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화. 회색 숲 (3)
"고, 고인물 코퍼레이션? 핑크? 옐로? 그게 대체 뭐냐?"
크레이 베라티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그런 거에 일일이 대답해 줄 필요는 없다.
이제 곧 죽을 놈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있어. 그런 게."
잡스러운 벌레들은 나머지 사람들이 맡아 줄 터.
이제 가장 중요한 녀석을 때려잡고 테레사와 플레이어들을 구해낼 시간이다.
[Lv3 '헬 파이어'가 발동됩니다!]
왼손에 이글거리는 화염이 나타났다.
돌멩이조차 그대로 증발시켜 버리는 지옥의 불꽃.
그리고.
[고유 능력 '검은 눈물'이 발동됩니다!]
오른손에 쥔 바너드에서 검은색 액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병력 차로 찍어 누르고 싶었나 본데, 그게 오히려 악수가 됐어."
그토록 터무니없는 마력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군대 개미'를 발동시키느라 어쩔 수 없던 거겠지.
진혁이 먼저 움직였다.
부우웅!
왼손에 끌어 모은 헬파이어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키에에에!"
크레이베타리스가 본능적으로 맞아선 안 된다는 걸 느꼈는지, 재빨리 몸을 옆으로 꺾었다.
하지만, 저 큰 덩치로 빠르게 날아오는 헬파이어를 피해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콰아아앙!
"크아악!"
비산하는 검붉은 화산탄과 함께.
곤충의 거대한 몸뚱어리가 뒤로 튕겨나갔다.
어찌나 위력이 강력했던지 크레이 베라티스의 뒤쪽에 있는 수풀이 모조리 화염에 휩싸였다.
화르륵!
"키이이!"
"끄에에에!"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는 불길.
근처에 있다가 말려든 벌레들의 몸이 산 채로 타들어갔다.
"역시 벌레는 불에 태워야 제 맛이지."
진혁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크레이 베라티스를 향해 도약할 자세를 취했다.
'바너드'에서 떨어지는 검은 눈물에 짙은 마력이 스며들었다.
"키에에에! 키에에에엑!"
불길을 피하려고 안달이 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동작이 커지면서, 심장의 위치 또한 확실하게 포착되었다.
탓!
진혁이 단숨에 공격을 개시했다.
헬파이어로 상대의 방어가 무너진 지금이 숨통을 끊을 최적의 적기다.
서걱!
단검이 외피를 가르고 속살을 베었다.
초록빛 체액이 흩뿌려지며, 허리를 따라 기다란 검상이 생겼다.
치이이익!
[검은 눈물의 효과로 인해 '부패'가 진행됩니다!]
[1초당 +100의 데미지가 중첩됩니다!]
빠르게 변색되는 검상.
검은 눈물은 그 자체로도 강력한 능력이었지만, 상처를 악화시키는 특수 효과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살이 썩어문드러지는 걸 두 눈으로 목격한 크레이 베라티스가 발톱을 세웠다.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이 끔찍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스스로의 발톱으로 제 살을 뜯어내는 광경은 꽤나 그로테스크했다.
"크으으……! 이 하찮은 인간 따위에게 이런 수모를 겪게 되다니!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처절한 분노에 가득 찬 음성.
순간.
주위에 있던 마력의 농도가 변했다.
동시에 검은 외피에 붙었던 헬파이어가 사그라들었다.
[회색 숲의 주인이 '형태 변형'을 시동합니다!]
일명, 페이즈 2.
보스 몬스터 중에서도 꽤나 희귀한 놈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형태가 변하는 건 물론, 마력의 질도 상승하는 특징.
때문에 페이즈 2를 보유한 보스 몬스터는 기존 층계보다 적어도 몇 단계는 위의 보스라고 평가해줘야 한다.
꾸드득…… 콰드득!
골격이 변하면서 크레이 베라티스의 몸집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소형화를 통해 마력을 압축하고 쓸데없는 곳에 드는 에너지를 배제한다.
이것이 회색 숲을 지배하는 보스의 진면목이었다.
"젠장. 원래 검은 언덕 부족 녀석들을 쓸어버리려고 아껴두었던 것을. 하지만, 오랜만에 이 모습을 하니 기분은 상쾌하구나."
사람과 비슷한 체구에 특징적으로 꼬리가 5개 달려 있다.
"잔뜩 쪼그라들어서 아까보다 위압감이 훨씬 더 줄었는데, 강해진 거 맞긴 한 거냐?"
"후후. 계속 지껄여봐라. 지금부터는 내 모습을 보는 것도 힘들 테니……."
크레이 베라티스가 여유 있게 키득거리며 주위를 훑었다.
그러다 무언가 결정했는지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좋아. 먼저. 네 녀석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부터 죽여주지."
콰앙!
크레이 베라티스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빠르다!
진혁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
허공으로 뻗은 손에 잡힌 건 아무것도 없다.
이미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크레이 베라티스가 미친 듯이 앞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
"큭큭큭! 크하하하!"
크레이 베라티스가 광소를 터뜨렸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야.
가벼워진 몸.
넘쳐나는 힘까지!
그야말로 모든 게 완벽하다.
곧 있을 세력 전쟁에서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게 유일하게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랄까?
'망령의 교단 그 자식들과 검은 언덕 부족 놈들을 치려면 이 형태로 싸웠어야 했는데…….'
분명, 비장의 카드 하나를 잃은 건 뼈아프긴 하다.
특히 교단 녀석들은 현재 무언가를 찾느라 본진의 경계가 허술해져 있는 상황.
이때를 적절하게 잘 파고든다면 영역을 확장하기엔 최고의 조건이었다.
허나, 지금 눈앞에 있는 가증스러운 인간들을 찢어버릴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사사삭!
크레이 베라티스가 눈 깜짝할 사이에 플레이어들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쪽에서 정신없이 단창을 휘두르던 프레이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큭!"
맞지 않았다.
애꿎게 허공을 가른 단창은 반대편에 있는 나무를 꿰뚫고 바위에 가서 박혔다.
"빌어먹을! 무슨 놈의 속도가……!"
천유성 역시 그림자를 놓쳤다.
'추혼검'의 3식이 두 박자 늦게 지면을 휩쓸었다.
"크하하하! 이제 알겠느냐? 네놈들이 조금 설친다고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탑의 하층부에 해당하는 수준! 매일매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단 말이다!"
압도적인 속도.
공간이동에 버금가는 고속 이동은 눈으로 따라갈 수조차 없었다.
콰콱!
날카로운 팔이 여성 플레이어 한 명의 머리를 붙잡았다.
테레사 앞에 있던 마법 계열 플레이어였다.
"헉?…… 으아아?"
"이제야 본인이 잡힌 걸 깨닫다니. 역시 느려 터졌구나. 인간 놈들이란……."
푸슈슈슉!
뽑혀나간 머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일단 한 마리."
"으아아아아! 괴물 자식이!"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거대한 덩치의 남성이 공성해머를 높게 치켜들었다.
부우웅!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망치가 지면으로 낙하했다.
콰앙!
하지만, 프레이와 천유성의 공격마저도 피해낸 몸이 고작 느려터진 공격에 맞을 리 없다.
"이걸로 두 마리."
깔끔하게 잘린 갑옷의 절단면에서 또 다시 피분수가 뿜어졌다.
방어 마법이 중첩된 갑옷으로도 페이즈2 상태의 일격은 버텨낼 수 없었다.
다음은…….
크레이 베라티스가 곧바로 테레사를 바라봤다.
세 번째 먹잇감이 바로 저 인간 여성이다.
'가장 지키고 싶어 했던 걸 죽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군.'
저 멀리서 진혁이 막 달려오려고 하는 게 보였지만,
이곳에 올 때쯤엔 여자의 목이 뽑혀 나가 있으리라.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테레사가 사력을 다해 마력을 끌어 모았다.
신성력을 넓게 펼쳐 주위의 마력에 반응하려는 생각이었다.
"발악이라…… 그것도 재밌겠구나."
츳.
츠츳.
허공을 가로지른 검을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것으로 피한다.
급소를 노리는 공격은 발걸음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리고.
목을 노리는 칼날의 타이밍에 맞춰.
콰직!
그대로 손가락으로 칼날을 붙잡아버렸다.
"끝이더냐?"
"괴, 괴물 같은……."
테레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만 죽어라."
그런데 손이 목덜미에 닿으려던 바로 그때.
뒤쪽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마력이 느껴졌다.
"벌써 쫓아온 건가? 네놈도 속도에는 조금 자신이…… 크헙!?"
콰앙!
코앞까지 다가온 진혁을 발견한 크레이 베라티스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까스로 꼬리들을 휘둘렀기에 망정이지, 등에 커다란 바람구멍이 생길 뻔했다.
"호오. 페이즈2라고 정말 빨라지긴 했네. 방금 공격으로 끝장낼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네……놈!"
"아아. 너무 열 내진 말고. 기껏 탈피까지 끝냈는데, 흥분해서 날뛰다가 허무하게 죽는다면 그거야말로 억울하지 않겠어?"
"내가 진다는 말이냐? 너 같은 인간 따위에게?"
파앙!
꼬리 중 하나가 탄환처럼 발사되었다.
소닉붐이 일어나며, 날카로운 끝이 진혁의 머리를 관통했다.
아니, 관통했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살짝 틀어 꼬리를 피한 진혁이 피식 웃었다.
"속도는 빠른데, 움직임이 너무 단조로워. 상대방의 동선을 예측하는 맛이 없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야 피하기가 너무 쉽다고."
"크아아아!"
잔뜩 열이 받은 크레이 베라티스가 꼬리 5개를 전부 휘둘렀다.
이번에는 머리뿐 아니라, 팔과 다리 몸통 등.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힐 수 있다면 어디든지 상관없다는 듯.
카카카카캉!
눈부신 불꽃이 어지럽게 피어올랐다.
꼬리의 속도도 눈으로 보기 힘들 만큼 빨랐지만, 진혁은 그보다 더욱 빨리 단검을 휘두르고 몸을 움직였다.
"이건 어떠냐!"
콰앙!
나무에 꼬리를 박은 크레이 베라티스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약 3m 가량 위에서 내리꽂히는 꼬리 공격.
각도가 달라졌기에, 속도와 궤도 역시 낯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진혁은 종이 한 장 차이로 꼬리를 빗겨냈다.
'저건 좀 성가시긴 하네.'
몇 미터 가량 옆으로 이동한 진혁이 숨을 골랐다.
꼬리를 나무에 박아 넣는 방식으로 움직이다보니, 위쪽 공간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공중에서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이 가장 골치 아팠다.
그렇다면…….
진혁의 등 뒤로 푸른 마력이 응집됐다.
불러 온다.
['세계의 기억'이 개방됩니다.]
이것이…….
만능형만이 할 수 있는 전투.
상대에 맞춰 유리한 상성을 강제하는 힘은 현존하는 그 어떤 고유 능력보다도 우위에 있다.
[고유 능력 '괴력난신(怪力亂神)'이 발동됩니다!]
진혁의 등 뒤로 6개의 황금색 반투명한 팔이 생겨났다.
괴력난신.
야차가 사용하던 근접계 고유 능력이다.
"무, 무슨……?"
크레이 베라티스가 꺼낸 꼬리보다 오히려 숫자가 많다.
게다가.
"조심해. 이건 빠르기만 한 게 아니니까."
진혁이 앞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3개의 소닉붐이 주먹이 나가는 방향을 따라 만들어졌다.
콰콰콰콰콰콰!
일권(一拳).
나무가 뿌리채 뽑혀나가고 지면이 갈아엎어진다.
"크아아아아!"
터무니없이 빠른데다 위력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
크레이 베라티스의 장점인 스피드마저도 무색케 만드는 광범위한 일격이었다.
허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단순히 주먹을 휘두르는 거에 진정한 무(武)가 깃들 리 없다.
우우우웅!
혈관을 따라 도는 마력이 더욱 거세게 흐르기 시작했다.
스멀하고.
전신에서 검은 기운이 솟구쳤다.
'흑천마황공(黑天魔皇功)'.
'내가 보유하고 있는 마력과…….'
제12식(第十二式).
'야차의 팔을 통해…….'
일극지합(一極支合).
'스승님의 무공을 재현한다.'
거대한 폭풍이 몰아쳤다.
6개의 팔에서 뿜어져 나온 최강의 권이 대기를 관통했다.
콰지지직!
꼬리들이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갈가리 찢겨 나갔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애초에 '군대 개미'를 사용하지 않았어도 버티기 힘들었을 테니까.
그렇게 폭풍이 지나고 난 자리에 서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끄으으…… 끄어어어……."
퍼퍼퍼퍼퍽!
완전히 걸레짝이 된 크레이 베라티스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동시에.
띠링!
[20층의 거대 세력 중 하나인 '회색 숲'을 점거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랜덤 스킬 박스(?)'를 획득하셨습니다!]
[고인물 코퍼레이션에 대한 모든 세력들의 적대심과 경계심이 최대치로 상승합니다!]
연이은 상태창들이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