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층계 전쟁 (3)
계획은 완벽했다.
상대가 자신이 유리하다고 믿게끔 설계하고 거기에 확신을 갖게 만든 뒤, 모든 것을 엎어버릴 생각이었으니까.
후방이 쑥대밭으로 변해 가는 걸 보면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진혁을 볼 생각을 하니, 심장까지 두근거리곤 했었다.
하지만.
그러한 희망은 이 순간을 기점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저토록…… 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다.
거인들의 성채를 지키고 있는 존재들은 20층의 거대 세력에 비해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환수종과 신수, 그리고 용족까지.
각 미궁이나 유적의 보스급에 해당하는 고위 종족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었다.
"캬오오오!"
고구마의 브레스가 뿜어지자, 하얀색 빛줄기가 허공을 꿰뚫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화력.
크기가 작은 새끼용이라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으아아악!"
"피, 피해라!"
몰려 있던 천사들이 황급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성역 전개 '솔로몬의 방벽'이 발동됩니다!]
천사들의 주위로 새하얀 성벽이 나타났다.
신성력이 겹겹이 둘러진 최강의 방어 스킬.
이거라면 해츨링 수준의 브레스는 막아낼 수 있을…….
콰아아앙!
성벽이 박살나며, 뒤에 있던 천사들이 모조리 증발해버렸다.
한 번에 오십이 넘는 천사들이 먼지가 되어 사라진 것이다.
"그, 그냥 드래곤이 아니야."
평범한 드래곤이 이런 위력의 브레스를 가지고 있을 리는 없다.
그렇다고 46층에 소속된 '최초의 드래곤' 중 하나가 이곳에 있다고 보는 것 역시 말이 되질 않았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눈앞에 있는 저 드래곤은 누구란 말인가?
그 대답을 고민할 시간은 그들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위쪽에서 또 옵니다!"
기상을 조종하는 청룡, 말랑흑두루미가 움직였다.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천사들의 특성상, 공대지 능력이 커다란 무기로서 작용하는데,
말랑흑두루미는 그 장점 자체를 없애버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래, 나중에 그 멍청한 흰둥이 호랑이랑 느림보 거북이 자식에게 말하려 해도 천사 놈들 정도는 상대했다고 해야 체면이 좀 서지. 적어도 잔챙이들이랑 싸운 건 아니니까."
말랑흑두루미가 애써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고고한 사신수의 하나로서 진혁에게 복종한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말랑흑두루미가 '기상개변(氣象改變)'을 발동합니다!]
쏴아아아……!
하늘이 열리며, 폭우가 몰아쳤다.
"규, 균형을 잡을 수가……."
"공중은 포기하고 전부 지상으로 내려와라! 하늘에 있다간 우리끼리 충돌할 수도 있단 말이다!"
먹구름과 뇌우로 인해 시야가 차단되자 천사들이 패닉에 빠졌다.
그리고 그 혼란을 이용해.
"달그락!"
티본의 유령 군마가 적진 한복판으로 파고들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끌어올린 오러 블레이드가 지상에 막 내려온 천사의 정면을 강타했다.
콰아앙!
말의 무게와 속도를 그대로 실은 일격.
거대한 덩치의 천사가 방패를 이용해 가까스로 유령군마를 저지했다.
"크윽! 저주 받은 언데드는 인간 따위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들었거늘. 어째서…… 이곳을 지키려고 목숨을 거는 것이냐!"
천사의 말에, 티본의 안광이 한층 더 짙어졌다.
"우리 마스터는 평범한 인간 따위가 아니다."
그리고.
"마스터를 함부로 평가하는 건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
만약 욕을 해도 고인물 코퍼레이션에 소속된 주주들만이 할 수 있다.
평소에 갈굼 받고 구박 받고 온갖 노예 짓을 다하고.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린 이들만이 발언권을 얻을 수 있단 말이다!
[티본이 '브로큰 블레이드'를 발동합니다!]
파치치……칙!
칼날에 녹이 쓰는가 싶더니, 이내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브로큰 블레이드.
스스로의 무기를 부식시켜 극한의 공격력을 얻을 수 있는 스킬이다.
콰아앙!
또 다시 검과 검이 교차했다.
치열하게 이어지는 전투 속.
마지막으로…….
'구미호화'가 진행된 안드리아와 키자키엘이 정면으로 맞섰다.
"넌…… 분명, 아래층의 보스몬스터인 걸로 아는데?"
"응. 맞아. '정신 병동'을 담당하고 있는 안드리아라고 해."
"어이가 없군. 이제는 하다하다 보스 몬스터까지 플레이어의 편에 서다니."
"그게 잘못된 거야?"
"그걸 질문이라고……! 탑의 한 층계를 담당하는 존재가 고작 탑을 오르는 등반자에게 복종하는 게. 그것이 제대로 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너에겐 긍지나 자부심 같은 건 없냔 말이다!"
"응. 그런 것 따윈 없어. 애초에 난 죽었어야 할 몸이었거든."
이용당하다가 버려지고. 결국엔 제물로서 희생되어야 하는 부속품.
그게 안드리아에게 정해진 운명이었다.
"보스니 긍지니 하는 건 아무래도 좋아. 그런 사소한 건 얼마든지 내던져버릴 수 있어."
9개의 꼬리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여우불 놀이.
마법 계열 능력과 환술 계열 효과가 동시에 가미된 능력은 상대하기에 굉장히 까다로운 종류였다.
특히, 여우의 특성상 유연하고 빠른 움직임이 가능했기에 쉽게 승기를 잡기 어려웠다.
하지만, 잡기 어렵다는 건 어디까지나 조금 까다롭다는 것일 뿐.
아무리 날고기는 구미호라 하더라도 키자키엘의 상대가 될 순 없다.
콰콰콰콰콰콰!
검이 허공을 갈랐다.
"아악!"
안드리아의 몸이 십 미터 가까이 튕겨나갔다.
단순히 검풍만으로도 터무니없는 물리력을 강제한다.
이것이 전투 천사들을 이끄는 전투지휘단장. 키자키엘이다.
"조금 특별한 능력을 얻었다고 해서, 천계를 지배하는 에덴에게 대적하다니. 그 오만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겠다."
그런데 바로 그때.
"틈이 제법 많군."
키자키엘의 그림자 사이로 무언가 튀어나왔다.
그림자 속에서 숨어 호흡이 어긋나는 틈을 노리던 월영이었다.
푹!
갑주를 파고든 검이 키자키엘의 살을 헤집었다.
"……!"
그 와중에 재빨리 몸을 틀어 피해를 최소화하긴 했지만, 키자키엘의 몸에서 처음으로 피가 흘러나왔다.
하얀 갑주에 붉은 선이 그려졌다. "너희야말로 주군이 계신 곳에 함부로 발을 디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거다."
검은 그림자 속에 녹아 필요할 때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법.
스스슥.
그림자 속에서 수십 명의 그림자들이 솟구쳤다.
전원이 음영대에 소속된 정예들이었다.
"쳐라."
"존명."
복면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
"이제 후방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
진혁이 느긋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든든하게 거점을 지켜주는 동료들 덕분에 한시름 놓았다.
"……."
나태가 손을 휘저었다.
차원을 이어 거인들의 성채를 보여주던 거울이 그대로 사라졌다.
"왜? 더는 안 보려고?"
"그럴 필요 없겠지. 어차피 무의미할 테니까."
키자키엘은 오랫동안 싸울 수 없다.
에덴으로부터 추방당한 현재. 장기전으로 끌고 갔다간 나머지 천사들이 개입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후위전은 완전히 내 참패로구나. 솔직히 말해. 이렇게까지 대비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의외로 포기가 빠르네. 기왕이면 목숨도 그렇게 빨리 포기해줬으면 좋겠는데…… 피차 쓸데없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게끔 말이야."
니힐리즘과 혈을 통제해 능력을 봉인한 지금.
승리의 여신이 어느 쪽을 향해 웃어주고 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스윽.
진혁이 바너드를 앞으로 뻗었다.
우우우웅!
검붉은 검강이 검신을 완벽하게 감쌌다.
하지만.
"안됐지만, 내가 쓸데없는 거에 자존심을 부리거나 목숨을 거는 성격이 아니다."
귀찮다. 혹은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싶지 않다.
나태는 의도적으로 위험한 다리를 건너려드는 걸 포기했다.
"부하들이 이렇게나 많이 남아있는데도 도망치겠다고?"
"아직 신도들이 제법 많이 남아 있긴 하지. 하지만, 네놈이 준비한 별동대가 투입된다면 단숨에 구멍이 뚫리지 않겠나?"
나태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향했다.
넓게 펼쳐진 숲 너머, 희미한 육향이 바람을 타고 다가왔다.
"트롤들을 매복해놨더군. 저층에 소속된 놈들답지 않게 강한 놈들로만 골라서 말이다."
"……이야. 이제 보니까 코도 개코였네. 일부러 최대한 멀리 배치시켜 뒀는데, 그것까지 간파했다니."
진혁이 작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완벽의 완벽을 기하기 위해 준비해 둔 두 번째 히든 카드.
카라칼과 서리 칼날 부족의 트롤들이 다이어 울프를 대동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팽팽한 균형이 이어지는 순간, 측면을 급습하여 단숨에 승부를 확정 지으려 했었는데.
저 여우같은 놈이 그걸 눈치챈 것이다.
'대놓고 도망치기로 한 거면, 빠져나갈 수 있는 수단 또한 준비해뒀겠지.'
신도들을 방패로 삼아 공간이동 마법을 펼친다면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현재로서는 말이다.
"드디어 네놈을 쓸 때가 왔구나. 내가 이곳에서 떠나는 동안, 저 녀석을 막아라."
"크르르……."
나태의 앞으로 기묘하게 생긴 데스 나이트가 나타났다.
이제 갓 만든 듯 아직 인간의 티를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언데드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았다.
스릉!
"저놈은……."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모를 리가 없다.
흑갑으로 전신을 감싸고 있지만, 얼굴은 훤히 드러나 있었으니까.
페이던.
이번 연합 레이드의 공대장을 맡았던 배신자다.
그렇게 살려고 아등바등 발버둥치더니, 그 말로가 꽤나 처참하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영원히 나태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이 녀석은 재료가 좋아 특별히 심혈을 기울여 만든 개체다."
희귀한 마계의 부산물들과 고급 장비들이 아낌없이 투자됐다.
거기에.
[나태가 Lv35 '마력 계승'을 발동합니다!]
시전자의 마력을 대상에게 나눠주는 특수 스킬.
쿠쿠쿠쿠쿠!
"크아아아!"
나태의 마력을 주입 받은 페이던이 거칠게 포효했다.
무시무시한 마력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당연한 이야기다.
지금 페이던의 몸엔 나태의 힘이 깃들어 있으니까.
"죽……인다. 전부…… 다."
페이던이 양 손으로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 다음에는 귀찮지만 조금 더 준비해서 오도록 하겠다."
나태가 미련 없이 등을 돌린 뒤, 공간이동 마법을 발동시켰다.
회색 룬어들이 어지럽게 허공을 수놓았다.
그래.
이걸로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할 거다.
[고유 능력 '혈폭(血爆)'이 발동됩니다!]
나태와 페이던의 거리는 고작 몇 미터.
페이던의 몸속에 있던 핏방울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궁지에 몰리면 페이던에게 뒤를 맡긴 채 도망갈 거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어. 조금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마력 계승 역시 사용하리란 것도."
"그게 무슨 뜻이……?"
나태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공간이동 마법이 발동되는 것과 페이던의 몸이 폭발하는 것.
그 두 개는 거의 동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콰아아앙!
그 찰나면 충분하다.
"끄아아아!"
공간이동 마법이 취소되며, 나태의 상반신이 폭발에 휩쓸렸다.
워낙에 지근거리에다 방어 태세도 되어 있지 않았기에 결과는 더욱 치명적이었다.
***
"으으……으으으……."
오른 팔과 얼굴 삼분의 일을 잃어버린 나태가 비틀대며 땅바닥을 기었다.
죽이려면 어렵지 않다.
간단한 칼질 한 번만으로도 숨통을 끊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여기서 놈을 끝장내는 것보단…….
"……."
진혁이 나태의 바로 위에서 바너드를 움켜쥐었다.