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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377화 (378/653)

377화. 층계 전쟁 (2)

조금 떨어진 곳에선 타라첸과 검은 언덕 부족의 오크들이 멍하니 진혁이 하는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시간을 벌면, 상대의 뒤통수를 치겠다고 했던 게 이런 거였나.'

작전의 세부적인 것들까지 일일이 알려주진 않았지만, 만약 전황이 불리해지더라도 한 번에 엎을 수 있는 비책을 준비해 놓겠다고 했었다.

'정말이지 무서운 놈이야.'

타라첸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 이 전쟁을 제안했을 때만 해도 확신은 없었는데.

지금 눈앞에서 진혁이 하고 있는 행동을 보자니, 의구심이 점점 빠르게 사라졌다.

저건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무언가지.

그리고 그 악마 같은 괴물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한 교단의 성물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

"진짜 미안해. 이건 100% 내 실수야.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이미 찢어 죽일 죄를 범한 놈이 능청스레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그게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지는 알고서……!"

"응? 장신구 하나 부순 게 그렇게 심한 잘못이었어? 미안하다고 해도 받아주지 못할 정도로?"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나태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단언컨대 일곱 대죄 중 나태함을 맡게 된 이후, 지금보다 더 격하게 감정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만약, 군타페르와 계약을 맺지 않았어도 감정이라는 걸 느낄 만큼 말이다.

"그래? 사과해도 소용없단 말이지? 그럼, 아예 활활 불태워버리면 되겠네."

진혁이 '태초의 불꽃'을 성배의 코앞까지 갖다 댔다.

화르륵!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당장이라도 성배를 집어삼킬 듯 보였다.

"잠깐, 잠깐만! 진정해라!"

"마신의 신물이……!"

"당장 저자를 막아야 합니다!"

광신도들이 우루루 진혁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피어오른 불꽃은 이미 성배에 닿았으니까.

콰콰콰콰콰콰!

"키에에에에!"

불에 타는 고통을 그대로 표출하듯. 성배로부터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그리스도의 성배'가 훼손되고 있습니다!]

['망령의 교단'에 소속된 모든 거주자들의 능력치가 10%만큼 하락합니다!]

[마계의 신격 '군타페르'가 크게 분노합니다.]

[암속성 계열의 신격들로부터 호감도가 하락합니다.]

연이어 나타나는 붉은 상태창들.

활활 타오르는 성배는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 당장! 불을 꺼라!"

신도 전원이 패닉에 빠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태 또한 갑작스러운 이변에 당황스러워하는 상황.

때문에 무적에 가까운 '태만의 걸음' 역시 그 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바로 지금이다!

"유성아!"

"그래, 알고 있다!"

"갈게요!"

진혁의 신호에 맞춰 천유성과 테레사가 한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빠르고. 간결하게.

최단 거리를 살린 기습은 그 이점만큼이나 화려한 효과를 창출했다.

[고유 능력 '검의 노래'가 발동됩니다!]

[고유 능력 '별의 가호'가 발동됩니다!]

서로 다른 능력.

하지만, 이미 몇 번이나 합을 맞춘 덕에 어떤 식으로 사용해야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천유성의 검격에.

테레사의 빛이 스며든다.

[검신일체(劍身一體) '두 개의 혼'이 개화합니다!]

"크아아악!"

"으아아아!"

콰콰콰콰콰콰!

일검에 수십이 넘는 신도들의 몸이 잘려나갔다.

가히, 태산을 갈라버린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만들어준 틈을 이용해.

진혁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네놈!"

위기감을 느낀 나태가 재차 능력을 발동시켰다.

걸음이 옮겨짐에 따라, 회색 운무가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능력이 완전히 발동되는 것보다 진혁이 한 발 더 빨랐다.

콰앙!

진혁의 다리에 직격당한 나태가 그대로 땅바닥을 뒹굴었다.

"크억?"

끔찍한 격통이 복부를 흔들었다.

언제나 고통을 주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삶. 마지막으로 통증이라는 걸 느낀 게 언제란 말인가?

허나, 치욕스러운 순간은 이걸로 끝이다.

"감히, 내 몸에 더러운 발을 갖다 대다니."

석화.

조금 전 오크 한 마리를 통째로 돌로 만든 능력이 발동되었다.

"……내, 내 몸이?"

진혁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발끝에서 돌로 변하기 시작한 석화가 삽시간에 종아리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제발, 안 돼. 이럴 순 없어."

진혁이 온몸을 마구 발버둥 쳤다.

"크하하하! 멍청한 놈! 전투를 잘 지켜봤으면,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건 피할 수 있었을 것을……! 이 모든 게 일곱 대죄를 우습게 본 대가다."

"……라고 할 줄 알았어?"

온갖 연기를 다 하던 진혁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고유 능력 '니힐리즘'이 발동됩니다!]

모든 능력과 스킬들을 봉인시키는 '니체'의 고유 능력.

방금 전 복부를 걷어찬 건 단순히 타격을 위해서가 아니다.

마력이 모이는 지점.

즉, 혈을 뒤흔들려는 게 목적이었지.

니힐리즘의 숙련도가 아직 부족한 탓에 그 자체만으로는 완벽하게 상대의 능력을 억제할 수 없었지만, 혈과 함께 사용할 경우 부족한 부분을 메워버릴 수 있었다.

물론.

"석화가…… 도중에 풀렸다고?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지?"

그 사실을 모르는 나태의 입장에선, 이 모든 게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능력이 제대로 발동되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동양의 신비……라고 해둘까?"

진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스승님한테 혈에 대해 이것저것 배우다 보니, 자연스레 몸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되더라.

어디를 때려야 좀 더 효과적인지. 어느 혈도가 기의 흐름을 방해하고 돕게 하는지. 등등.

덕분에 '태만의 발걸음'을 신경 쓰지 않고 싸울 수 있는 상황이 갖추어졌다.

'혈이 눌려 있는 동안 승부를 봐야 해.'

보통이라면 반나절은 갈 테지만, 나태 정도 되는 괴물은 기껏해야 15분이 한계일 것이다.

15분.

그게 이 전투의 승부를 가를 시간이다.

"후우……."

진혁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본래라면 상층부에 가서야 만나게 될 강적.

아무리 굴종의 제약을 받고 있는 상태라 한들, 그 격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강함'.

칠죄종을 정의한다면 그 한 마디로 충분했으니까.

그렇다면…….

[고유 능력 '만상공유(萬祥共有)'가 발동됩니다.]

이쪽도 그에 걸맞은 것들로 상대해야 한다.

진혁의 몸을 따라 높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는 동료의 기억과 능력이 떠올랐다.

[고대종 '???(고구마)'의 능력을 선택하셨습니다.]

쿠쿠쿠쿠쿠쿠!

바로 그 순간, 진혁의 몸을 따라 거대한 파장이 뿜어졌다.

피어.

용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이 일대를 집어삼켰다.

저릿저릿!

피부에 전해지는 살벌한 압박감.

정신계열에 작용되는 피어는 어지간한 대상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용인(龍人)도 아니면서 피어라니. 대체…… 정체가 뭐냐 네놈은!"

"내가 드래곤이라니. 섭섭하네. 자 봐 봐. 꼬리나 뿔 따윈 없어."

"말장난이나 하고 있을 셈이더냐?"

나태가 피어의 압박감을 떨쳐내며 지팡이를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허공을 따라 회색 빛깔의 마법진들이 만들어졌다.

그 숫자만 해도 30개가 가볍게 넘는다.

"네 종족이 뭐가 됐든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눌러버리면 그만일 터. 내가 가진 능력이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퍼어어엉!

이어진 건 융단 폭격에 버금가는 회색 빗줄기의 향연이었다.

"크아아아!"

"교, 교주시여!"

"취익! 다들 피해라!"

"주위에 있으면 말려든다!"

적아를 가리지 않는 광역기.

상상을 초월하는 화력이 집중되자, 사원 일대가 쑥대밭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쪽이더냐!"

자욱한 연기 속에서도 나태는 진혁이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미세한 마력의 흐름을 추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콰아앙! 쾅 콰콰콰쾅!

진혁이 있던 자리에 회색 화염이 폭발했다.

하지만, '음영극살'을 통해 단거리 공간이동을 하는 진혁 역시 나태의 공격에 쉽사리 맞아 주지 않았다.

"요리조리 잘도 도망 다니는구나!"

"도망이라고?"

진혁이 나태의 등 뒤를 잡은 건 바로 그때였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본데, 음영극살은 도주기나 회피기가 아니야."

완벽한 타이밍에 상대의 허를 찔러 숨통을 끊기 위한 스킬이지.

그림자와 그림자가 맞물리며, 시각에 사각이 만들어졌다.

푹!

'검의 무덤'으로 인해 검붉게 달아오른 단검이 나태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긴 핏줄기가 뿜어졌다.

"크아악!"

그러나, 보통이라면 즉사에 가까운 치명상을 입고도 나태는 여전히 팔팔하게 움직였다.

특유의 태만함은 죽음까지도 피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던 것이다.

"정말 질기긴 질기네. 찌르는 게 아니라 아예 목을 쳐 버렸어야 했나?"

진혁이 혀를 찼다.

"그래. 어디 한 번 계속해서 여유를 부려 봐라."

"패자의 넋두리라면 사양하고 싶은데, 구구절절하기만 해서 따분하다 못해 잠이 올 지경이거든."

"크크크…… 아니, 그런 것 따위나 하려고 말한 게 아니다. 네놈도 비장의 카드를 준비했듯. 위대하신 우리 마왕께서도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몇 가지 대응책을 준비했느니라."

나태의 입이 씰룩였다.

그러자,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검은 액체가 뚝뚝 흘러내리더니. 이내 허공에 거대한 직사각형을 그렸다.

"그건 또 무슨 뜻이지?"

"별 뜻은 없다. 단지, 네놈이 여기서 이렇고 있는 동안 네가 아끼던 곳이 불바다가 되고 있을 거라는 소리다."

직사각형 모양의 검은 상자를 통해 보이는 건, 거인들의 성채.

진혁이 보유하고 있는 거점이었다.

콰아앙!

거인들의 성채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인지를 초월한 힘을 가진 성스러운 존재가 자신의 몸집보다 더 커다란 검을 휘둘렀다.

키자키엘.

패도의 왕관을 찾기 위해 이를 갈고 있던 에덴의 전투단장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직접 나섰다.

게다가 그를 따르는 에덴의 전투병들 역시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지경이다.

"이거, 마계 쪽에서 에덴과 손이라도 잡은 게 알려지면 꽤나 곤란할 텐데?"

"이해관계가 맞아서 잠시 함께하고 있을 뿐. 저 녀석은 그저 장기말이다. 마왕께서 너 같은 미꾸라지를 사냥하려면 그만한 준비를 해 둬야 한다고 하셨는데…… 처음엔 반신반의 했지만, 이제야 그 깊은 뜻을 알겠더군."

키자키엘이 직접 나선 이상. 중형 거점 따위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질 것이다.

그걸 막기 위해선 지금 당장이라도 진혁이 직접 거점으로 돌아가야 하겠지.

"하지만, 날 상대하면서 서두르다간 오히려 네 목숨이 위험해질 거다."

거대한 족쇄를 달고 싸워야 하는 셈.

자.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외통수에 몰린 인간은 보통 흥분하며 악수를 두거나, 체념한 채 모든 걸 내려놓는다.

물론.

진혁은 그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되지 않았다.

"나도…… 너희 쪽에서 거점을 노릴 거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어."

거점은 그 세력의 근원.

그런 곳을 쉽게 내줄 생각 따윈 당연히 없다.

"그러니, 든든한 동료들을 배치해 뒀지."

***

"후우……."

하얗게 물든 짧은 단발, 붉은 눈동자.

[특수 능력 '구미호'화 - '여우불 놀이'가 시작됩니다.]

안드리아의 등을 따라 9개의 꼬리가 돋아났다.

"마스터의 명이다. 지금부터 침입자들을 모조리 격퇴한다."

유령군마를 탄 티본이 성문 밖으로 나섰다.

그 뒤를 마찬가지로 유령군마를 탄 고대병들이 따랐다.

"모오오기이이!"

"캬오오!"

"사신수 중 하나인 내가 고작 수성전 따위나 해야 한다니…… 나머지 녀석들이 들었다간 배꼽을 잡고 웃겠군."

고구마와 하벨리안 그리고 말랑흑두루미 역시 성채의 꼭대기에서 적들을 맞이했다.

이제 본격적인 층계 전쟁의 서막이다.

자.

"너야말로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진혁이 화두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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