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층계 전쟁 (1)
적그리스도의 성배.
'군타페르'의 분신을 20층에 올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이며, 또한 상징적인 의미로서 교단의 정신적인 측면을 지지해주는 성물이었다.
'역시, 이 방 안에 보관해 뒀군.'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아무리 군타페르와 굴종의 계약을 맺었다고 한들, 나태는 나태.
뼛속까지 스며든 특유의 나태함이 어디로 갈 일은 없다.
'거짓으로 연극을 하고 있다고 해봤자 물건을 보관하는 장소라든가. 기본적인 행동패턴은 예측하기 쉽다는 거지.'
때문에 이 방 안에 성배가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교단이 애지중지하는 성물인 만큼, 지독한 독기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얏."
성물에 손을 뻗으려던 테레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별의 가호'로 전신을 감쌌지만 소용없다.
지독한 독기는 군타페르의 가호를 받지 못한 이들에겐 무자비했으니까.
"완전히 담장 너머에 있는 신포도 꼴이군. 테레사 씨가 얻지 못한다면 나 역시도 무리다."
천유성이 혀를 찼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군가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큼!큼! 내가 나설 차례인가."
진혁이 관절을 꺾으며 앞으로 나섰다.
[현재 성물 '적그리스도의 성배'에는 저주 '마계의 겨울비'가 걸려 있는 상태입니다.]
결계로 치면, 무려 11성급에 해당하는 저주다.
당연히 테레사나 천유성이 엄두도 내지 못할 수밖에.
하지만.
'파훼법만 알면 간단해.'
보통 저주의 특성 상 신성력이나 힐링 계열로 대응하려 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상극의 속성은 언제나 극한의 효과를 보장했으니까.
'그게 보통 하는 가장 큰 실수인 게 문제지만.'
진혁이 또 다시 마력을 끌어 모았다.
특히 강한 독기가 응축된 지점이 세 군데.
그리고 성배는 본래 목수가 나무로 만들었다는 특성.
두 개의 단서가 있다면 올바른 해답을 도출할 수 있다.
우우우웅!
'태초의 불꽃'과 '멸천만독'이 동시에 발동되었다.
성배의 틀이 되는 나무를 가열시켜 균열을 만들고 독들이 더욱 미쳐 날뛸 수 있게끔 새로운 종류의 독을 주입한다.
파칙! 파치치……칙!
"키에에에에!"
적그리스도의 성배에서 짐승이 울부짖는 것만 같은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콰콰콰콰콱!
성배의 주위를 감싸던 독기가 한순간에 흩어졌다.
[독기가 모두 정화되었습니다!]
좋아.
이걸로 이곳에 온 목적 중 하나는 달성했다.
밖에서는 타라첸과 검은 언덕 부족이 시간을 끌어주고 있을 터.
이제 남은 한 개의 일만 더 끝마치면 된다.
***
콰아앙!
콰아아앙!
"전부 죽여라! 신께서 열등한 종족의 죽음을 원하신다!"
"멍청한 인간들을 이번 기회에 싸그리 몰아내라. 이 땅은 우리 오크들의 것이다!"
굉음과 함께 수많은 광신도들과 오크들이 한자리에 뒤엉켰다.
한치 앞도 예측되지 않는 혈투.
벌써 몇 시간째 지속된 전투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적아를 가리지 않고 물밀 듯이 밀려드는 광신도들이 수적인 면에선 압도적이었지만, 그에 맞서는 오크들은 개개인의 우월한 전투력을 무기로 삼았다.
특히, 타라첸의 경우 데스 나이트 다섯과 붙어도 밀어붙일 만큼 엄청난 무용을 뽐내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콰!
대지를 휩쓴 검풍에 데스 나이트의 몸이 잘게 찢겨 사라졌다.
"오크 따위에게 이런 수치를……."
교단의 병력을 책임지고 있는 지휘관, '펠라몬'이 어금니를 부러져라 깨물었다.
계속해서 밀리고 있는 전선.
화가 나긴 하지만, 지금 자신의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다.
적어도 교주께서 직접 오시지 않는 한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멍청한 것들!"
사원의 중심부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회색 운무가 솟구쳤다.
화르륵!
화염은 아니다.
닿는 대상의 피부가 타들어가진 않았으니까.
대신 접촉한 대상의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힘은 가히 절망적이라 할 수 있었다.
"으으……으어……어?"
"취……이이이익!?"
느려진 움직임.
글레이브를 휘두르는 손도. 적의 공격에 반응하는 감각도.
모든 게 이전과는 다르다.
약 3배 가까이 늘어나버린 시간.
푹! 푸욱! 퍼퍼퍽!
느려터진 움직임은 치명적이었다.
"크아아……아아아!"
"크오오오!"
오크들이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태의 반경 10m 안에 들어간 오크들은 모든 시간을 지배당했고. 광신도들에 의해 속절없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취, 취익. 괴물 같은 놈."
친위대 오크들이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지금껏 망령의 교단과 전면전으로 붙은 적이 없기에, 그들의 교주인 나태가 어느 정도 힘을 지니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만약 상대가 강하다고 해도 타라첸이라면 얼마든지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그 누가 타라첸의 승리를 점칠 수 있단 말인가?
상식을 무너뜨린 이질적인 능력은 긍지 높은 오크들의 사기를 꺾게 만들기에 충분하고 남았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나서는구나. 우리 땅에 들어온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
나태가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일곱 대죄 '나태'가 고유 능력 '태만의 걸음'을 발동합니다!]
왜곡된 공간 속.
그저 앞으로 걷는 것만으로도 최강의 방어인 동시에 공격이 가능하다.
"죽어……어어……라아아!"
친위대 오크 전사가 휘두른 창이 서서히 느려졌다.
"멍청한 놈."
나태가 귀찮다는 듯 지팡이에 마력을 주입했다.
파스슥……!
날아오던 창이 그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게다가 '태만의 걸음'의 두 번째 효과인 '전염'으로 인해 공격을 한 오크의 몸이 그대로 돌로 변하기 시작했다.
쩌……적 하고.
친위대 오크 한 마리가 석상이 되어 버리기까진 채 3초가 걸리지 않았다.
이런 식이라면 아무리 많은 수가 달라붙어도 의미가 없다.
결국.
"다들 비켜라. 내가 나서겠다."
타라첸이 움직였다.
"취익! 족장! 안 된다! 저런 괴물하고 싸우는 건 위험하다!"
"족장이 잘못된다면 우리 부족 전체가 위험해진다. 여기는 우리가 맡을 테니, 그 사이에 이곳에서 빠져나가라."
오크들이 타라첸을 만류했다.
이곳에서 수천의 오크들이 죽는 것보다 부족의 구심점인 타라첸을 잃는 게 더욱 뼈아팠다.
"여기서 후퇴할 수는 없다. 이렇게 포기해버린다면 우리는 영영 저 녀석들을 이길 수 없단 말이다!"
뼛속까지 스며든 공포를 느꼈다.
이 트라우마는 극복하지 못하면 영원히 검은 언덕 부족의 뇌를 갉아먹는 좀이 될 것이다.
우우우웅!
글레이브를 따라 녹색 기운이 솟구쳤다.
……저 저주받은 기운을 뚫고.
심장에 칼날을 꽂아 넣는다.
콰앙!
그 일념 하나만으로 타라첸이 몸을 날렸다.
[타라첸이 Lv22 '해방된 자'를 발동합니다!]
모든 상태 이상에 면역력을 가질 수 있는 스킬.
타라첸이 나태의 권능으로부터 저항하며, 허공 높이 도약했다.
"크오오오!"
위에서…….
……아래로!
글레이브가 수직으로 내리 꽂혔다.
위력도. 속도도 충분하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다.
"호오. 그래도 우두머리라고. 그럭저럭 쓸 만하군. 다른 놈들보단 좀 더 나아."
허공에서 멈춘 글레이브가 부르르 떨렸다.
"크으……으으…… 으아아아아!"
"애써 봤자 움직일 순 없을 거다. 그리고 말이야. 적의 목을 베어버린다는 건……. 바로 이렇게 하는 거다."
나태의 손가락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아니, 가로 지르려고 했다.
"우리 친구의 목을 칠 생각을 한 거면, 그만 두는 게 좋을 거야."
혼돈에 가득 찬 전장에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
사원의 입구에서. 진혁이 생긋 웃었다.
"너는……."
나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강진혁이라고 해. 조금 더 일찍 인사를 나누고 싶었는데, 이것저것 해야 할 게 많아서 말이야."
"강진혁……. 그래. 네놈이 바로 그놈이로구나."
나태의 관심이 타라첸에게서 진혁으로 옮겨갔다.
"날 알아?"
"아무렴, 그분께서 이를 갈고 있는 인간을 내가 모를 리가 있겠느냐. 게다가 손에 다 넣은 성녀까지 빼앗아갔으니, 교단의 신도들은 모두 네놈에 대해 알고 있다."
한 마디로 유명 인사라는 뜻이다.
"영광이네. 광신도들의 아이돌도 다 돼 보고. 안 그래? 나보고 유명하다잖아."
"아이돌이 아니라 돌아이를 잘못 말한 거겠지."
"유성 씨……. 아무리 그래도 속마음을 그렇게 면상에 대고 말하는 건……."
천유성과 테레사도 한 마디씩 내뱉었다.
"흐음. 그래. 나약해 빠진 동료들을 몇 마리 데리고 왔군. 그래서. 고작 세 명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설마, 나와 싸우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너와 일대일로 붙을 생각은 없어. 네 능력은 꽤나 성가시거든."
'태만의 걸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결점의 고유능력이다.
파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망령의 교단이 있는 사원 안에서만큼은 무적을 자랑했다.
그래. 최강의 능력이지.
딱 하나.
그 능력을 애초부터 봉인할 방법이 있지 않는 한.
진혁이 품속에서 익숙한 물건을 꺼냈다.
"혹시 이거 알려나 몰라? 꽤 마음에 들어서 주워 왔는데."
적그리스도의 성배.
망령의 교단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성물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나태가 너무 놀란 나머지 혀를 깨물 뻔했다.
뼛속까지 찌들어 있는 노곤함과 귀찮음이 모조리 사라질 만큼, 지금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사원 쪽에서 나왔을 때 설마 설마 했는데.
그게 전부 성배를 얻기 위해서였을 줄이야.
"대답해라! 어떻게, 대체 어떻게…… 이곳에 우리 교단의 성물이 있다는 걸 안 것이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플레이어 따위가 신도들만 아는 정보를 무슨 수로 알아냈단 말인가?
게다가 군타페르의 독기로 보호받고 있는 성배를 멀쩡하게 손에 쥐고 있는 것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성녀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다.'
'에덴'에 소속된 대천사급이 직접 움직였다면 몰라도. 단순 신성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궁금한 게 많은 건 알겠는데.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지 않아?"
진혁이 슬쩍 성배를 머리 높이까지 들었다.
그리고.
툭!
성배가 허공에서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아, 안 돼!"
나태의 절규는 다행히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바닥에 닿기 직전, 진혁이 빙하조형을 이용해 성배를 안전하게 받아냈던 것이다.
"어이쿠. 이게 보기보다 좀 무겁네."
"헉. 허억. 헉……."
"교, 교주시여. 저희 성물이……!"
"간악한 사교도가 감히. 무슨 짓거리란 말이냐 이게!"
"멈춰, 멈추라고!"
"끄아아아아! 마신이시여!"
오크들과의 전투에 열을 올리던 광신도들이 오열했다.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손발을 파르르 떨어대는 걸 보자니, 왠지 모르게 말초 신경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기분이다.
'짜릿하네.'
역시 다른 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걸 짓밟을 때가 가장 흥미진진한 법이다.
진혁이 콧노래를 부르며, 성배의 고리 부분에 손가락을 넣고 빙글빙글 돌렸다.
"이, 천사 같은 놈아! 성물은 오래 돼서 내구성이 약하단 말이다. 그렇게 돌려댔다간……!"
빠각.
성배에 박혀 있던 붉은 장신구 하나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박살났다.
"아……. 미안."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만 조금 망가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