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거점 정비 (1)
거인들의 성채.
처음 거점으로 삼아 둔 이곳은 진혁이 맡은 뒤로 '중‧대형'급까지 성장해 있었다.
제국의 비호나 내부적인 요인이 아니라, 순전히 진혁이란 이름값이 쌓아 올린 결과였다.
그리고 현재.
"이야. 드디어 다 왔네."
진혁과 천유성 그리고 엘리스는 오랜 만에 성채를 방문했다.
테레사만이 유럽에서 긴급히 소집을 부탁해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흠. 생각보다 더 빨리 제 모습을 찾았군. 안트라드 그 해골바가지가 보통 날뛴 게 아니었는데,"
천유성도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흥."
엘리스는 왜인지 모르게 잔뜩 토라져 있었다.
이번에 탑 밖에서 보낸 휴일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아직도 빙수 때문에 삐진 건가.'
아무래도 잠시 동안은 혼자 놔둬야겠다.
세 사람이 성채의 정문을 지나 화원 쪽으로 걸어갔다.
익숙한 성벽들이 늘어져 있는 장소.
한때, 여기서 정신없이 전투를 펼치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래도 고진감래라고. 그게 다 지금을 위한 싹이 됐네.'
거점이 존재함으로서 다른 세력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터.
상층부의 본격적인 세력 다툼을 위해서라도 거점을 보강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 기반을 벌써부터 다져 놨으니, 다른 플레이어들과 비교하면 차원이 다른 유리함을 지니고 있는 셈이었다.
바로 그때.
"오 오랜만이군."
정원 입구에 있던 금발의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에브라함.
제국에 소속된 그랜드 소드마스터이다.
귀족과의 내전 때 황제의 편을 든 만큼, 현재 에브라함이 제국 내에서 갖고 있는 지위와 권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새로이 공작의 지위에 오른 이들조차도 그 앞에선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 옆에는 펜하이머 역시 함께 있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없는 동안, 이곳을 관리해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했습니다."
진혁도 반갑게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동고동락했던 인물들을 다시 만나는 건 즐거운 일이다.
"말씀해 주신 것처럼. 성벽을 강화하고 약 23종류의 방어 마법을 펼쳐 두었습니다. 최소 5서클 이상으로요. 이거라면, 어지간한 몬스터들이나 산적들은 얼씬도 하지 못할 겁니다."
5서클 마법 23종류라…….
확실히 그 정도면 성채 치고는 최상위에 해당하는 방어 수준이다.
제국 내에서도 이 정도로 견고한 성은 황도를 제외한다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거기에 백색 나무 탄그라실과 몽환의 실낙원의 결계까지 있으니, 대형급 거점과 비교해도 밀릴 게 없었다.
하지만.
"여길 공격하려는 놈들이 어지간한 놈들이 아니라 서요."
"또 뭔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나 보군. 자네 정도의 괴물이 그런 반응을 보이다니 좀 무섭기까지 한데?"
에브라함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평생 동안 검을 갈고닦은 그에게 있어 많은 호적수를 만나는 건 숙원 같은 일이었다.
그래. 이래서 전투광들이 좋다.
조금만 자극해 줘도 알아서 온몸을 근질거려 주니까.
"상층부의 놈들이야. 탑을 공략하다가 마찰이 좀 생겼는데, 두고 보라며 이를 갈고 있거든. 내 동선을 완벽하게 파악하긴 힘들 테니, 노린다면 이곳을 노릴 확률이 높겠지."
"호오. 상층부라. 그 놈들이 이곳에 쳐들어온다는 건가? 내가 이번에 새로 익힌 검술을 시험해보기 딱 좋겠…… 이 아니라 그것 참 위험천만하겠군."
에브라함은 오히려 잘됐다는 듯, 손가락을 달싹였다.
반면.
펜하이머는 불안한 얼굴로 한 마디 덧붙였다.
"또다시 불바다가 될 수도 있겠군요."
이제 막 제국 내부가 안정되고 무림과의 전쟁도 휴전이 된 상황.
모처럼 찾은 평화와 번영의 황금기를 또 다른 전쟁으로 날려버리고 싶지 않은 거겠지.
물론, 그 마음은 이해한다.
'나라도 같은 심정일 테니까.'
그러나 어차피 시련의 탑이 진행될수록 탑의 층계에서 안전한 곳 따윈 한 군데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상층부가 해방됨에 따라, 그리고 왕관이 한 곳으로 모임에 따라 50층을 억제하는 구속력 역시 약화되기 때문이다.
결국.
시스템의 철저한 제약 속에 본신의 힘을 억압받던 태고의 존재들이. 나중에는 제 멋대로 탑의 아래층까지 기어 나오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탑은 하나의 거대한 지옥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 미래를 알고 있기에, 진혁은 천천히 미래를 위한 변수들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펜하이머 님."
"예?"
"절 믿습니까?"
"……."
갑자기 던진 질문.
짧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만약, 이 질문을 진혁이 아닌 다른 이가 했다면, 대체 어떻게 이런 막중한 일을 앞에 두고 말만으로 믿으라 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을 것이다.
허나.
"……믿고 있습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절망뿐인 제국과 수많은 왕국들의 앞날.
무너져버린 황권과 희망을 잃어버린 하루를 이어 나가게 해 준 이가…….
다름 아닌 진혁이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을 때, 그것을 가능하게 바꾼 영웅이 바로 눈앞에 있는 진혁이었다.
"그럼, 이번에도 절 믿어 주세요. 제국이 또 다시 전화에 휩쓸릴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되지 않게 막을 테니까요."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제 앞날만을 생각해 실언을 하고 말았군요. 이 모든 평화가 강진혁 플레이어님의 덕분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나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불러주게. 그대가 원한다면, 미약하나마 나와 나를 따르는 기사단이 평원을 가로질러 이곳까지 달려올 테니까."
이걸로 제국의 지원까지 약속 받았다.
세세한 성채 보강은 제국에 머물면서 남는 시간 틈틈이 해두면 될 것이다.
'하벨리안의 혼'을 오룬에게 맡기기 위해서 어차피 며칠 더 이곳에 머무를 생각이었으니.
"그럼,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들리도록 할게요."
"가신다고요? 황도에서 연회를 준비했는데, 참석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연회요?"
"예. 영웅분들이 모처럼 방문해주신 거니, 마땅히 그에 걸맞은 자리를 준비해뒀습니다. 천유성 님이나 옆에 계신 엘리스님도 함께 자리를 빛내 주시면 저희로서는 큰 영광입니다."
"흠 말씀은 감사하긴 한데…… 연회는 좀……."
진혁이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보이려 할 때였다.
"나나나나나! 갈래! 연회!"
계속해서 토라져 있던 엘리스가 강한 의지를 불태웠다.
"엘리스?"
"갈 거야. 진짜 꼭 갈 거라고."
"갑자기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건데?"
"그, 그건……."
엘리스가 아공간 인벤토리에 보관해 둔 또 다른 비장의 카드를 떠올렸다.
[잃어버린 고대 제국 황실 드레스]
펠슈타인 왕국의 마지막 황녀가 입었던 드레스. 수많은 장인들이 수년에 걸쳐 완성시킨 드레스는 심지어 드래곤조차도 탐을 낼 만큼 값진 보석 중의 보석입니다.
내구도 5,000 / 5,000
특수 효과: 착용 시 매력이 +100만큼 상승합니다.
탑 밖에선 실패했지만, 이번만큼은 성공하고야 말겠다.
바보 성녀까지 없으니 확률은 더더욱 올라갈 터.
비쩍 마른 데다 반응이라곤 없는 파랑머리 따위는 적수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시답잖은 건 너희끼리나 해라."
천유성이 흥미를 잃었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런데.
"흐음. 이거 아쉽군요. 이번 기회에 그쪽과 한 번 대련을 해보고 싶었습니다만."
에브라함이 가벼운 말투로 어깨를 으쓱였다.
"나와 대련을 하고 싶었다고?"
"보아하니 검을 꽤 쓸 줄 아는 것 같은데, 좋은 연습 상대가 될 것 같았거든요."
그 말에.
천유성의 발걸음이 즉각 멈췄다.
"호오. 그러니까. 내가 연습 상대 정도로 써 먹기 좋을 거다…… 이런 뜻인가?"
"예. 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빌어먹을 연회인지 뭔지 당장 참석해 주지. 혹여라도 술은 입에 대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팔 하나 잃고 나서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난데없이 두 사람의 대결이 성사되었다.
이거……. 아무래도 연회에 강제로 참석하게 될 듯싶다.
***
투쾅!
"어이쿠!"
콰앙!
"어이쿠! 이런!"
콰득!
"손이 미끄러졌네 이거. 젠장헐!"
"이 미친 영감탱이가! 멀쩡한 식칼을 죄다 부숴먹으면 어쩌자는 거냐!"
대장간에서 고함소리와 절규소리가 한데 뒤섞였다.
망치질보다 언성이 높아지는 걸 보니,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커흠! 거, 내 실수도 했으니, 2실버만 주쇼. 인건비도 안 나오는 거요."
"2실버 같은 소리하네. 조만간 경비대를 통해 체포하라 할 테니. 목이나 닦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카악! 퉤"
남자 한 명이 두 동강난 식칼을 든 채 씩씩거리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에잉. 하여간 요즘 젊은 것들은 장인의 솜씨를 믿지 못해서…… 쯧쯧."
"믿을 사람을 믿으라 해야 믿지. 진즉에 망했을 줄 알았는데, 용케 아직까지 장사 중입니다. 오룬 영감님."
"허어 자네는?"
오룬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가장 만나고 싶으면서도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이 가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젠장헐 죽지도 않고 또 왔……이 아니라 허허. 반갑구먼. 그래, 무슨 일로 이곳에 다시 온 건가?"
"재료 하나를 무기로 좀 만들어주셨으면 해서요. 꽤 고급 재료라 제 수준으로는 다루기 힘들 것 같거든요."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하벨리안의 혼(魂)'을 꺼냈다.
푸른빛이 맴도는 기다란 결정이 광휘를 뿜어냈다.
"이, 이건……."
오룬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목구멍을 따라 마른침이 꿀꺽 넘어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진귀한 재료는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왕실 대장장이로서 살아온 과거의 본능이 꿈틀거리는 건 어찌 보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가능하겠습니까?"
"가, 가능하지. 가능하고말고."
"어째 영 불안한데요? 밖에 고소장이 잔뜩 붙어 있는 것도 그렇고."
"커흠! 내 비록 조금 전에 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건 식칼 나부랭이를 다루느라 그런 거였고. 이런 희귀 재료는 본 실력을 발휘할 걸세. 그 왜, 발뭉도 제대로 완성해서 주지 않았는가?"
"그건 그랬죠."
아직, 제대로 다루기 쉽지 않았지만, 발뭉은 확실히 오룬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
우두둑!
"그럼, 간만에 솜씨 발휘 좀 제대로 해볼까?"
오룬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대장간에 있던 거대한 망치를 움켜쥐었다.
"이 서늘하고 묵직한 감각. 오랜만이로군."
"아직 하라고 하진 않았는데, 좀 손이라도 더 풀……."
"으럿차차차!"
[오룬이 Lv18 '망국의 대장장이'를 발동합니다!]
우우우웅!
망치를 따라 황금색 운무가 일어났다.
콰아앙!
[어설픈 솜씨로 인해 '하벨리안의 혼'의 강화 확률이 하락했습니다!]
[남은 횟수: 2]
"후후. 과연,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군. 좋아. 좋구나. 이래야 할 맛이 나지."
어째 좀 많이 불안하다.
하지만, 오룬의 망치는 이미 또 다시 높게 솟구친 상태였다.
콰아앙!
망치가 결정의 측면을 강타했다.
아름다운 불꽃이 흐드러지며, 망치가 은은하게 공명했다.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인해 '하벨리안의 혼'의 강화 확률이 하락했습니다!]
[남은 횟수: 1]
이번에도 실패다.
"아직, 아직 모르네. 마지막 한 번이야말로 대장장이의 정수가 발휘되는 순간인 법! 끝가지 나를 믿어 주게나."
믿어 달라라…….
물론, 믿어 줘야지.
단.
"참고로."
마지막 망치질 전. 진혁이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거 깨지면, 이 대장간도 함께 깨질 겁니다."
아주 가루로 만들어버릴 생각이다.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게.
"허허…… 허, 허허허……."
오룬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 내렸다.
저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우우웅!
망치가 훨씬 더 강렬하게 빛났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허, 허으아아짜짜짜!"
콰앙!
마지막 망치질이 작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