 진혁의 소매를 꼭 잡아당겼다.
"짐은…… 무섭구나. 이곳이."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눈망울과 잔뜩 웅크린 몸이 핵심 포인트이다.
하지만.
"거짓말하지 말고. 오우거 한 부락이 통째로 와도 눈도 까딱하지 않을 거면서 무섭긴 뭐가 무서워? 아. 이곳에 혹시 드래곤 알이나 신격 중 하나가 현현했다면 또 모르긴 하겠네. 아니, 그마저도 놈들이 네 상황을 보고 덤빌 것 같긴 한데."
"야."
"응……?"
"……죽고 싶은 게냐?"
마음에도 없는 말이 나왔다.
이후에도 몇 가지 중요 포인트들이 있었지만, 이렇다 할 만한 성과는 없었다.
오히려, 무표정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프레이 때문에 몇 번이나 속이 뒤집혀야만 했다.
"아니, 프레이.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자 이것 봐. 자물쇠를 왼쪽으로 세 번 움직이라는 뜻이야."
"자물쇠…… 세 번. 응. 알겠어."
진혁이 프레이 옆에 붙어서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슬쩍슬쩍 손길이 스치는 걸 보자, 엘리스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툭하고 튀어나왔다.
"나…… 나도 이거 어떻게 푸는지 모르겠다. 이것도 왼쪽으로 돌리면 되는 것이냐?"
엘리스가 동그랗게 생긴 자물쇠를 낑낑대며 돌려댔다.
하지만, 진혁은 프레이에게 설명을 해주느라 엘리스의 부탁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계약자! 짐이 묻고 있질 않느냐!"
"그것도 왼쪽으로 돌려 봐. 아니면 대충 반대로 해 보든가."
"왼, 왼쪽 세 번……."
"프레이. 그건 좀 다른 종류의 자물쇠야. 아니, 매니저가 말해줬잖아. 자 봐. 먼저 잠금을 풀어 준 다음에 이렇게……."
"왼……쪽 세……버……ㄴ."
콰드득!
우득!
쇠로 만든 자물쇠가 종잇장처럼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왼쪽 세 번 같은 소리하고 있네에에에!"
동시에.
우우우웅!
엘리스의 주위로 굵은 핏방울들이 몰려들었다.
"에, 엘리스? 너 미쳤어? 갑자기 왜 이래? 여기 너가 오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데잖아."
"다 필요 없다. 다 필요 없느니라. 그냥."
상상을 초월하는 마력이 방탈출 카페 전체를 집어삼켰다.
"죽어! 이 바보야!"
콰아아아앙!
곧이어 건물 전체에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